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수도사와 그의 제자 아드소는 마치 피라미드 깊숙이 봉인해 놓은 파라오의 미라 도굴범 일당처럼 램프를 치켜들고 수도원 장서각의 ‘비밀의 방’을 찾아내려간다. 그 ‘비밀의 방’을 ‘아프리카의 끝(Finis Africae)’이라 명명한 것이 흥미롭다. 아마 14세기 유럽인에게 아프리카의 끝이란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금단의 땅이었던 모양이다. 장서관 ‘아프리카 방’에 봉인돼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편’이다. 수도원장 호르헤에게는 파라오의 미라처럼 절대로 세상에 나가서는 안 될 책이며, ‘도굴범’ 윌리엄 수도사에게는 반드시 끌고나가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세상에 공개해야 할 책이다. 윌리엄 수도사 개인의 공명심일 수도 있고, 칙칙한 중세유럽에 ‘웃음’을 전파해 사람들 얼굴에 웃음을 돌려줘야 한다는 사명감일 수도 있겠지만, 원작자 움베르토 에코는 윌리엄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아마도 공명심과 사명감이 혼합돼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의 욕망이란 대개 그러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희극편)을 아프리카의 끝 방에 농축우라늄처럼 은폐하고 있는 도서관장 수도사 이름이 ‘호르헤 부르고스(Jorge Burg
베네딕토 교단의 모든 정보가 저장돼 있던 수도원의 장서각은 윌리엄 수도사와 호르헤 수도사가 ‘알 권리’ ‘알지 않을 권리’를 둘러싸고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잿더미로 변한다. 호르헤 수도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편’을 ‘몰라도 되는 정보’ 정도가 아니라 ‘알아서는 안 될 정보’로 분류해 철저히 숨긴다. 반면 윌리엄 수도사는 이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해야 할 정보라고 판단한다 호르헤는 일반인(이하 신자)들은 인식이 미성숙해 ‘희극’을 접하면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반면, 윌리엄은 일반인들이 희극을 본다고 신을 경건하게 여기는 마음을 잃을 정도로 무지몽매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호르헤와 윌리엄의 격돌을 따라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 시민단체들과 정부가 벌이곤 하는 ‘정보공개’ 논란이 오버랩된다. 정보공개법 제정의 근본 논리는 “알지 못하는 국민은 지배받을 뿐이지만, 정보를 가진 국민은 주권을 행사한다”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명제를 제도화한 것이다. 국가권력의 원천인 국민에게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해 줌으로써 실질적인 민주사회를 완성하겠다는 철학이 그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윌리엄 수도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희극편을
영화 ‘장미의 이름’은 14세기 중세유럽 수도원에서 호르헤와 윌리엄이라는 당대 최고의 수도사들이 웃음에 관한 서로 다른 정보(information)와 지식(knowledge)을 놓고 벌이는 비극적인 소동극이다. 영화 속 도서관장인 호르헤 수도사는 ‘웃음’은 사악한 것이라는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간직하고 있다. 호르헤에게 웃음이란 인간들에게 권장할 만한 것이라고 설파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론’은 끔찍한 불온문서일 수밖에 없다. 호르헤는 당연히 「시학」을 ‘이단의 문서’로 분류해 도서관 가장 깊은 방에 봉인해 버린다. 이는 우리가 다름과 낯섦을 대하는 일반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웃음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은 사악하지 않다’는 정보와 지식으로 무장한 프란치스코 교단의 윌리엄 수도사가 마침내 그 「시학」을 봉인해제하기 위해 들이닥친다. 웃음을 사이에 두고 서로가 습득한 정보와 지식이 너무 낯설고 다르다. 호르헤와 윌리엄은 서로가 간직하고 있는 웃음의 정보와 지식을 모두 동원하면서 ‘최후의 담판’을 벌인다. 불행하게도 각자 간직하고 있는 정보와 지식에서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신학계의 거물들은 합의점을 찾을 수 없다. 결국 옥신각신하는
영화 ‘장미의 이름’은 이탈리아 북부의 어느 베네딕토 교단 수도원에서 교황청이 벌이는 아수라장을 보여준다. 이단 재판이 열리고, 엉뚱한 민초들이 ‘악마’로 몰려 화형당하고 그사이에 중세 지식의 요람인 수도원 장서각은 불탄다. 하지만 아수라장을 설계하고 총감독한 ‘최종 빌런’은 영화 속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사건을 쥐락펴락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196대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ㆍ1225~1334년ㆍ재위 1316~1334년)다. 영화 속에 험악한 모습의 악역으로 등장하는 호르헤(Jorge) 수도사나 이단심판관 베르나르도 귀도(Bernardo Guido) 모두 요한 22세가 흔드는 실에 매달려 있는 꼭두각시들일 뿐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372년, 프란치스코 수도회 내 급진파(Spiritualsㆍ영성파)들은 ‘예수와 사도使徒들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으로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앞세워 당시 교황청의 사치와 부패를 공격한다. 이들은 교회의 부와 권력을 비판하며 극단적인 무소유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의 주장과 요구대로라면 교황청은 당장 문 닫아야 할 궁지에 몰린다. 이 위기 상황에서 교회가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저서 「장미의 이름」의 시대적 배경으로 못 박은 시점은 1372년 11월이다. 이 시점으로부터 약 36년 전, 참혹했던 십자군 전쟁(1095~1291년)이 십자군 최후의 보루였던 이스라엘 항구도시 아크레(Acre)가 마침내 함락되면서 사실상 교황청의 패배로 끝난 상태였다. 십자군 광풍이 남긴 것은 교황청 권위를 향한 의문과 쇠퇴였으며, 교황의 절대 권위와 부패에 항거하는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의 잉태였다. 「장미의 이름」을 모티브로 삼은 이 영화의 배경 역시 11월 이탈리아 북부 수도원을 짓누르는 음산한 기운만큼이나 을씨년스럽고 불온한 시대였다. 기존의 규범과 가치관은 붕괴했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자리 잡지 못한 도덕적 공백과 혼란을 의미하는 ‘아노미(Anomie)’야말로 14세기 교회가 처한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 난세가 되면 항상 자신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흔드는 온갖 세력이 등장한다. 14세기 교회는 교리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라 불릴 만큼 수많은 교단이 난립했지만 사실상 ‘빅4’라 불릴 만했던 4개의 교단이 사상적으로 ‘보수’와 ‘진보’ 진영 싸움을 벌였다. 수도원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베네딕토 교단(
영화에 등장하는 호르헤 수도사(표도르 샬라핀 주니어 분)는 분명 주연은 아닌데 그의 모습은 주인공인 윌리엄 수도사(숀 코너리 분)보다 더욱 강렬하다. ‘신 스틸러’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화면을 씹어 먹는다. 호르헤는 수도원의 자랑인 장서관을 관장하는 수도사다. 요즘으로 치자면 도서관장쯤 되겠다. 호르헤는 용모부터 기괴하다. 족히 80세는 넘어 보이는 노인인데, 시력까지 잃었다. 그런데도 이 노老수도사는 눈동자 없는 ‘눈’을 부릅뜨고 산다. 시력이 없다는 것이 장애와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한 능력이라고 과시하는 듯한 느낌이다. 눈동자 없는 눈빛이 그토록 형형熒熒하고 사람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호르헤 수도사의 허옇게 부릅뜬 커다란 눈은 문득 미국 1달러 지폐 뒷면에 그려진 미완성의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빛을 내뿜는 강렬한 눈을 떠올리게 한다. 그 눈은 ‘신의 섭리(Divine Providence)’를 상징한다고 한다. 눈 위쪽에는 라틴어 “ANNUIT COEPTIS”라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다. 직역하면 ‘신과 함께’인데, 대개 ‘우리가 하는 일(건국)은 신이 승인하신 일이다’란 의미가 깔려 있는 듯하다. 조금 비딱한 시선으로 보면 ‘미국이 무슨 짓을
영화가 진행되면서 수도원 연쇄살인 사건의 ‘범행동기’는 어이없게도 ‘웃음’이었다는 것이 서서히 밝혀진다. 수도원의 장서관藏書館을 관리하는 호르헤 수도사는 장서관 가장 깊은 곳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희극편)에 독을 발라 봉인해 놓고, 이 문헌을 읽은 자들은 모두 죽게 만든다.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며 읽으면 독극물에 노출되는 기발한 살인방법이다. 수사망을 좁혀가던 윌리엄은 마침내 호르헤 도서관장이 만들어놓은 미로를 헤치고 「시학」이 봉인돼 있는 장서관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한다. 그곳에는 이미 호르헤가 마지막 관문처럼 버티고 있다. 호르헤는 문제의 「시학」 제2권을 죽어도 못 내놓겠다는 듯 품에 부둥켜안고 있다. 여기에서 윌리엄과 호르헤의 웃음을 둘러싼 황당한 논쟁이 벌어진다. 웃음이란 의도적인 ‘비웃음’이나 썰렁개그를 시전하는 부장님 앞에서 가차 없는 리액션으로 날려주는 폭발적인 웃음을 제외한다면 지극히 본능적이고 비이성적인 인간의 반응이다. 윌리엄과 호르헤는 그 비이성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반응을 놓고 치열하게 ‘이성적’인 논쟁을 벌인다. 이성으로 재단할 수 없는 문제를 이성으로 재단하려 든다. 호르헤는 웃음이라는 것을 금지하고 싶고, 윌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가장 참담한 장면은 지적ㆍ신체적 장애를 동반한 민초 살바토레와 몸 파는 이름 없는 소녀, 그리고 수도사 한 명이 ‘이단 재판’에 회부돼 나란히 화형대 틀에 매달려 불타는 장면이다. 윌리엄 수사(숀 코너리 분)가 ‘연쇄살인 사건’을 파헤치고 있던 이 수도원에 느닷없이 교황청에서 파견한 주교와 도미니코(Dominicus) 교단의 이단 심판관 베르나르도 귀도(Bernardo Guyㆍ머레이 에이브럼 분)가 들이닥친다. 도미니코 교단은 이교도들을 개종하기 위해 투철한 교리로 무장한 교단이었는데, 나중에는 이단 심판으로 특화해 버려서 ‘주님(Domini)의 개(Canes)’라고 조롱과 원망의 대상이 됐던 교단이기도 하다. 베르나르도 귀도는 42명을 화형에 처했던 것으로 기록되는 역사상 가장 악명을 떨쳤던 이단 심판관이다. 베르나르도 귀도 정도의 ‘헤비급’ 이단 심판관이 직접 나서는 사건에는 항상 중세교회의 권력투쟁과 교파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제의 수도원은 베네딕토(Benedictus) 교단 소속으로 ‘엄격한 질서와 규율,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모든 문헌의 보존’을 사명으로 한다. 따라서 중세 최대의 장서관藏書館을 보유하고 있다.
수도사들의 연쇄적인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문제의 수도원에 도착한 윌리엄 수사修士(숀 코너리 분)는 ‘연쇄 살인사건’보다 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윌리엄이 막 수도원 근처에 다다랐을 때, 피골이 상접하고 남루한 차림의 수많은 주민이 산 위에 자리 잡은 거대한 수도원 아래에 모여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수도원 담장 한편에 뚫어놓은 쓰레기 배출구가 열리고, 음식 쓰레기가 산 아래로 쏟아져 내린다. 거지꼴을 한 주민들은 수도원 음식 쓰레기를 성령이라도 강림하는 것처럼 두 팔 벌려 영접하며 썩은 배추잎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인다. 윌리엄 수사는 혼란스러워진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왜 저렇게 거지가 됐을까. 주민들이 저토록 굶주릴 때 교회는 왜 저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일까.” 참상의 전모는 곧 밝혀진다. 수도원에서의 첫날을 보내고 아침에 수도원 뜰에 내려간 윌리엄 수사는 주민들이 왜 그토록 굶주려서 수도원 쓰레기나 먹으며 연명하고 있는지 알아차린다. 수도원 앞마당에 기다란 테이블이 놓이고 그 행색만으로 보면 분명 수도원의 구호품을 받으러 온 거지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행색의 사람들이 테이블 앞에 줄지어 서 있다.
영화 ‘장미의 이름’은 ‘광적인 믿음의 질서’에 대항하는 ‘합리적 실증주의’의 도전을 담아낸다. 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의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당연히 모두가 공포에 질린다. 믿음에 충실한 수도원 수도사들은 성경 요한묵시록이 예언한 종말이 다가왔다며 패닉 상태에 빠진다. 교황청은 이 두려움을 잠재워야만 한다. 교황청은 ‘바커스빌의 윌리엄(William of Bakersville)’이라는 이름의 수사修士를 ‘특별수사관’으로 임명해 문제의 수도원으로 파견한다. 윌리엄 수사는 교황청에서도 인정하는 최고의 ‘합리적인 추론’을 하는 인재다. 가끔은 성경도 합리적으로 해석해서 이단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던 인물이지만 상황이 워낙 급박하다보니 교황청에서도 교회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명석함’을 우선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원작자 움베르토 에코의 ‘작명 유희’가 흥미롭다. ‘바커스빌’이라는 이름은 명탐정 셜록 홈스를 탄생시킨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의 탐정소설 「바커스빌의 개(The Hound of Bakersvilles)」에서 따오고 윌리엄이라는 이름은 13세기(영화의 배경과 동시대) 유럽에서 가장 유명했던 실증주의자 ‘윌리엄 오캄(William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