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어요리. 한국과 일본의 복어요리 현재 복어요리의 최고봉은 일본이고 이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한국은 일본 복요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라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한일간의 복어요리를 거론하기 전에 일본의 복어요리가 활발해진 과정을 검토 해 볼 필요가 있겠다. 앞서 거론 했듯이 일본에서는 1888년 까지 국가가 복어의 식용을 불허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복어요리는 표면에 나타나지 못했다. 혼슈(本州)의 남쪽 끝자락 야마구치현(山口縣)에 있는 시모노세끼(下關)의 제법 규모가 있던 료칸인 ‘슌판로(春帆樓)’에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행이 묵었던 날은 몇 일 동안 풍랑이 불어 총리 일행을 먹일 만한 음식이 변변치 않았다. 평소 시모노세끼 앞바다의 생선을 잡아 요리하는 것으로 유명 했던 이 료칸의 주인은 마침내 죽음을 각오하고 일행이 처음 보는 생선 요리를 바쳤고 이 요리를 맛을 본 이토 히로부미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주인을 불러 생선의 이름을 물었고 주인은 죽을죄를 지었노라 엎드려 빌었다. 풍랑으로 온 마을에 생선이 씨가 말라 요리 할 생선이 없기에 국가에서
▲ 복어요리. 역사에 나타난 복어의 평가 전통적인 대부분의 먹을거리에 대한 선인들의 역사적인 평가는 대체로 이롭거나 좋다는 표현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복어는 특유의 독(毒)으로 인하여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표현들이 많다. 중국에서는 약 2300년 전의 춘추전국시대에 쓰여진 '산해경(山海經)'에 복어를 '적해' 또는 '패패어'라고 기록하고 이 생선을 먹으면 사람이 죽는다고 쓰여져 있다. 이로보아 그 당시 이미 식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같은 시기에 소동파의 유명한 시에 '도화의 봉우리가 터지고 갈대가 싹이 틀 때 하돈이 하류에서 거슬러 올라 온다'는 구절이 있고 더불어 “한번 죽는 것과 맞 바꿀만 한 맛‘이라는 극한 표현을 남길 만큼 소동파는 황복의 매니아로 전해져 오며 이 표현은 지금까지도 복어 요리의 맛에 대한 최상의 표현으로 인용되고 있다. 중국 명나라때 지어진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복어 껍질과 점막사이의 살이 월나라의 절세미인인 서시의 젖가슴처럼 부드럽고 희다’라고 표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유래해서 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