물론 진찬현은 중국에서 열사가 돼 지금까지도 존경 받고 있다. 그러나 그를 기념하면서 국민당 반동파의 죄행에 대해 증오하는 것 이외에 돌이켜 생각해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필 등은 진찬현과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그렇다면 왜 그런 독수를 썼을까? 진찬현은 당시 무슨 일을 했을까? 달리 되돌아봐야 할 일은 없는 것일까? 신중국 성립 후, 당시 강서성 남부 지역에서 당 건립과 농민운동에 종사하고 있었던 진기함(陳奇涵) 상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진찬현 동지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공성(贛城) 자산계급과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희생됐다. 이것은 분명 영광이다. 그러나 공산당원으로써 얘기하자면 그는 엄중한 결점과 잘못이 있다. 양화, 주단, 포목 점원의 임금 인상과 삭감 실시에 대해 투쟁할 때, 그는 상황을 분석하고 처우에 대해 판별하지도 않은 채 똑같이 대하면서 있어서는 안 될 손실을 보게 만들었다. 당시 양화, 주단 점원의 임금은 금융업 점원에 맞춰 원래 임금의 14배를 갑자기 인상했다. 금융업, 양화, 주단 점주는 자본이 충분하고 점원이 많지 않아 부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목점 점원의
장개석(蔣介石, 1887년~1975년), 이름은 중정(中正), 자는 개석(介石)이다. 유명은 서원(瑞元), 족보 이름은 주태(周泰), 학명은 지청(志清)이다. 본적은 강소(江蘇) 의흥(宜興)이고 절강(浙江) 봉화(奉化)에서 태어났다. 근대 중국의 저명한 정치인물이요 군사전문가이다. 역대로 황포군교(黄埔軍校)교장, 국민혁명군(国民革命軍)총사령, 국민정부 주석, 행정원 원장,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위원장, 중화민국 특급상장, 중국국민당 총재, 삼민주의청년단 단장, 제2차 세계대전 동맹국 중국전구 최고통수, 중화민국 총통 등 직을 역임하였다. 장중정은 손중산(孫中山)의 총애를 받아 민국정단에 들어섰고 손중산 별세 후 중국국민당을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국민정부시대에 줄곧 군정 핵심으로 중국의 항일전쟁과 세계대전을 이끌었고 제헌 이후 1대부터 5대까지 중화민국 총통을 27년 동안 역임하였다. 정치방법과 독재정치로 비평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 생애는 북벌(北伐), 훈정(訓政), 국공내전, 항일전쟁, 제헌, 민국정부 대만 이전 및 동서양 냉전을 모두 거쳤다. 중국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75년 4월
원인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중국인들의 단편적인 몇 가지 관점을 나열해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 첫째 의견 : 공산당은 손중산을 추앙할 뿐만 아니라 솔론(Solon) 등 노예주의 계급의 개혁가, 상앙(商鞅) 왕안석(王安石) 등 지주계급 혁명가와 개혁가, 워싱턴 나폴레옹 링컨 등 자산계급 혁명가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실제 평가는 차치하고 그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사교과서에서는 그러하다. 그들이 무산계급혁명가들은 아닐지라도 당시의 역사 조건아래 진보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산당원은 역사유물주의자인 것은 당연하다. 역사유물주의에서 역사 인물을 평가하는데 역사상의 인물들을 선악이라는 추상적인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역사 환경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당시 해당 지역의 생산력이 어떠한 수준에 처해 있는가? 사람들의 의식주, 생로병사는 어떻게 해결했는가? 어떤 이익집단이 존재했는가? 고찰하는 역사 인물은 어떤 집단을 대표하는가? 그들과 적대적인 집단은 무엇이 있었고 어떠했는가? 피차간 주장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어떤 주장이 생산력을 해방시키는데 이익이 있었고, 진보적
손중산(1866년~1925년), 광동성(廣東省) 향산현(香山縣) 취형촌(翠亨村) 사람으로 어렸을 때의 이름은 제상(帝象)이고 뒤에 문(文), 중산(中山)으로 바꿨다. 자는 재지(載之)이고, 호는 일신(日新), 일선(逸仙)이다. 근대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가로 청소년 시기에 광동(廣東)인민투쟁의 영향을 받았고,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혁명 사업을 계승했다. 중화민국(中華民國)과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창설자이자,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제창자이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 중화민국 임시대총통(大總統)이 되었다. 저서로 『건국방략建國方略』, 『건국대강建國大綱』, 『삼민주의三民主義』 등이 있고, 사후에 후인들이 『국부전집國父全集』을 여러 차례 출간했다. 1911년 ‘무창기의(武昌起義)’를 기점으로 손중산이 이끄는 신해혁명이 전국에서 폭발하면서 만청(滿淸) 왕조의 마지막 지푸라기를 잘라 버렸다. 이듬해 1월 1일, 손중산은 남경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한다고 선언하면서,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성립됐다. 1913년, 손중산 등 혁명당 당원들은 원세개(袁世凱)를 토벌한다는 명분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2개월도 안 돼
손중산(孫中山, 1866~1925), 이름은 문(文), 자는 재지(載之), 호는 일신(日新), 일선(逸仙)이다. 중국 근대 민족주의혁명의 개척자, 중국 민주혁명의 위대한 선구자, 중화민국과 중국국민당의 창립자,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창도자로 불린다. 『오권헌법五權憲法』을 창립하였다. 최초로 반제 반봉건의 기치아래 “공화(共和)를 이루어 이천 년의 봉건군주제를 종결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광동성 향산(香山)현(현 중산中山시) 취형촌(翠亨村)의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 중화민국 임시대총통(1912년 1월 1일 ~ 1912년 4월 1일)이 되었고 1925년 3월 12일 북경에서 별세하였다. 1940년에 ‘중화민국국부’로 존칭되었다. 천지회(天地會), 청대 민간결사 중 하나로 홍문(洪門)이라하기도 한다. 속칭 홍방(洪幇)이다. 천지회 창립 시기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고 현재까지 정론이 없다. 그 구성원을 보면 최초에는 대부분 농민이거나 파산한 농민이 변한 수공업자, 행상인, 노점상인, 수륙교통을 이어주는 운수노동자, 그리고 기타 고정적인 직업이 없는 강호 유랑자들이었다. 이후 성분이 나날이 복잡하게
오패부(吳佩孚, 1871~1939), 자는 자옥(子玉), 산동 봉래(蓬萊) 사람으로 북양군벌 직계(直系, 직례파直隷派)의 총수다. 젊었을 때 군대에 들어갔으며 뒤에 보정(保定)의 무비학당(武備學堂)을 졸업하고 원세개(袁世凱) 부하였던 조곤(曹錕)의 휘하로 들어갔다. 중국정부 성립 후 벌어졌던 군벌들의 혼전 중에 직례파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20년 일본의 후원을 받은 안휘파(安徽派)의 단기서(段棋瑞)에게 승리를 거두고, 1922년 역시 일본의 영향 하에 있었던 봉천파(奉天派) 장작림(張作霖)에게 승리를 거둔다. 뇌물 선거로 조곤을 대총통에 당선시키고 영미(英美)계 군벌인 직례파의 최고 거두가 돼 북경 정계를 지배했다. 1923년 경한선(京漢線)의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고(2·7사변), 공산당원 임상겸(林祥謙)을 불태워 죽였다. 이와 같은 잔학성은 군벌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 1924년 다시 봉천파와 싸웠으나 풍옥상(馮玉祥)의 배반으로 장작림에게 패배하고 하남(河南), 화북으로 후퇴했다. 1926년 북벌군에 패해 사천성(四川省)으로 퇴각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정계를 떠나 1932년부터는 북경에서 살았
장작림(張作霖, 1873~1928), 요녕성(遼寧省) 사람이다. 마적단 출신으로 러일전쟁 때 장경혜(張景惠) 등과 함께 일본군의 별동대로 비밀리에 활약했고 그 후 동삼성(東三省)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가 순방(巡防)대장이 됐다. 중화민국 수립 후 봉천(奉天, 현 심양瀋陽)에 들어가 1919년경 봉천 독군(督軍) 겸 성장(省長)으로 동북의 실권을 장악했다. 1920년 화북에서 직례파(直隷派)와 안휘파(安徽派)의 군벌전쟁에서 직례파를 지지하고 중앙정계로 진출해 열하(熱河), 차하르(察哈爾) 등을 세력범위에 넣은 뒤 직례파의 오패부(吳佩孚)와 화북 쟁탈전을 여러 차례 벌여 강소(江蘇)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한때 형세가 불리하자 북동으로 후퇴한 다음, 1926년 직례파 군벌과 합세해 다시 북경으로 진출, 혁명군의 북벌을 저지했다. 1927년 열강의 묵인 하에 북경의 공사관 구역으로 군사를 투입하고 소련 대사관 수사 등 탄압을 가하여 이대교(李大釗) 등 20명을 처형했다. 그 해 6월 대원수라 칭하고 일본을 배경으로 북경정부를 장악했으나 북벌군에게 패배해 북경에서 철수 퇴각하던 중 1928년 6월 그가 탄 열차가 봉천 부근에 이르렀을 때 폭파돼 사망했다. 장작림의 세력
새금화(賽金花)는 청말민초(淸末民初)의 명기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래 이름은 부옥련(傅鈺蓮)이라 하기도 하고 조채운(趙彩雲)이라 하기도 한다. 강소(江蘇) 염성(鹽城)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안휘(安徽) 이현(黟縣) 사람이라고도 한다. 동치7년(1887)에 일찍이 장원급제했던 홍균(洪鈞)이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첩으로 삼았다. 그때 홍균의 나이는 48세였고 그녀의 나이는 15세였다. 얼마 후에 홍균이 주 러시아 공사 및 유럽 각국의 공사로 발령되자 홍균의 부인이 사교장에 다니기 싫어해 그녀를 대신 동반하도록 했다. 홍균이 죽은 후에 상해로 가서 다시 기녀가 됐다. 이름을 조몽란(曹夢蘭)으로 개명했다가 뒤에 천진(天津)으로 가 또다시 새금화(賽金花)로 바꿨다. 새금화는 청나라 말기 여러 명기 중 가장 전기적인 인물이다. 시류에 부침한 기구한 운명, 일생 동안 각양각색의 호둣속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경국지색에 대해서 ; 호객을 하던 기녀들의 배에서 일약 ‘공사부인(公使夫人)’이 돼 조정명관 홍장원을 따라 유럽을 방문했던 기이한 경력에 대해서 ; 경자사변(
이홍장(李鴻章, 1823-1901), 자는 소전(少荃), 안휘(安徽) 합비(合肥) 사람이다. 이홍장은 염군(捻軍, 1851년에서 1868년 사이 황하, 회하(淮河) 유역에서 발발했다. 염당(捻黨)이 변한 농민봉기군의 반청(反淸) 전쟁이다. 환(皖), 예(豫), 노(魯), 소(蘇), 악(鄂) 접경지역에서 독립된 대오를 형성하다가 나중에 연합했다)과 태평천국 군대를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강소(江蘇)순무, 양강(兩江)총독을 역임했다. 양무운동(洋務運動, 19세기 후반 청나라에서 일어난 중국 근대화 운동)의 제창자 중 한 사람이다. 1870년 이홍장은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을 역임하게 돼 청 정부의 군사, 외교와 경제의 대권을 장악했다. 이홍장은 국내적으로는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군중 운동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서슴지 않았고 대외적으로는 타협하고 양보해 『마관조약馬關條約』, 『중아조약中俄條約』, 『신축조약辛丑條約』 등 치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이홍장은 중국 군대사상 반동 및 매국 세력의 전형적인 대표로 평가받는다. 저서로 『이문충공전집李文忠公全集』이 있다. 이홍장은 증국번(曾國藩), 장지동(張之洞), 좌종당(左宗棠)과 더불어 &
증국번(曾國藩, 1811~1872)은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호남(湖南) 쌍봉(雙峰)이라는 외진 시골에서 태어난 서생으로 28세에 입경해 과거를 보고 진사가 됐다. 이후 그의 벼슬길은 탄탄대로를 걸었고 군기대신 목창아(穆彰阿)의 유능한 문하생이 됐다. 북경에서 10여 년을 지내면서 한림원 서길사(庶吉士)를 역임한 후 시독, 시강학사, 문연각 직각사(直閣事), 내각학사, 계찰중서과사무(稽察中書科事務), 예부시랑 및 서병부(暑兵府), 공부, 형부, 이부시랑 등의 직을 역임했다. 증국번은 학식이 남달랐고 벼슬길도 순탄했다. 증국번이 살았던 연대는 청(淸) 왕조가 건가(乾嘉, 건륭(乾隆)과 가경(嘉慶))성세에서 몰락과 쇠퇴의 길로 접어들면서 내우외환이 겹치고 핍박받는 시대였다. 증국번은 모친의 상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마침 태평천국(太平天國)이 호상(湖湘, 호남(湖南) 상강(湘江) 일대) 지역을 휩쓸고 있었다. 청 왕조의 통치는 아슬아슬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증국번은 고향에서 상군(湘軍)을 조직해 태평천국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에 따라 일등용의후(一等勇毅侯)에 봉해졌다. 청대에 문인이 무후(武侯)에 봉
『중국역대인명사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연영(李蓮英), 청나라 순천(順天) 대성(大城) 사람이다. 원명은 영태(英泰)인데 나중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자는 낙원(樂元)이고 호는 영걸(靈杰)이며 작호(綽號)는 피초리(皮硝李)다. 소리자(小李子)로도 불린다. 아홉 살 때 입궁해 태감이 됐고 영합을 잘해 자희(慈禧)태후(서태후)의 총애를 받아 내정(內廷)총관에 발탁돼 이품정대(二品頂戴)를 하사받았다. 궁정에 50여 년 동안 있으면서 권력을 농단하고 조정 일에 참여했다. 유신파(維新派)를 모함했고 매관매직으로 뇌물을 받아먹은 등 당대 최고의 권감(權監)이었다. 광서(光緖)34년(1908) 자희태후가 죽은 뒤 궁밖에 나가 있다가 얼마 뒤 죽었다. 자희(慈禧)태후 곁을 지키던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총신(寵臣)은 태감 이연영(李蓮英)일 것이다. 그는 동치(同治), 광서(光緖) 2대에 걸쳐 태감대총관(大總管) 자리에 있었다.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후궁 총비들도 그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관련한 민간 전설이 많다. 그가 비명횡사했다는 사람도 있지만 역사 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연영의 시체가 어디에 묻혔는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
시대가 변하면서 영화나 드라마에 의해 태감(太監)이 무엇인지 갈수록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 중국 이천여 년이 넘는 봉건전제사회에서 태감은 역사발전사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왕조의 멸망이 태감의 손에 좌우되기도 했다. 태감에 대한 호칭은 많다. 환관(宦官), 사인(寺人), 엄인(閹人), 중관(中官), 내시(內侍)가 그것이다. 모두 거세(去勢, 엄할閹割)한 남성이다. 전문적으로 황궁에서 황실에 시중들던 인물들을 가리킨다. 태감은 남성이라 할 수 없었다. 수염도 없고 목소리도 높고 가늘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위와 목소리가 여성화된 경향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을 여성으로 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어떤 의미에 있어 그들을 ‘중성인(中性人)’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대(漢代) 이후 태감들은 취처(娶妻)하기도 했다. 즉 장가를 갔다는 말이다. 태감의 처자는 대부분 궁중의 여관(女官)으로 그들의 결합을 당시에는 ‘대식(對食)’이라 불렀다. 생식 능력이 없는 태감이 어째서 취처했는가? 그 상황에 대해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