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그해의 장면을 회고해볼 필요가 있다. 모택동과 유소기는 40년을 알고 지냈다. 세인들이 인정하는 대혁명가이며 계급투쟁 이론과 실천에 있어 거장이며 사표였다. 회의장을 가득 메운 각급 간부들은 거의 모두 계급투쟁의 전문가였고 계급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특출한 인물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충심으로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방침을 옹호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다.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기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경제대혁명’의 참패, 그 충격은 결국 견딜 수는 없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패배의식에 빠져있는 바로 그때, 계급투쟁을 재삼 강조해 나오니 함께 목숨 걸고 혁명하였던 인물들 모두 더운 피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을 향하여 호소하며 분발시키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들을 “승리에서 승리로” 이끈 모택동이 아니던가. 일호백낙할 게 분명하였다. 당시는 국제적으로 내우외환이 겹친 상태였다.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었다. 각 부처 책임자들은 상당히 민감해
1962년 2월 21일, 유소기 주재로 정치국상위(常委)확대회의를 개최해 모두 함께 문제 해결 방법을 토론하였다. 이 회의를 통칭 ‘서루회의(西樓會議)’라 부른다. 토론 시 그해 예산이 거액의 적자가 발생했음을 발견한다. 5년 동안 누적된 적자 금액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회의에 참석자들이 모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상품 공급량과 사회 구매력 사이의 초과분은 축소된 것이 아니라 더 벌어져 있었다. 모든 분야가 절박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유소기가 말했다. “그것이 진면목인데, 두려울 게 뭐 있겠소? 칠흑같이 캄캄하다는 것은 비관적일 수도 있으나 곤란을 뛰어넘는 투쟁의 용기를 북돋는 것이 되기도 하오.” 그는 국민경제가 ‘비상시국’이라 여기고 모두 경제, 정치 방침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였다. “비상한 방법이 필요하오. 모든 경제 조치를 관철해 나가야 하오.” 진운(陳雲)은 회의에서 계통적으로 발언하고 각 분야의 당위 구성원들도 발표하였다. 엄중한 문제에 대하여 실사구시의 분석을 내놓으면서 난관을 극복할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3월 중순에 유소기, 주은래
유소기(劉少奇, 1898~1969), 호남성 영향현(寧鄉縣) 사람으로 중국공산당원이자 혁명가, 정치가, 이론가이다. 1920년에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다음 해에 소련 모스크바 동방공산주의노동대학(東方共產主義勞動大學)에서 학습한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귀국 후 1925년에 제2차 전국노동대회에서 전국총공회(全國總工會)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27년에 중공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31년에 정치국후보윈원(政治局候補委員) 중국중앙직공부(中共中央職工部) 부장, 전국총공회당단(全國總工會黨團) 서기 등을 지냈다. 1943년에 중공중앙서기처 서기와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되었다. 중공 성립 후에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국방위원회 주석 등을 지냈다. 저서로 『유소기선집劉少奇選集』이 있다. 중국학자들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유소기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고 중화인민공화국 개국 원훈이며 모택동(毛澤東) 동지가 중심인 공산당의 제1대 중앙 지도자 그룹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일찍이 전우였던 모택동은 왜 유소기를 죽였을까? 이전에 팽진(彭眞)과 양상곤(楊尚昆)이 유소기의
모택동(毛澤東)과 장개석(蔣介石)은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영수다. 중국학자들이 판단하고 있는 용인술을 보자. 일반적으로 지역적으로는 ‘오호사내(五湖四海, 방방곡곡)'와 ‘황포절강'(黃埔浙江)’이라 대별하고 ; 사람을 씀에 있어서는 ‘상관하지 않고 활용’과 ‘월권적 지휘’ ; 보편적이 입장은 ‘법률에 의거한 용인’과 ‘제왕지술(帝王之術)’의 구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했다고 본다. 모택동은 ‘오호사내’에서 인재를 구했고, 장개석은 ‘황포와 절강’의 인재를 중용했다. 모택동의 ‘오호사내’에서 인재를 구한 원칙은 왕가상(王稼祥)을 기용한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1945년 4월, 중공칠대(七大)가 연안(延安)에서 개최됐다. 새로운 중앙위원회 선거에서 왕가상은 반수 이상을 득표하지 못하고 낙선한다. 모택동이 그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다. 당내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모택동은 중앙위원 후보 선거 전에
셋째, 의견 분화로 ‘서안사변’ 후 장개석을 남경으로 호송했다. 중원 대전 몇 개월 후, ‘통일 촉진’, ‘중앙 옹호’로 개세의 공로를 세운 장학량은 결의형제인 장개석의 모든 것을 듣고 따랐다. 그때, 일본군은 동북지방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위협 정도가 나날이 강해져 갔다. 그런데 장개석은 풍옥상 등 지방 군벌의 위협을 제거한 후 전력으로 남방 중공 홍군에 대처하고 있었다.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국책(國策)’을 충실히 실행했다. 장학량의 부친인 장작림은 일본군에 의해 폭사했다. 국가를 책임지고 있으면서 집안의 원한을 품고 있던 장학량은 원래부터 일본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실행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장개석에서 “일본의 침략 정책을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등의 요구”를 제시했으나 장개석은 비준하지 않고 일본과의 담판을 주장했다. 『고유균(顧維鈞)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위원장은 현실주의적인 정치가다. 그는 반드시 일본과 담판을
둘째, 중원대전에서 장개석에게 보좌에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장개석은 자수성가해 전국 영수의 자리에 앉은 인물이었다. 세가의 배경도 없이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났다. 그렇기에 과정이 순탄치 않았고 비바람이 그칠 새 없었다. 1924년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역임할 때에도 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당내 지위도 높지 않았다. 중앙위원도 아니었다. 몇 개월 후 손중산(孫中山)이 병으로 세상을 뜰 때 정한 후계자는 왕정위였다. 장개석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투쟁했다. 교군(校軍), 당군(黨軍)을 조직하고 국민혁명군 제1군을 조직하면서 점차 군권을 넓혀 나갔다. ‘중산함 사건’, ‘정리 당무안’, ‘4.12’, ‘청당(淸黨)’을 겪고 남경에 중앙을 세우면서 당권을 쟁취해 나갔다. 그 과정을 ‘사전적 서술’로 간단하게 살펴보자. 손중산이 1925년에 북경 정부의 임시 집정인 단기서(段祺瑞)와 국민회의 소집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북상했다가 병사한다. 따라서 광동 정부는 국민정부로 개조됐는데, 개조에 앞장섰던 왕정위(汪精衛)가
장학량(張學良, 1901년6월~2001년10월), 자는 한경(漢卿), 호는 의암(毅庵), 어릴 적 이름은 쌍희(雙喜). 한족으로 본적은 요녕성 반금(盤錦)시 대와(大洼)현 동풍(東風)진이고 요녕성 안산(鞍山)시 태안(台安)현 환동(桓洞)진 악가촌(鄂家村) 장가와보둔(張家窝堡屯, 옛 명칭은 상자림첨가와포[桑子林詹家窝鋪])에서 태어났다. 국민혁명군 고급장교다. 봉계(奉系)군벌 수령 장작림(張作霖)의 장자다. 1920년 동삼성육군강무당(東三省陸軍講武堂)을 졸업하고 봉계군벌에서 요직을 역임하다 ‘황고둔사건(皇姑屯事件)’이후 동북보안군총사령을 계승해 일본군의 포섭을 거절하고 “동북의 기치를 바꿔” 중국 통일에 공헌을 하였다. 나중에 중화민국 육해공군 부사령, 육군 일급상장을 역임하였다. 서안사변(西安事變) 이후 장개석(蔣介石) 부자에게 장기간 연금되었다. 1990년에 신체의 자유를 얻고 1995년에 대만을 떠나 미국 하와이로 이주했다가 2001년 10월 14일에 호놀룰루(Honolulu)에서 별세했는바 향년 101세였다. 장학량은 항일을 주장하고 내전을
장개석이 대만으로 철수하는 결정은 창졸간에 내린 것이 아니다. 하야하기 전에 이미 결정돼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만은 장개석이 하야한 후 퇴로로 선택된 경로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고 유일한 선택이란 말은 아니다.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 수도 및 중심이라는 관점에서 보자. 남경(南京)은 국민 정부가 수립된 수도다. 항일전쟁시기 잠시 수도를 중경(重慶)으로 옮겼었다. 항일전쟁이 끝난 후 다시 남경으로 이전했다. 국공내전이 긴급하게 전개될 때 몇몇이 천도에 대해 말했지만 장개석은 응대하지 않았다. 전쟁이 급박하게 전개된다고 해도 반드시 천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대만은 장개석이 가장 중시하는 지역 중 하나였다. 대략 1947년 말, 이미 각종 사무의 안배가 끝나 있었다. 장개석 개인이 대만으로 옮기려는 결정은 아마도 국공 북경담판이 실패한 후일 가능성이 많다. 이종인(李宗仁)이 거듭 하야를 종용했고 중공이 장강을 건너오면서 상해가 직접적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자 대만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시간은 1949년 4월 말이 분명하다. 모든 정부가 대만으로 천거하는 결정은 5월 정해군사회의(定海軍事會議) 때이며, 5월 16일 국민당 중앙회의에서
조보 : 국민당 군대 내에 ‘정공'(政工, 정치공작) 부서는 아무런 역할을 못했는가? 고화 : 국민당 군대 중에 정치부는 줄곧 군사 주관아래의 막료 기구였다. 1944년 6월에 내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의 압력을 받아 국민당은 미군체제를 배워 처음으로 군에서 당부를 철퇴하고 군위회(軍委會) 정치부를 공보국으로 고쳤으며 그 외에 국방부 감찰국과 민사국을 뒀다. 정치부 직능을 세 분야로 나눈 것이다. 당부가 군대에서 퇴출된 후 정공 인원은 군대에서 지위가 높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엉터리 약을 파는 곳’이라 보면서 군대 내부에서는 더더욱 응집력이 없었다. 왕정균(王鼎鈞)의 회고에 따르면, 내전 후기 국군 관병들이 국군 실패를 논할 때 다른 사람의 일을 얘기하듯 했다고 한다. “타인의 불행을 즐긴다”고나 할까. 모두 해방군의 포로가 될 때까지 그런 태도를 가졌다고 했다. 국군의 외형은 강대하게 보였으나 내부는 실로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해방군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1945년 10월 25일, 중공 중앙 서기처는 「국군 공작부 성립에 관한 지시」를 보내 각 중앙국과 분국, 군위와 대군구와 야전군, 각
조보 : 장개석의 개인적인 군사 재능이 모택동과 차이가 있다는 점이 실패의 커다란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나? 고화 : 장개석은 군사 방면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몇 십 년 동안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장개석은 계통적인 군사 사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모택동에게는 “10대 군사 원칙”이 있었다. 어떤 때는 장개석의 전략적 안목이 정확하기는 했다. 그런데 자기의 의견이 옳은 게 분명한데도 반대가 있으면 끝까지 견지하지 못했다. 1948년 2월, 장개석은 여러 차례 위립황(衛立煌)에게 금주(錦州)로 주력군을 철군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위립황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장개석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뒀다. 부작의(傅作義)에게 철군해 남하라하고 했으나 부작의는 차하얼과 수원(綏遠, 1928년 중국 북부 내몽고内蒙古에 설치한 성으로 1954년 내몽고 자치구에 병합) 지역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화북을 지키는 것이 대세이고 강남으로 철수하는 것은 일부지역에 안거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장개석도 동의해 버렸다. 더 중요한 것은 장개석의 군사 전략에 중대한 결점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목에 ‘보성수지(保
국민당이 말 위에서 천하를 잃자 중국의 역사는 1949년 총부리에 의해 새로운 장을 쓰게 된다. 남경대학 역사학과 교수 고화(高華)는 국민당의 실패는 “역사의 합리적 작용”에 의한 것이고 가장 중요한 원인이 군사상 실패에 있다고 강조했다. ‘당국(黨國)’의 중심이 돼 당과 국가, 군대를 한 개인이 통솔했는데 장개석의 군사상 실패가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동방조보(東方早報)』와 고화 교수의 대담이다. 동방조보(東方早報) : 국민당의 실패는 큰 제목이다. 정권이 총부리에서 나온다면 결국 총부리를 잃은 것이 되는 게 아닌가? 고화 : 그렇다. 동방 여러 나라의 정권 교체는 총부리가 결정했다. 물론 총부리의 뒷면에는 정치 등의 요인이 있기는 하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실패한 원인에 대해 가장 전면적이고 유행하는 답은 : 국민당의 실패는 역시 “역사의 합리적 작용”에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이며 문화, 사상, 그리고 교육 요소 등 여러 방면이 상호 작용하면서 국민당의 대륙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런 설명은 많은 증거들이 실재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군사
4월 13일 오후 1시, 노동자 시위대는 청운로(靑雲路), 동횡빈로(東橫濱路)를 경유해 보산로(寶山路)에 이르렀다. 기세등등한 시위대는 1킬로미터나 이어졌다. 시위대는 목소리 높여 구호를 외쳤다. 보산로 삼덕리(三德里) 부근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시위대를 향해 군인들이 사격하기 시작했다. 앞에 있던 군중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현장은 혼란에 휩싸였다. 반시간 후, 총소리가 멈췄다. 군인들은 수많은 노동자를 체포했다. 이것이 ‘보산로 유혈사건’이다. 살계를 펴면서 장개석은 ‘청당’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4월 17일, 장개석은 우파 국민당 중앙위원과 함께 남경(南京)에서 정치회의를 개최하고 ‘청당’을 발표했다. 그리고 비밀 1호 명령을 내려 공산당의 수뇌부 197명을 지명 수배했다. 주요 인물은 첫째 보로딘, 진독수, 다음으로 임조함[(林祖涵), 임백거(林伯渠)], 구추백(瞿秋白), 모택동, 운대영(惲代英), 주은래, 류소기(劉少奇), 장국도(張國燾), 팽배(彭湃), 등영초(鄧颖超), 채화삼(蔡和森), 방지민(方志敏) 등이었다. 공산당 좌파 인사, 예를 들어 심안빙(沈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