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전통가옥인 초가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4·3과 6·25 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도 그 명맥을 이어왔지만, 새롭고 편리한 문물이 쏟아져 들어온 근현대를 거치며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오랜 세월 전통을 이어온 장인(匠人)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늙고 병들어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3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4·3에도 멀쩡하던 초가…근현대화에 사라져 40대 중반인 기자가 제주 전통 초가에서 생활한 적은 없다. 다만 어렸을 적 친할아버지·할머니가 살던 초가집에 대한 추억은 간직하고 있다. 친할아버지·할머니댁은 제주시내에서 자동차로 1시간 남짓 떨어진 한림읍 동명리에 위치에 있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안채'를 뜻하는 제주어)와 밖거리(바깥채), 모커리(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가로 높인 부속건물)가 'ㄷ'자 모양으로 된 세거리집이었다. 1938년생으로 올해 90세 가까이 된 아버지는 옛날 초가집에서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자매와 살던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고조부 이전부터 대를 이어 살았던 오래된 집이었다. 하지만 가족은 4·3
제주도의 오름은 공식적으로 368개이다. 등록되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오름 수는 이를 넘어선다. 하루에 하나씩 오르더라도 1년에 다 탐방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 1년 동안 하루에 하나씩 올라도 못다 오를 오름들 오름의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제주. '오름 왕국'이다. 생성 시기, 생태, 인간 삶과 얽힌 사연이 오름마다 각양각색이다. 분화구 모양, 화구 능선 등 오름의 '개성'을 알아내고, 이런저런 사연에 귀 기울이며, 정상에 서서 바다, 하늘, 들판을 바라보고,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결의 미세한 차이를 느끼는 것은 육지 등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매력이라는 게 제주 오름들을 거의 다 올랐다는 김상수 거문오름 자연유산 해설사의 설명이었다. 오름을 오르다 보면 아름답고 소중한 제주 땅의 자연과 역사를 몸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다. 용눈이 오름은 평생 제주 사진을 찍어 제주의 매력을 알렸던 김영갑 작가가 사랑했던 오름이다. 용눈이는 한 봉우리 안에 분화구가 셋 있다. 용암이 세 번 분출했음을 뜻한다. 세 분화구가 연출하는 지형은 마치 용이 누운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용눈이는 해발 247m, 비고 88m이다. 20분 정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부드러운 능
보건복지부가 6일 2025학년도 대학 입학시험의 의대 증원을 대폭 늘리겠다고 발표한 가운데, 지역별·대학별로 어느 정도로 정원이 늘어날지 관심이 쏠린다. 복지부는 6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에서 올해 3058명인 의대 정원을 2025학년도에는 5058명으로 2000명 늘리겠다고 밝혔다. 다만 전체 증원 규모를 발표하면서 지역별·대학별 정원은 확정하지 않았다. 그동안 복지부가 증원과 관련해 밝혀온 원칙을 고려하면 '지방 국립대 의대'의 증원 규모가 특히 클 것으로 예상된다. 복지부는 지방 국립대를 지역 의료의 거점으로 육성할 계획을 갖고 있다. 복지부가 작년 11월 실시한 의대 수요조사에서 대부분의 지방 국립대는 의대 정원을 현재의 2배 넘는 수준으로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다만 증원 규모가 예상보다 큰 만큼, 현재 정원이 상대적으로 많은 서울 지역 사립대 의대의 증원 폭도 작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원이 40명 이하인 '미니 의대'도 큰 폭의 증원이 예상된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작년 10월 "의대 정원이 최소 80명 이상은 돼야 한다는 전문가 의견이 대통령께 보고됐다"고 밝혔다. 복지부와 교육부의 설명을 종합하면 지역별·대학별 증원 규모는 추후
옛것이 주는 포근함과 정겨움이 있다. 돌담 사이로 난 올레 끝에 마주하는 초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품처럼 따스한 가장 제주다운 것 중 하나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흙, 나무, 풀을 이용해 지은 초가집을 보면 산천초목뿐만 아니라 사람도 자연을 거스르기보다 자연에 순응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3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새 베고 집줄 놓고 초가지붕 새단장 지난 1월 16일 제주성읍민속마을. 아침 일찍부터 국가민속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객주집'에서 '초가지붕 잇기'가 한창이었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은 일반 농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정의고을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어 나그네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거나 술·음식을 팔았던 곳이다. 옛 제주 전통가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마을주민들이 눈과 비바람으로 썩고 낡아 못 쓰게 된 해묵은 지붕을 걷어내자 초가집 속살이 드러났다. 이어 햇볕에 잘 말린 누런 '새'(억새풀의 일종인 '띠'를 뜻하는 제주어)를 초가지붕 위에 두텁고 고르게 덮은 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미리 꼬아둔 집줄을 이용해 바둑판 모양
원초적 적막감과 아득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제주의 아름다움은 화산 활동에서 왔다. 제주도는 약 180만 년 전에 생성됐다는 게 정설이다. ◇ 제주 탄생의 비밀…불과 물의 격렬한 만남 제주도 일대는 원래 얕은 바다였다. 깊숙한 지하에서 올라온 뜨거운 마그마가 바닷물을 만나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면서 더는 물에 잠기지 않는 높이의 지형이 형성됐다. 해수면 위로 육지가 드러난 뒤에도 화산활동은 계속돼 마그마가 분출했고, 분출한 마그마는 용암 대지와 수많은 오름을 만들어냈다. 화산활동은 약 1천 년 전까지 계속됐을 정도로 제주도는 젊은 화산도이다. 화산 지형의 원형이 잘 보존된 편이다. ◇ 제주의 영혼…백록담과 오름 섬 가운데서 수만 년 전 강력한 마그마가 집중적으로 분출해 한라산(1,947m)이 탄생했으며, 약 2만5천 년 전 한라산 정상에서 다시 용암이 분출해 백록담이 생겨났다. 제주도가 곧 한라산, 한라산이 곧 제주도인 '신비의 땅'은 물과 불이 뜨겁게 조우한 결과였다. 제주도에서 산은 '오름'이라고 불린다. '오름'은 산 또는 봉우리를 뜻하는 제주 사투리. '높다' '오르다' '성스럽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작은 화산체인 오름은 용암 분출구였던 분화구
제주의 신화, 전설 속에서 신령스러운 동물인 '영물'(靈物)로 통하는 거북. 제주 사람들은 거북을 '용왕의 막내딸'이라 일컬으며 해녀 물질작업과 조업 안전, 마을의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오늘날 바다거북은 각종 개발사업으로 인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탓에 멸종위기에 놓였다. 사람과 바다거북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제주의 역사·문화 속에서 바다거북의 문화적 의미를 짚어본 지난 연재에 이어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자연의벗과 함께 자연환경적 의미와 가치, 공존 방법에 대해 살펴본다. ◇ 위치추적기 달고 3천847㎞ 헤엄쳐 베트남까지 지난 2008년 10월 21일 제주 서귀포 중문해수욕장에 푸른바다거북이 방류됐다. 석 달 전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 앞 정치망 그물에 걸렸다가 구조된 것으로, 당시 나이가 7∼10살로 추정된 암컷 거북이었다. 63㎝ 길이의 등딱지 앞부분에는 거북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위성추적장치가 부착됐다. 우리나라에서 바다거북에 위성추적장치를 부착해 이동 경로를 관찰한 것은 처음이었다. 손바닥만 한 위치추적기를 단 거북은 엉금엉금 모래사장을 기어가더니 유유히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이후에도 제주와 부산 등지에서 그물에 걸
장수(長壽)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거북. 바당밭(바다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제주 사람들에게 거북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제주 전역에서 바다거북은 제줏말로 '요왕사자' 또는 '요왕할망 말젯똘애기'로 인식된다. 용왕의 신하인 사자(使者) 또는 용왕신의 막내딸아기 정도의 뜻이다. 어떤 의미일까.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제주의 역사·문화 속에서 바다거북의 문화적, 자연환경적 의미와 가치, 공존 방법에 대해 2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바다거북의 고향 제주 지난 1999년 10월 18일 오전 7시께 제주 서귀포시 중문해수욕장 모래 언덕. 힘겹게 알을 깨고 나온 새끼 바다거북 100여마리가 엉금엉금 기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목격됐다. 중문관광단지의 한 호텔 총지배인이던 패리드 슈케어(43)씨가 백사장을 산책하던 중 모래언덕 밑에서 우연히 이를 발견한 것이다. 바다거북은 보통 6∼8월에 모래사장에 알을 낳는다. 지열에 의해 2달가량 지난 뒤 부화하는데 당시 제주에 비가 많이 오면서 온도가 평년보다 낮아 뒤늦게 부화한 것으로 보인다는 전문가 의견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이로부터 3년 뒤 같은 곳에서 바다거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002년
새해를 맞아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본 이후 흉기 습격을 당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부산대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됐다. 2일 경찰 등에 따르면 이 대표는 이날 오전 10시 27분께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본 후 기자들과 문답을 진행하던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남성 A씨로부터 왼쪽 목 부위를 공격당했다. 이 대표는 피를 흘린 채 쓰러졌고, A씨는 현장에서 검거됐다. 사건 발생 20여분 만인 오전 10시 49분에 현장에 구급차가 도착한 데 이어 이 대표는 오전 11시 13분께 의식이 있는 상태로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로 이송됐다. 이송 이후에는 열린 상처 치료와 파상풍 주사 접종 등이 이뤄졌다. 이 대표는 피습으로 목 부위에 1.5cm 정도의 열상을 입은 데 이어 경정맥에 손상을 입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관계자는 "손상된 부위가 경정맥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만약에 경동맥이 손상됐었다면 구급차 도착까지 걸린 시간을 고려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에서 응급처치를 마친 이 대표는 이날 오후 1시께 헬기에 실려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됐다. 권칠승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
2024년 '갑진년'은 푸른 용의 해다. 십이지 중 5번째인 용은 실체를 알 수 없는 상상 속 동물이지만 우리나라 문화 곳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용과 관련된 지명도 전국적으로 많이 있다. 제주에서도 역시 오름이나 마을명 등 곳곳에서 용을 찾아볼 수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이 임진년인 지난 2012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용과 관련된 전국 지명 1200여개 중 제주의 지명은 12개(마을 8, 산 2, 바위 1, 곶 1)였다.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용두암'(龍頭巖)이다. 용두암은 제주시 용담동 해안에 있는 용머리 모양 바위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의 높이가 10m가량 된다. 제주국제공항 인근에 있는 무료 관광지인데다가 탁트인 바다 풍경을 감상하기 좋아서 내외국인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용두암에는 용과 관련된 여러 전설이 있다. 우선 용왕의 사자가 한라산에 불로장생의 약초를 캐러 왔다가 산신이 쏜 화살에 맞아 몸은 바다에 잠기고 머리만 물 위에서 바위로 굳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용이 승천할 때 한라산 신령의 옥구슬을 입에 물고 가려다가 산신령이 분노해서 쏜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지며 몸체는 바다에 잠기고 머리만 울부짖는 모습으로 남았다는 이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일 부산 현지 방문 일정을 소화하던 중 흉기로 습격당했다. 이 대표는 이날 오전 10시 27분께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본 후 기자들과 문답을 진행하던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남성으로부터 왼쪽 목 부위를 공격당해 피를 흘린 채 쓰러졌다. 이 대표는 현재 의식은 있지만 출혈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이다. 경찰은 현장에서 곧바로 이 대표를 공격한 남성을 검거했다. 이 남성은 주변에서 지지자처럼 행동하던 중 사인을 요구하며 접근하다가 소지하고 있던 20∼30㎝ 길이의 흉기로 이 대표를 공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표는 사건 발생 20여분 만인 오전 10시 47분에 도착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다. [연합뉴스]
이형상 목사는 조선시대 제주를 거쳐 간 목사 중에 제주 관련 기록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이다. 기록화첩과 지도, 운문·산문·편지 모음집, 장계, 지리서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처럼 많은 기록을 남긴 건 역대 그 어떤 목사보다도 제주에 깊은 애정을 쏟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근래 들어 이형상의 제주목사 재임 당시 주요 행적과 자취를 되새겨보며 다각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재조명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긍정과 부정 사이" 이형상을 바라보는 제주의 시선' 지난 연재에 이어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이형상 목사의 삶을 들여다본다. ◇ 짧은 재임 기간 제주에 미친 큰 영향 숙종 28년인 1702년 3월 제주에 도착해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이듬해 3월 파직돼 6월 제주를 떠나기까지 15개월 가량 제주에 머물렀다. 실제로 제주목사로 재임한 기간은 1년 남짓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가 제주에 미친 영향은 30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이 목사에 대한 제주 사람들의 관심은 '당(堂) 오백과 절(卍) 오백' 전설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신당 파괴에 집중됐다. 학자들의 선행연구 역시 대부분 음사(淫祀·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라고 칭해지던 신당 철폐 등에 집중됐던 것이
숙종 28년(1702년) 제주에 부임한 이형상 목사(牧使)는 제주에서 '당(堂) 오백 곳과 절(卍) 오백 곳'을 파괴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그는 실제로 변방인 제주에 조선의 성리학적 유교 질서를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으로 '음사(淫祀·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철폐'를 단행했다. 이 탓에 제주에선 이형상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온다. 오늘날 우리는 '문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형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에 미친 영향과 후대의 기억' 학술 세미나를 진행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2차례에 걸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 새로운 질서와 구체제의 충돌 이형상 목사가 화공(畵工) 김남길에게 그리도록 한 채색 화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화첩에 담긴 41개의 그림 중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다. 39번째 그림인 '건포배은'(巾浦拜恩)이다. 1702년 12월 20일 수많은 사람이 관덕정과 건포, 즉 건입포구에서 임금의 은혜에 감사의 절을 올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한라산 중턱과 제주읍성 밖 마을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신당이 불타는 장면이다. 이형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