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늘 농사는 망했습니다. 평년에 상품 70%, 중품 20∼25%, 하품 5% 정도였는데 올해는 상품이 20∼30%도 안 되고 하품 비중이 아주 높아 대부분 농가가 생산비도 건지지 못할 겁니다." 박태환 제주마늘생산자협회 회장은 20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제주의 마늘 작황을 볼 때 더 이상 마늘 농사를 지을 농가들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경남 남해 최윤신 씨 역시 "마늘 농사만 40년 지었는데 올해처럼 피해가 심각한 경우는 처음"이라며 "우리는 80% 이상 피해를 봤고 다른 농가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숨 쉬었다. 지난 2∼3월 고온과 잦은 비로 제주와 전남,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사상 최악의 벌마늘 피해가 발생했다. 벌마늘이란 마늘이 2차 생장을 하면서 줄기가 여러 개로 쪼개져 통상 6∼9개인 마늘쪽이 12개 이상으로 나뉜 것을 말한다. 벌마늘은 깐마늘용으로 쓸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다진마늘 형태로 이용하거나 폐기해야 한다. 벌마늘 피해가 가장 큰 곳은 제주지역이다. 제주도가 지난달 30일부터 지난 1일까지 2차 표본조사 결과, 전체 마늘 재배면적 1088㏊의 57.8%에서 벌마늘 피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도는 13일까지
제주 한라산 중턱의 마방목지에 가면 드넓은 초원에서 뛰노는 제주마를 볼 수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한번쯤 들러 예쁜 추억을 남기는 명소다. 오래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는 제주마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제주마를 일컬어 흔히 부르는 '조랑말', '과하마'라는 말은 맞는 말일까. ◇ 말의 산지 '제주' 그 유래는 언제부터 제주에서 말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일까.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제주에서 말 사육은 탐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의 시조인 고을나·양을나·부을나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나 나라를 세웠다는 '탐라건국신화'에 그 일말의 단서가 남아있다. 세 신인은 사냥하며 가죽 옷을 입고 고기를 주식으로 생활하다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와 혼인한다. 중요한 건 세 공주가 당시 제주에는 없던 새로운 문물을 함께 들여오는데, 바로 오곡의 씨앗과 망아지·송아지 등 가축이다. 역사를 반영한다는 '신화'(神話)의 속성상 이는 수렵의 시대가 저물고 농경과 목축의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문헌 기록으로는 고려 문종 27년(1073년)에 탐라가 고려 조정에 말을 진상했다는 첫 기록이 있어 서기 1000년경 말이 본격
한라산을 오르는 등반객이 어깨에 짊어진 배낭에 빠지지 않고 챙겨가는 먹거리가 있다. 바로 '컵라면'이다. 고된 산행을 거치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뜨끈한 국물에 '후루룩' 흡입하는 라면은 그 어디에서 먹었던 것보다도 꿀맛일 수밖에 없다. 한라산에서 버너 등을 이용한 취사 행위는 불법이지만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은 먹을 수 있다. 한라산에서는 언제부터 컵라면을 먹기 시작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에서 근무하는 직원으로 구성된 '한라산국립공원후생복지회'가 1990년 1월부터 윗세오름과 진달래밭 대피소, 어리목에서 매점을 운영했다. 이때쯤부터 컵라면이 한라산 특식으로 자리매김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당시 후생복지회는 매점을 운영하기 위해 별도로 직원을 채용했다. 컵라면의 인기가 어찌나 좋았던지 후생복지회가 한 해 매점에서 팔기 위해 사들인 컵라면만 30만개가 넘었다고 한다. 수요가 폭발하는 겨울 등반 시즌을 앞두고는 컵라면 수송 작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한라산에 눈이 많이 내리면 화물 운반용 모노레일이 오도가도 못하기 때문에 겨울 등반 시즌 두 달 전부터 라면 수만개와 물을 끓일 석유 등 월동용품을 운반했다. 정상
제주 목축문화를 복원하기 위한 제1회 제주마 입목 및 문화축제가 한창이다. 천연기념물 제주 조랑말(제주마)을 소재로 한 축제로 27∼28일 이틀간 제주시 봉개동 개오리오름 일대 제주마 방목지에서 열리고 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라'라는 옛말처럼 '말'은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조랑말을 키우며 삶을 이어간 말테우리는 제주 목축문화의 상징이다. 말테우리를 비롯한 제주 목축문화를 두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밭농사에 없어선 안 될 말테우리 조선후기 제주 문인 이한우(1818∼1881)는 제주의 열 가지 빼어난 경관을 정리해 '영주십경'(瀛州十景)이라 일컬었다. 이 중 마지막 제10경이 '고수목마'(古藪牧馬)다. 한라산 중턱이나 너른 초원에서 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모습을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중 하나로 꼽은 것이다. 20세기 초 이를 바탕으로 춘원(春園) 정재민(鄭在民)은 '영주십경도'(瀛洲十景圖)를 그려 병풍으로 만들었다. 그림을 보면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5필의 말과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생각에 잠긴 말테우리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림 우측 상단의 글귀는 '말'(馬)을 '산속의 사슴'(山中鹿)이라 적
한 때 이주 열풍이 뜨거웠던 제주가 인구 감소세로 돌아섰다고 한다. 시들해진 이주 열풍과 청년층 이탈, 고령화, 저조한 출산율 등 팍팍해진 서민들의 삶 탓이다. 과거에도 이 같은 현상이 있었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과도한 수탈 등으로 먹고 살기 어려워 도망치듯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제주 인구가 크게 줄었다. 이때 궁여지책으로 나온 조정의 정책이 '출륙금지령'이었다. 약 200년간 제주를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이 철저히 격리해 놓았던 출륙금지령은 왜 생겨났고,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 "차라리 왜놈에게 죽겠다" 떠나는 제주 사람들 '제주(濟州)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육지의 고을에 옮겨 사는 관계로 세 고을의 군액(軍額)이 감소하자, 비국이 도민(島民)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조선왕조실록 인조 7년 8월 13일) 조선은 인조 7년인 1629년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렸다. 국법으로 관청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제주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아놓은 것이다. 이처럼 강력한 통제정책을 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됐듯이 '제주 백성들이 유리(流離)'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집과
더불어민주당이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지난 제21대에 이어 2연속 압승을 거뒀다.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은 4년 전에 이어 또다시 참패하면서 22대 국회에서도 견고한 '여소야대' 구도가 이어지게 됐다. 개표가 완료된 11일 오전 11시 현재 민주당은 지역구에서 161석,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에서 14석 등 총 175석을 석권했다. 국민의힘은 지역구 90석, 비례정당 국민의미래 18석 등 총 108석에 그쳤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집권 여당이 이같이 큰 격차로 야당에 패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대통령 임기를 무려 3년여 남기고 치른 중간평가 성격의 총선에서 야당의 의석수가 집권 여당을 이만큼 압도한 것도 사상 처음이다. 이 같은 이례적인 결과는 야권이 내세운 '윤석열 정부 심판론'이 선거일에 임박해 잇따라 나온 정부발 악재들과 맞물려 유권자들에게 잘 먹혀든 결과로 풀이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치른 2년 전 지방선거에서는 국민의힘이 압승을 거뒀지만, 이로부터 2년 만에 치러진 총선에선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국민의힘은 대통령 탄핵·개헌 저지선(100명)만 가까스로 지켜냈을 뿐, 조국혁신당(12석) 등을 포함한 범야권 의석이
더불어민주당이 10일 치러진 22대 총선에서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4년 전에 이은 '압승'이다.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은 총선 3연패를 당했다.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쳐도 4년 전과 비슷한 규모의 '참패'다. 개표율이 약 98%를 기록한 11일 오전 5시 현재 민주당은 서울 강남권과 경기 동부권을 제외한 수도권 대부분 지역을 석권했다. 총선 승패를 좌우하는 수도권에서 민주당은 서울 48곳 중 37곳, 경기 60곳 중 53곳, 인천 14곳 중 12곳을 확보했다. 수도권 전체 122석 중 102석을 싹쓸이한 것이다. 특히 민주당은 수도권 최대 승부처로 꼽힌 서울 '한강벨트'에서 중성동갑·을, 영등포갑·을, 광진갑·을, 강동갑·을, 마포을, 동작갑 등 격전지를 가져왔다. 여기에 '텃밭'인 호남(광주 8석, 전남 10석, 전북 10석)과 제주 3석을 모두 차지하고, '중원'인 충청권에서도 28석 중 21석(대전 7석, 세종 1석, 충남 8석, 충북 5석)을 확보했다. 영남·강원권을 제외한 모든 시도에서 보인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민주당은 지역구 의석으로만 단독 과반인 161석을 확보했다. 지난 총선(지역구 163석)과 비슷한 규모다. 국민의힘 수도권 의석
70여년 전 해방정국 혼란기 속에 발생한 참극 '제주4·3'. 4·3의 비극성은 치열한 이념 격돌의 한가운데 수많은 무고한 제주도민이 희생됐다는 데 있다. 하지만 제주도민은 국가 권력에 의한 무자비한 희생의 아픔을 딛고 각고의 노력 끝에 진실 규명을 이뤄내고, 화해·상생의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공적인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사례로 평가받는 제주4·3은 또 하나의 도전을 앞두고 있다. '진실·화해·상생'의 가치를 담은 4·3기록물의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다. 서슬 퍼런 국가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분투한 사람들의 노력, 그들에 의해 수집·채록한 4·3기록물이 우리나라 현대사 속에 갖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 4·3 억압된 침묵의 기록 제주4·3은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이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單選單政,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했다. 이후 무장대와 군·경을 비롯한 토벌대는 서로를 각각 '통일 반대 세력',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수사를 받아온 이종섭 주호주대사가 29일 사의를 표명했다.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지 25일만, '수사 회피' 논란 속에 부임 후 지난 21일 방산 협력 주요 공관장회의 참석차 다시 귀국한 지 8일 만이다. 이 대사를 대리하는 김재훈 변호사는 이날 기자들에게 공지를 보내 "이 대사가 오늘 외교부 장관에 사의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이 대사는 "저는 그동안 공수처에 빨리 조사해 달라고 계속 요구해왔으나 공수처는 아직도 수사기일을 잡지 않고 있다"면서 "저는 방산 협력 주요 공관장 회의가 끝나도 서울에 남아 모든 절차에 끝까지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김 변호사가 전했다. 이 대사는 "그러기 위해 오늘 외교부 장관께 주호주 대사직을 면해주시기를 바란다는 사의를 표명하고 꼭 수리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 대사는 국방부 장관이었던 지난해 해병대 수사단이 경찰에 이첩한 채상병 사건 관련 기록을 회수하도록 지시하는 등 직권을 남용한 혐의로 지난해 9월 더불어민주당 등에 의해 고발됐다. 공수처는 이 대사를 피의자로 입건하고 지난해 12월 출국금지 조치했으나 지난
마을 전체가 문화재이자 관광지로서 600년 전통을 이어온 성읍민속마을이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문화재 보호와 마을 정비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혈세만 낭비했을 뿐 성과가 없다는 비판이 주민과 학계에서 쏟아져 나온다. 600년 전통이 천 년 이상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성읍민속마을의 과제는 무엇일까. ◇ 600년간 명맥 이어온 민속마을 조선시대 제주의 모습을 그린 기록 화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정의조점', '정의양로', '정의강사'는 옛 제주현성에서 거행된 행사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정의조점은 이형상 목사가 정의현을 둘러보며 군사시설을 비롯한 각종 제반 사항을 점검하는 모습을, 정의양로는 정의현성에서 치러진 노인잔치 광경을, 정의강사는 동짓날 정의현에 머물며 시행한 강사(講射), 즉 글 외우기 시험과 활쏘기 시험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에는 동문·서문·남문과 함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정의현성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당시 성안에 수많은 민가가 밀집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의현감이 집무하는 현아(縣衙), 교육시설인 향교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성 밖에도 민가가 형성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천천미(靈泉川尾)라고 표기한 하천(지
제주 사람 중에도 제주의 전통주라고 하면 '오메기술', '고소리술', '쉰다리'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제주도무형문화재 3호 오메기술과 11호 고소리술은 좁쌀을 주원료로 한 술이다. 쉰다리는 쌀밥이나 보리밥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도수가 낮은 술이다.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강술', '오합주', '모주'도 거론된다. 강술은 오메기떡과 누룩을 반죽해 발효한 걸쭉한 상태의 술이고, 오합주는 좁쌀을 원료로 한 청주와 꿀, 참기름, 계란, 생강 등 다섯 가지를 섞어 만든 술이다. 모주는 조선 광해군 시절 제주에 유배된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의 시녀가 노씨를 봉양하기 위해 만들어 팔았다는 탁배기 같은 낮은 도수의 술이다. 일상적으로 언급되는 제주의 전통주는 이들 6가지 정도였다. 그런데 현재 제주에서 생산되는 전통주는 수십 가지에 이른다. 제주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전통주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가 정부가 주류의 제조와 유통 및 판매 활동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술이 생산, 유통되기 시작했다. 2010년 '전통주 등의 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전국 각지의 전통주 산업은 활기를 띠었다. 10일 제주도
제주 성읍민속마을은 조선시대 약 500년간 정의현청이 있던 정의현성의 중심마을이다. 과거 제주의 행정구역인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하나다. 성읍민속마을은 제주 전통 초가 등 제주의 옛 모습과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지난 1984년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이후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주민들이 초가집에 거주하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지만, 보전과 정주여건 개선이라는 오랜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전통문화 원형 보전이라는 가치와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겪는 불편이 오랜 기간 쌓이고 쌓여 문화재이자 관광지로서의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난 2차례 연재에 이어 살펴본다. ◇ 문화재 보전, 정주여건 개선 놓고 갈등 지난 2월 23일 오후 찾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1리 제주성읍마을의 한 초가집. 10평(33.05㎡)이 조금 넘는 작은 초가에 90세 넘은 할머니가 홀로 생활하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상방(마루)엔 각종 살림도구가 가득해 손님이 오더라도 함께 앉을 만한 공간이 여의찮아 할머니는 구들방에서 동네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