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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부모인문학(5) ... 자유

4. 자유

 

‘자유롭다는 말은 번번이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돌이킬 수 없는 것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뜻이다.’(키에르케고르)

 

이집트 전설에 나온다는 이야기 하나.

 

만물을 관장하려니 신은 너무 신경 쓸 게 많았나보다. 해서 ‘결정하는 힘’의 비서를 두기로 했다. 비서를 구해야했다. 가까이에 있는 천사에게 맡기려하니 이대로가 좋다며 천사는 거절했다. 다시 듬직한 큰 바위에게 맡기려하니 자연에 순응하고 살겠다며 역시 고개를 저었다. 모두 거절하자 신은 가장 별 볼일 없게 생긴 인간에게 물었다.

“결정하는 힘을 네게 주려한다. 하겠느냐? 일단 하게 되면 되 물릴 수는 없다. 너의 첫 결정은 이를 수락하느냐 마느냐, 이다. 강요하지 않겠다.”

호기심 많고 늘 상상과 공상 속에서 살던 인간은 신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한편 인간은 단순해서 ‘결정의 힘’이 단지 권한만 주어지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결정하는 순간 책임도 따른다는 사실을 훗날 알게 되었다.

 

결정할 수 있는 힘은 엄청나서 세계를 지배하는 힘으로도 커졌지만 한편 실수나 실패도 생기면서 위험이나 시련을 겪기도 한다. 결정은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에서 시작된다는 의미를 시사하는 전설이기에 옛날 옛적의 이야기로만 듣고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

적든 크든 지금 당장이라도 우린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고 이래서 고민하며 가슴을 애태우는 바, 위험하더라도 결정은 용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중대하고 더욱 소중한 결정일수록 위험이 따르는 용기가 필요할진대, 반대로 위험부담이 적은 결정은 안일무사로서 결코 용기로 취급되지 못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결정에 우리는 얼마나 책임을 지고 사는가, 자문하게 된다. 결정하되 책임은 회피 또는 기피하는 쪽을 선택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권리나 권한만 있고 책임이나 의무는 없는 오늘의 자기욕심만 들끓는 세상이 떠오른다. 다시 버나드 쇼가 들려주는 재치 있는 말을 새겨본다.

 

‘세상이 나를 버리고 있다고 불평하며 자기중심적인 마음으로 한을 품지 말고, 나 자신이 지닌 나만의, 나 그대로의 나다운 힘을 발휘해야 한다.’

 

러셀도 비슷한 말을 들려준다.

 

‘자기중심으로 반복해서 살아온 사람은 소소한 마찰에도 당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일지라도 나의 경험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나 하나의 힘

 

가족 서로 간의 신뢰는 나 자신의 일에 몰두하게 하는 힘까지 덤으로 선물을 받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는 엄마는 유치원에서의 생활도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달라지고 있는 자신을 보며 뒤돌아보게 된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꼬마 아이들과 처음 만났을 때의 순수한 열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실의로 바뀌면서 사그라졌다.

‘나 혼자의 힘으로 뭘 어쩌겠다고...’

현실타협은 자조가 되고 자기무력감에 빠져들게도 하지만 시간이 깊어지면 질수록 타성이 붙고 무력감은 무딘감의 요령으로 변하면서 편리·편의로 대체되며 처음의 열정은 차츰 해소·소멸되고 만다. 유치원교사로서의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은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고, 전문적 직업은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직장이라는 장소로 바뀌었고 자리에 안주하니 마음도 몸도 다 편했다. 유치원교사보다도 어느 유치원이라는 규모의 소속감에 명함을 내밀었고 딸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린 제자들의 진로는 우등과 열등으로 가름하며 평가하여 결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후회하고 반성하더라도 이러한 타성은 자유에 감싸인 속박이기에 언젠가는 헛자유를 자극하는 계기로 발전할 수도 있다. 자극을 통한 계기 또는 동기는 자각을 동반함으로서 타성을 깨거나 벗어날 수가 있게 한다. 눈을 뜨고 있는 한.

 

‘나는 눈을 뜨고 살아간다,’(피히테)

 

양심이 없다면 인간일 수 없다. 단지 알면서도 불편한 양심에 눈을 꾹 감을 뿐이다. 우리가 눈을 뜨고 살아가는 일은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사는 것과 같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인간은 좀 더 온전해질 수가 있다. 하지만 양심은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 생겨나는 일보다는 타인에 의해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세계의 이유이며 당위이기도 하다. 타인에게서 받은 자극은 나의 힘으로 발현된다. 나 하나의 힘이 의미 있게 존재하는 것도 타인에 의해서다.

 

찾아뵙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유치원을 졸업한지 7년이나 됐다는 중학교 남학생의 엄마로부터다. 제자의 이름만으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전화 속의 목소리는 매우 다급해보였다. 전화를 끊고 졸업앨범을 뒤져 사진을 보고나서야 기억이 되살아났다. 꽤 똑똑해서 유치원 외에 영재교육도 받았던, 무척 내성적이었고 착실하기도 했던 학생이었다. 그의 엄마도 생각이 났다. 얌전했지만 아들에게 쏟는 열정은 여느 부모와 달랐다. 유별났지만 결코 모나지 않아 교사들 사이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던 여자였다.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는 이래서 더 의외였고 전화상으로도 불안이 전해져 왔다. 만나자 그녀는 아들의 친구 연락처를 알고 싶어 했다. 유치원 때부터 줄곧 같은 학교로 진학해 아들과 가장 가까워진 친구라고 했다. 역시 지난 사진을 보고서야 그 아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지나치게 조용해서 더 기억나는 학생이었고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등하교 때면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대신해 데리고 다니던 기억도 생생하다.

 

하루 걸러 두 학생은 등교를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먼저 아들이, 다음 날 그의 친구가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물론 집에도 오지 않았고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아들은 여전히 공부 잘 하지요?”

 

학부모와의 의례적인 대화로 7년만의 해후는 시작되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요조한 분위기를 잃지 않은 여자는 단지 서두르는 느낌만 덧씌워져 있었다. 불안감이었다.

 

‘그 자신에 의해 생긴 불안은 깊을수록 더 인간적이다.’(키에르케고르)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은 완벽한 그녀에게서 찾아낸 흠이라 할까. 남의 흠에서 인간미가 보인다.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와 비슷하다는 동질의식에서 나오는 친근감의 표현이며, 너도 같다며 차별의식을 거부하는 평등감의 다른 표현이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참으로 인간다워서 아름답다.

 

아들의 가출 전 행동은 더욱 그랬다. 국어시간이었다고 한다. 교장이 교실로 불쑥 들어와 수업을 진행했다.

 

 

“꿈을 말해봐라.”

 

뜬금없기도 했지만 꿈을 어찌 밖으로 드러내놓고 얘기해야 할지 몰라 학생들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꿈은 간직하고 있어 더 아름다운 것으로 알고 있는 학생들은 그 꿈을 밖으로 드러내려니 선뜻 나서지 못하며 주저하고 있었다. 교장은 다그쳤다.

 

“너흰 꿈도 없단 말이냐!”

 

반장이던 모범생 아들은 그 상황에서 먼저 대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CEO가 되는 것입니다.”

 

대답하자,

 

“구체적으로!”

 

교장은 더 대답을 요구했고,
“내 사업을 하기 전에 대기업의 CEO가 되는 겁니다.”

 

교장은 막연하다며, “그러려면, 당장 어떻게 해야지?” 또 물었다. 상황을 판단한 똑똑이 아들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들어갈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공부 열심히 해서 특목고로 진학해야 합니다. 이게 제 꿈입니다.”

교장이 그제야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에게도 다시 물었다. 교장의 입맛에 맞춰 꿈의 모범답안을 낸 모범생 아들의 대답으로 학생들은, ‘어떻게 그게 꿈이냐?’ 며 입을 더 꼭 다물고 있었다. 교장은 들고 있던 회초리로 흑판을 치며 또 다그쳤다. 끝내 대답이 없자, 앞자리부터 한 명씩 대답하도록 강요했다. 키가 반에서 가장 작은 아들의 오랜 친구가 일어섰다. 고개를 떨구고,

 

“꿈이 없는데요.”

 

교장은 발끈하며 친구에게로 달려들어 뺨을 후려갈겼다. 하며 하는 말,

 

“교장인 나한테 지금 대드는 거야? 되먹지 못한 놈. 꿈을 얘기하랬더니 꿈이 없다고? 그게 대답이야? 대꾸지?”

 

친구의 뺨싸대기소리는 두 차례 더 들려왔다. 친구는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우물우물 꿈을 얘기하고 만다.

 

“부모님을 찾는 겁니다.”

 

이내 교장은 국어선생을 부르더니 교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인간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사악함은 없다.’(루소)

 

선생이 없는 교실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니 한 마디로 내 차례까지 오지 않았다”며 오늘의 영웅으로 칭송을 잠시 받던 친구는 곧 놀림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니 부모, 내가 찾아주면 내가 니 꿈 이루게 해준 거가 되네.”

 

20여 분이 지나도 국어선생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수라장으로 떠들썩해진 교실을 반장이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앞으로 나가자,

“회장님, 저희에게 무얼 팔아가지고 오라 하실 건지요? 말씀만 하십시오, 회장님 우리 회장님!”

교실은 또 한바탕 요지경 속이 되고 말았다. 한참 후 돌아온 국어선생은 교장이 들어오기 전 흑판에 써놓았던 시를 다시 읽어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수업을 진행했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신의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 뜨근뜨근한
아랫목을 만들던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로 찰 수 있는가

선생은 다 읽어준 뒤 시의 주제와 구성 등을 설명하며 학생들에게 등을 돌린 채 시를 지우개로 쓸어버리고 있었다. 반장인 아들이 일어나 선생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선생님께 묻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왜 선생님께서는 우리 앞에서 백묵만 들고 침묵만 하고 계신 건가요? 방금 읽어주신 연탄재는 또 무엇이고 주제는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가요? 연탄재 따위는 운운하면서 연탄재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는 우리는 그럼 뭔가요? 왜 우리와 같은 어리고 약한 학생들을 맘대로 함부로 차는 건가요? 누가 우리를 함부로 찰 수 있나요?”

그리고 아들은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고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

 

도전과 응전

 

‘안전지대에서 빠져나와라. 무엇이든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 할 때 서툴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며, 이로써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트레이시)

 

그 후 반에 남은 학생들은 교장실로 찾아가 항의했고 학교는 이 상황을 감추고 묻으려 전체 학생들을 강당에 모아두고(핸드폰과 스마트폰을 빼앗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선생들의 변명은 너무나 당당해서 기합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더욱이 교장은 보이지 않았고 선생들이 나섰다. 시를 써놓고 연탄재를 차지 말라고 하던 국어선생은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다음 날 친구도 등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에 연락하지 않을 우리 애는 아닌데.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요. 집을 하루도 떠난 적이 없는 애거든요.”

친구의 연락처로도, 친구의 집을 찾아가도 두 아이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일주일째.

 

‘통합은 결합이 아니며, 결합은 둘로 남으면서도 합일하는 것이다.’(베글르리)

 

세상이 분열되고 대립하고 있다 하여 통합 얘기가 많이 나온다. 모든 용어를 다 써 댔는지 철학용어일 통섭에 과학용어인 융합까지 들먹거린다. 그러나 이런 말 따위는 말장난, 단어놀이일 뿐이다. 결합은 둘이면서도 하나로 합일하는 것이라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어려운 단어인 통섭이나 융합보다도 쉬운 단어인 결합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서 둘이라면 각각의 개성과 특질을 의미한다. 개성이 따로 발현되면서도 이것이 모여 더 큰 개성의 하나로 만들어가는 일이다. 그런데 현실세계는 단어 따위의 장난만 일삼으려고 든다.

 

우리는 유난히 표어에 의해 억압을 받아왔으면서도 이를 버리지 못하고 표어 남발시대에 표어불감증에 빠져있다. 그러나 여전히 거리의 현수막이나 확성기, 방송·신문에서는 이러한 구호외치기는 더하면 더 했지 결코 줄어들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다. 군사문화의 잔재라면서 이미 벗어난 군사독재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아놓고 우리를 군독재 때와 다를 바 없이 우리를 스스로 옭아매고 있다. 개인인 내가, 그리고 가정이 이에 휩쓸리거나 동조한다면 ‘나’와 ‘나의 개성’ 그리고 ‘우리 가정’의 본질과 개성을 스스로 죽이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인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벗어나서 살아갈 뿐이다.’고 250년 전에 이미 루소가 갈파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쓸데없이 남아도는 것은 없다’라는 볼테르의 말에 더 솔깃해할 필요가 있다. 어느 것 하나도 존재하는 의미가 있기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하찮은 것은 없다는 말, 루소 역시 반어적으로 표현했을 뿐 자기를 벗어던진 사회성을 지적하며 비판하려 했을 것이다.

전혀 다른 성향의 중학교 2학년인 두 학생은 급기야 행동으로 결합하며 항거한다. 외부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되었지만,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다’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주문의 실천이기도 하다. 교장과 선생, 그리고 가정이 그들을 불안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들을 어떤 동기든 계기로든 그 자신 스스로 벗어나고자 했다면 이것은 자유가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사실이 있을까.’(헨리 소로)

 

열다섯 살의 두 학생도 삶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기성의 틀은 이를 일시적 반발심 또는 젊은 객기, 심하게 표현해서 무례라고도 하며 이들의 행위를 꾸짖고 무시하며 그들 방식에 맞춰 따라오라고 가르치려고만 든다. 무식하고 무지하고 무례한 쪽은 오히려 어른인 선생과 교장이었다. 기성의 틀은 껍데기 형식만을 내세울 뿐, 그 안의 내용인 개별성(개성)을 굳이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기성은 기성화함으로서 후세를 안정으로 이끈다고 현혹한다. 이것은 퇴보다. 동물은 진화하지만 인간은 진보한다. 진보를 가로막는 과거답보는 퇴보와 다름없다.

두 친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며칠 뒤 드러났고 모범생 아들은 엄마에게 전화함으로서 발화된 사태를 진화시켰다. 가짜 모범생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틀 속 모범에의 안주를 멈추고 새로운 모범으로의 도전을 시작하기로 한다. 저항하는 응전으로 진짜 모범생이 되기로 한다.

“학교에 가지 않을래요. 대신 검정고시를 준비하겠습니다. 검정고시를 보더라도 엄마의 소망에는 부응할 거예요.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이기도 하니까요.”

 

청출어람

 

‘파랑은 쪽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순자)

 

이것이 진보다. 순자는 세상의 진보를 희망했다. ‘비록 자질은 좀 떨어지더라도 한 개인의 힘으로 하늘의 뜻도 극복할 수 있다. 인간이 용기와 신념을 갖고 열심히 집중한다면 무슨 일이라도 이룰 수 있다.’고도 했다. 자유롭기에 가능하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가능하며, 더불어 그 결정에 책임질 줄 아는 것도 인간이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 어리다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어리기에 더 희망적이다. 우리의 아이들을 별 잘 나지도 않은 어른의 세계, 기성의 틀 안으로 강제진입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의 자유와 열정을 속박하는 사회는 결코 희망이 있을 수 없다. 아이들을 속박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죽이는 것과 같다.

 

‘자유가 가장 어려운 까닭은 매순간 용기를 요구하기 때문이지만(루소), 용기가 불필요한 열정 없는 세상에서는 그 어떤 위대한 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헤겔)

 

<부모 먼저>

 

‘아빠는 등으로 임신한다.’

네 살 딸을 어린이집에 내려놓고 돌아서는 한 아빠의 등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걷는 그의 등을 보니 걸음이 느려보였다. 그래서 무거워보였다. 네 살 아이는 곧 동생을 갖게 된다. 일에 시간을 더 빼앗기면서도 아빠의 벌이는 늘지 않는다. 아이가 하나 더 느니 우선 경제적인 부담이 아빠의 등을 무겁게 했을 것이고 이래서 발걸음을 더 무겁게 했으리라. 떨어지지 않으려는 딸을 떼어놓고 돌아서려니 조금이라도 더 함께 놀아주지 못해 안쓰러운 아빠는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등이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린다. 한숨일까. 구부릴 땐 등이 더 휘어 보인다.

‘엄마는 배로 임신하고 아빠는 등으로 임신한다.’

서두르는 아빠의 발걸음이 자녀들에게 희망을 잉태하게 하지 않을까. 울던 얼굴이 웃음으로 바뀐다. 아빠가 방금 전 한 말을 기억한다.

‘좀 전에 아빠가 그랬거든. 이따 저녁엔 많이 놀아주겠다고.’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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