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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부모인문학(7) ... 관계

6. 관계

 

‘조용한 사람들은 조용한 집에서 살고, 거지들이 사는 마을은 서 있는 낮은 벽마저 움츠려 보여 위태롭고 흐느끼는 듯하다. 고관대작들의 저택은 크고 웅장해 보일지 몰라도 사람들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높은 담으로 갇혀 사는 느낌을 받는다. 즉 집이란 그 속에 거주하는 사람의 사회적 신분과 그 사람의 성향을 완벽하게 의식하게 하는 것이다.’(하싼화티, 아랍의 건축가)

 

 

아랍에서 집을 ‘사칸(sakan)’이라고 하는데, 평화로움과 성스러움의 뜻을 가진 ‘sakina’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성스럽고 평화스러운 곳이 집인 것이 어디 아랍뿐이랴. 한글 속의 집은 속담에 담겨져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시사한다. ‘집 태우고 바늘 줍는다.’는 속담도 그 하나다. 큰 것을 잃고 난 뒤 작은 것을 아끼려 함을 비유하는 말에서, 소중한 것의 의미로서 집을 새기게 된다. 큰 것이란 단지 재물만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큰 소중함까지 포함할진대, 이 소중함은 무엇일까. 평화로움일 수 있고 사랑일 수 있고 건강일 수 있고 화목일 수 있다. 집은 이 모든 것을 그러안아주는 곳이며 마땅히 그런 곳이어야 한다.

그럭저럭 외양이 거의 다 비슷한 아파트가 주요 집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에서 집의 개념도 흔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집, 가정에서 획일성, 천편일률 즉 다 똑같음, 다 그저 그러함을 보는 것 같아 아쉽고 또 안타깝다. 비교되는 것은 소형·중형·대형이라는 단순한 크기이며, 그것으로 가늠하고 가름하는 삶의 기준이 집의 ‘소중함’이란 가치를 혼란스럽게 한다. 아파트 역시 편리함이란 편의성만을 쫓고 있는 우리의 생활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다행이도 아파트가 다양한 형태로 바뀌면서 단독주택적인 요소를 조금 더 가미하며 친근감과 정감이 깃든 아파트로 변해가고 있는 듯해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사람들이 현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단테)

 

 

우리는 가난했던 시절 먹고 살자는 데에 온 힘을 쏟아 이제 가난이란 단어가 거의 사라질 정도로 풍요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풍족하게 바뀌어도 정신은 넉넉하게 달라진 일 없이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단테의 말에 의하면) 비현대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우리는 머물러 굳어진 채로 얼마나 살아왔는가. 생각해볼 겨를이 이제쯤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는 세상의 모든 중심인 가정에서 더욱 요청되는 시대적 자각이 아닐까. 현대인은 현대적으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서 ‘현대적’이란 아파트 평수만 늘리는 삶이 아니라 머물러 있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이끼가 낀다는 흐르지 않는 물이어서야 되겠는가. 아인슈타인의 말이 떠오른다.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이나 두려움을 잊은 채 계속되는 욕구에 붙잡혀 있는 한, 우리는 지속적인 행복이나 평화를 얻을 수 없다.’(쇼펜하우어)

 

디드로 딜레마

 

고급 구두가 하나 생겼다. 이 구두에 어울려야 할 양말을 사야했다. 비싼 것, 그리고 옷도 비싼 것으로 구입해야 했던 경험이 한번쯤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디드로는 친구인 볼테르나 루소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정도로 지독히 가난했다. 한 친구로부터 매우 값비싼 침실 가운을 선물 받았다. 이 가운을 입을 때마다 디드로는 자기가 더 초라해 보이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운 가운이 다른 것들을 더 추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래서 책꽂이를 바꾸고 책상을 바꾸고 의자도 바꾸게 된다. 서재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것들로 바꿨지만 기쁘질 않다. 행복하지도 않았다.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서 유래돼 ‘디드로 딜레마’라는 말이 생겨났다. ‘디드로 딜레마’란 바로 우리의 ‘구두 딜레마’로서, 소비가 또 다른 소비를 부추기며 욕망을 채우려들지만 거듭되는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 이것은 외양적인 욕구와 내적인 만족의 괴리로 나타나는, 제한할 수 없는 욕구나 욕망에 가득 찬 우리들을 거울 앞에 세운다.

 

동기

 

딸이 강아지를 키우자고 했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어려서 심하게 아토피를 앓은 적이 있고 아직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알레르기 비염에 시달리곤 하는 딸에겐 강아지는 적합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매일 목욕을 시켜주고 집안 청소도 자기가 맡아서 하겠다며 딸은 부모를 압박해왔다. 게으름을 없앨 수 있으니 좋겠다고 아빠는 딸의 요구에 기울어져 갔지만, 밤새 제 몸을 피가 나도록 긁어대던 딸을 보며 ‘딸의 고통을 내게로 옮겨 달라’고까지 애원하며 울어야 했던 수많은 시간으로 절절했던 과거를 갖고 있는 엄마는 애절한 딸의 요구를 들어줄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매정하게 ‘안 돼’하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라면 강아지를 키울 수 있어.”

 

아파트에서만 살아왔기에 딸은 ‘강아지를 키울 수 없어’의 거절로 들렸다. 딸은 측근이 된 아빠에게 매달렸다.

 

“마당 청소까지도 내가 할 거야.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가서 강아지 키우자, 아빠!”

 

강아지를 키우기 위해서 끝내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옮겼다.

 

‘기회는 가까운 우리 주변에 있다. 단지 찾지 않으려거나 보지 않으려하기에 기회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비슷한 얘기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했다. 기회는 동기가 된다. 또 인연이 된다.

 

불교에서 인연이란, 인과 연으로 결과를 만든 직접적인 원인과, 그 원인과 협동하여 결과를 만드는 간접적인 힘이 되는 연줄로서, 모든 사물은 이 인연에 의해서 생멸한다고 한다. 기회·동기·인연 등등 관계의 용어에서 우연과 필연을 추론해본다. 똑같은 관계라도 우연일 수 있고 필연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는 우연이지만 누구에게는 필연이 된다.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힘은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일 터, 바로 우리가 관계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자기의지밖에 없다. 가족은 최초의 우연이며, 동시에 최종의 필연이기도 하다. 이래서 가장 결속력 있는 인연이면서도 가장 소원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어떤 관계든 모험에 의해서 관계(인연)는 진전되고 진보한다. ‘도전하는 사유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사실의 축적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한 아인슈타인의 도전 역시 모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천재의 삶의 끝이 그랬듯이, 도전하는 사유, 즉 모험이 없었다면 아인슈타인도 폐인이나 망나니로 생을 마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험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 모험이란 바로 모험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모험이 없는 인생은 가치 없는 인생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모험이 있는 삶은 언제나 활력이 넘쳐난다. 긴장이 사라진 삶은 평화로운 삶과는 다르다. 일상적인 우리의 삶은 팽팽한 모험으로 긴장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이것이 평화롭다고 하는 것은 현대의 비극이다.’(밀란 쿤데라)

 

가정의 안정은 모험 없는 평화로 착각하게 하기 쉽다. 안전이 안정을 담보로 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은 안전이란 단어의 안전불감증에서 벗어나 이참에 안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안전이란 무엇인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 그럴까? 집에는 안전을 요구하는 것들이 수없이 많다. 우선 전기와 가스다. 이것들은 모두 엄청난 위험을 안고 있지만 이렇다고 하여 우리가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들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안전은 위험하더라도 필요한 것에 존재하며, 따라서 위험을 안고도(품고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 있는 생활의 필수인 것이다. 전기나 가스가 위험하다고 하여 다른 대체의 것을 사용해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는가. 하지만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어도 일상이기에 우리는 모험이라고 달리 말하진 않는다.

 

 

모험은 이런 것이다. 일상에서 늘 접하고 접해야 하는 것도 모험이다. 저 너머의 것을 쟁취해보려는 대단한 결심의 결과인 행동만이 꼭 모험은 아니다. 모험을 굳이 TV에서나 보여주는, 정말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일로만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뜻에서 이러한 비유를 해봤다.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일은 이벤트적인 타인의 삶일 뿐이다. 물론 이들로 인해 자극이 되고 자각은 되지만, 매우 고상하고 고매하더라도 다큐멘터리 역시 오락물이다. 개연성 있는 드라마요 영화라는 말이다. 타인의 삶을 또 다른 타인이 엮은 필름으로 편집된 것만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벤트적 삶이란 걸러지고 걸러진 극히 일부의 삶으로 그것을 이룬 삶의 전체가 아닌 한 개인의 단막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체의 삶을 일부의 것만 편집한 것에 우리는 모험이라고 말하며 부러워하곤 한다.

 

이러한 이벤트성 모순은 모험의 오류이자 모험의 모순으로 우리를 현혹할 뿐이다. 기적을 바라는 것과 같다. 하지만 어떤 모험도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그것의 축적으로 이루어짐을 새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작은 것이 역시 소중한 것이다. 특별한 예외를 빼고는 그 작은 것은 거의 모두 가정에서 시작되어 다듬어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모험의 시작도 선택인데, 잘못된 안전과 안정은 온전한 선택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선택의 권한까지도 묵살시킨다.

 

‘스스로 완전히 선택해야 한다.’(샤르트르)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여러모로 아직 미숙한 자녀의 선택에 영향을 줌으로써 완전한 선택에의 도우미가 되어주는 것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녀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우리 부모는 진정한 도우미가 되어왔는지, 아님 참견자 또는 구속자 또는 전제독재자는 아니었는지... 아님, 방관자는 아닌지...
대부분, 아니 모든 위인들은 어떤 작은 계기로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위인만이 아니라 범죄자 역시 마찬가지다. 딸은 훗날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당 있는 집이 나를 지금의 동물학자로 만들었다.’

 

우리 아이의 입에서 충분히 나올만한 말이다. 하면, 사유하는 모든 부모는 ‘위인탄생의 잠재도우미’라고 말할 수 있다. 부모가 해준 것이란 단지 집을 이사한 것뿐일지 몰라도 자녀에겐 모험의 삶을 가르치게 한 대단한 변화일 수 있다. 마땅한 이유와 필요가 있던 부모의 이사결정-부모의 사유란 이런 경우이다-은 자녀의 모험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한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결정도 모험이다.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과, 그 원인과 협동하여 결과를 만드는 간접적인 힘이 되어주는 연줄로서의 인연’이 인연에 충실할 때 세상에서 가장 결속된 인연인 가족(가정)을 더욱 아름다운 관계로 인연 맺어줄 것이다.

 

이래서 가족은 모든 관계 중에서도 우연과 필연을 동시에 품는다. 또 이 우연과 필연은 전체적이며 전제적으로 절대 획일화시킬 수 없고 그래서도 절대 안 된다. 각 가족의 인연은 모두가 다 개별적이며 개성적이며 이래서 특별하다. 가정을 전체라는 무리 속에 뒤섞어놓아 그 개별성, 특별성-참된 아름다움-을 지워버리려 해서는 안 된다. 전체에 의해 일부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선택이며 이 또한 부모의 역할 중 하나이다. ‘해주는 것’보다 ‘해주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전체라는 용어는 늘 상대적으로만 쓰여야 한다.’(칸트)

 

<엄마 먼저>

 

먼나들이를 가는 금요일이다. 먼나들이란 가깝지 않은 곳으로 가는 소풍으로 아이들 귀에 맞춰 달리 표현해보니 아이들이 매우 좋아했다. 차를 타고 가고 차창 밖을 내다보고 차에서 내려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선생이 하는 것을 따라 납작한 돌을 집어 던져본다. 허리를 숙이고 팔과 손은 수면 위에 가까이 닿도록 향하게 하고 물 위로 납작자갈을 던지며 물수제비를 떠보려고도 하는 날이다. 논길을 걷고 세 발, 네 발 자전거를 시골집마당에서 타는 신나는 날이다. 먼나들이 때는 점심을 엄마 또는 아빠가 싸줘야 한다. 어린이집의 규칙이다.

 

일주일에 이 날 하루만큼은 부모가 점심 한 끼는 챙겨주고 책임져달라는 것. 무상급식이 오도돼 공짜 좋아하기의 거지근성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 같기에 부모의 역할로써 도시락 싸오기를 해본다. 의무나 책임을 잃어버리게 하는 복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엄마는 유별나다. 유별나다는 것은 남들이 하지 않기에 그리 보이는 것일 게다. 불과 삼십년 전만해도 유별난 행동은 아니었다. 다들 그렇게 살아왔다. 천보자기에 싼 도시락을 아이의 손에 쥐여 보낸다. 직접 수를 놓아 엄마정성이 담긴 보자기다.

 

“단지 이러고 싶어요.”
이 엄마의 말이다.

 

“보자기에 싸서 보내려니 점심 메뉴가 더 신경 쓰여지더라구요.”
선물 받은 침실가운이 서재를 몽땅 바꾼 디드로 딜레마와는 다른 차원의 ‘엄마보자기 소망’이다.
쉬워 보이지만 남들이 쉽게 못하는 것으로도 세상은 유별나다고 한다.

 

“우리 어린이집을 보내고 싶어도 점심도시락을 싸줘야 한다는 것이 부담돼요.”
결국 이 때문에 흔한 급식 나오는 다른 어린이집으로 보내는 부모도 많다.

 

“이 정도도 못하면 어찌 엄마 아빠라고 할 수 있겠느냐?”
원생 모집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 이유라면 아이를 받지 않겠다며 단호한 원장 선생은,
“아이들은 지나고 나면 먼나들이 때가 가장 기억난다고 합니다.”

 

실제로 아이들은 먼나들이 날, 엄마가 도시락 싸주는 날을 무척 고대한다. 그리고 시골집마당과 논길, 징검다리에 풀어놓으면 얼마나 잘 노는지...

 

보자기 엄마는 이런 말도 들려준다.
“다른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이 다칠까봐 방안에만 있게 한다. 밖에 나가도 ‘하나둘셋넷’ 구령에 맞춰 걷게 한다. 마치 군인들 행진 같다. 아이들 얼굴이 굳어져 있는 건 당연하다. 마냥 웃어야할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야하는데...”

 

뒤에 먼나들이 사진들을 보며 부모들은 그곳이 어디냐며 물어 아이들과 먼나들이를 다녀오기도 한다. 부모들이 더 신날 때가 있다.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이렇게 나들이를 하는군요. 그래서 그 날은 집에 와서도 더 신난 표정을 지었구나. 소풍이 그렇듯이 소풍 전 날도 들떠서는 잠을 자려들지 않을 정도니까요. 엄마, 뭐 싸줄 거야? 물으며 김밥 싸는 것도 도와준답니다.”

엄마의 보자기가 유별나다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아이들처럼 소풍 전 날 들뜬 마음을 엄마도 갖게 되기 때문이란다.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자연에서 맘껏한껏 뛰놀게 해야 할 의무가 부모에게 있다. 진짜 건강은 여기 바로 자연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연을 접하게 하는 일은 자연심을 아이들의 가슴에 담아주는 일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그냥 생긴 말이 아니다. 빅토르 위고의 말을 기억해보자. ‘무슨 권리로 새들을 새장에 가두는가? 무슨 권리로 저 노래하는 것들을 작은 숲과 샘과 여명과 구름과 바람으로부터 떼어내는가? 무슨 권리로 저 산 것들의 생명을 훔치는가?’ 어찌 새뿐 만일까?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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