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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부모인문학(16) ... 이타

‘내 입으로 애국이란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백남준)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에게 남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오더란다. 당연히 한국인이라고 대답했을 뿐인데, 그는 애국자, 국위를 선양한 위대한 사람으로 대접 받게 되었다. 애국 운운 않고도 그저 자기 일에 충실하다보니 결국 애국자가 되어있었다는 말이다. 애국이나 봉사·기부를 앞세우는 사람이나 단체들이 먼저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애국과 마찬가지로, 남을 위한다는 일에 남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목적이 선량해 보이지 않는다. 목적을 강조하면 선의에도 불구하고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된다.

 

 

거짓봉사활동

 

우리나라에선 봉사활동이 점수따기의 일환행위로 변질되어 참으로 안타깝다.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교에서도 학점따기 봉사활동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한 신문사에 의해서 봉사활동이 우리나라에 뿌리내리게 되었는데, 순수한 봉사가 아니라 생색내기 또는 유아적 이기주의로 타락하고 말았다. 봉사활동을 사회운동의 기치로 내세운 신문사는 그 행사의 규모를 자랑하기 위해 장관 및 정치인은 물론 연예인, 운동선수 등 소위 유명세를 타고 있는 모든 공인들을 홍보들러리로 동원했다. 이들은 신문에 나올 사진만 찍고 돌아갈 뿐 봉사하러 나온 사람들이 아닌, 제4의 권력이라는 대형 신문사의 요구(압력)에 의해 동원명령에 따른 부역자가 되어줬을 뿐이다. 이렇게 시작한 봉사활동은 학교에도 침투해 도장찍어오기의 형식봉사, 나아가 거짓봉사로 타락하고 말았다. 신문사의 목적이 불순해서다. 사회의 공기라는 한 언론의 불순한 목적이 사회에 더 나쁜 공기로 오염시키고 말았다.

 

“걔 있잖아? 걔 엄마가 와서 봉사 세 시간을 하고 가더라.”

 

공부시간을 봉사에 빼앗기게 할 수 없다 하여 ‘걔 엄마’가 봉사활동을 대신 했다는 말을 학생들이, 그리고 학부모들이 쑥덕거린다. 이를 허용하는 학교 측에서 ‘걔’는 상전이다. 전교 1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짓을 가르치고 거짓행위를 해도 당당한 학교나 선생(교장)은 학생들에게 결코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이러면서 어찌 학생을 선도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학생들이 선생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어찌 요즘 세태라며 운운하는가. ‘위에서 시키는 일이고 신문사의 요구에 우리 같이 힘없는 선생이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선생의 고충이 들려온다. 봉사활동의 의의는 결코 탓할 게 전혀 없다. 하지만 그 목적이나 방법이 봉사의 의미를 변절시키며 봉사정신을 오히려 해치고 있기에 그 봉사는 없느니 만도 못하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봉사였다. 일부 대기업들이 벌이는 문화사업 등이 편법, 탈세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 않은가. 고매한 자선이 생색용의 또 다른 이기로 변질돼서야 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 이러한 이기는 분명 거짓이며 거짓을 사회가 가르치는 꼴이 되고 만다. 거짓이 버젓이 정의로 둔갑하고 있다. 어디 정치뿐인가.

 

올바른 습관

 

‘태양을 보고 달을 생각하며, 과거를 반추해보면서 미래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올바른 습관은 어린 시절부터 기르는 것이 좋다. 인생의 성패는 바로 여기에 달려있다. 일단 한 번 몸에 붙은 습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습관이 일생을 결정한다.’(그라시안)

 

나쁜 습관, 나아가 세상을 비뚤어지게 보는 시각이 기성세계의 상술 또는 홍보전략에 의해 아이들에게 길들여지고 있는 한 예가 봉사활동이다. 어른들도 저렇게 거짓을 당연하듯 해대는데...... 이를 목격한 아이들은 더 비틀어지고 더 삐뚤어질 수밖에 없다. 언론 등 거대 권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 후에라도 이에 동조 또는 자조하기보다는 분명한 잘못임을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깨우쳐줘야 내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이 올바른 습관을 가질 수 있다. 사회탓을 한들 결국은 자기피해로 부메랑 되어 돌아올 뿐이다. 일생을 결정할 나쁜 습관이 어린 나이에 길들여진다 하지 않는가.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이런 일들이 허다하다. 오롯이 자기의 삶을 살게 해야 하거늘 그렇지 못하게 오히려 훼방 놓는 방해공작요인들이 너무나 많다.

 

이기심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타심을 얘기한다. 이타심은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지만 생각이나 행위는 나로부터 나오며 나로 인해 펼쳐진다. 결과적으로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이타심이다. 따라서 이타심은 나나 너, 우리가 더불어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공동체의식이다. 그러나 자기이익에 급급하고 연연한 개인적 행동으로 이타보다는 이기가 횡행하고 있다. 이타정신의 실천인 봉사마저도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전락·타락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공동체의식, 즉 이타정신은 이래서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하다. 이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의 실천으로도 충분하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행위,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행동도 이타정신에 해당된다. 이 역시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다.

 

자주성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한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자주성은 바로 이타로 이어지는바, 이는 남을 헤아림으로 자기자신의 줏대·소신을 세우는 일인데, 바로 어릴 적 습관에서부터 형성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줏대란, 정신의 중심을 잡는 일이며 중심 잡힌 정신에서 자주성이란 행동으로 나타난다. 주변이나 매스컴 등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부모에게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며 자랄까? 오락가락 유행 따라 사는 줏대 없는 삶만 배울 게 분명하다.

 

조화로운 삶

 

‘두뇌는 지각과 행동의 각 분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미세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미세한 부분들이 서로 협조하고 통합하여 자아를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라 할 수 있다.’(루리아)

 

인간사회에서의 미세한 부분은 나이며 가족이다. 사회의 두뇌가 되는 곳이 나이며 가족이다. 나와 나의 가족들이 서로 협조하고 통합하면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 사회의 기적은 나와 나의 가족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얻음으로서 생계를 꾸린다. 하지만 삶은 줌으로서 만들어낸다.’(처칠)

 

생활을 소홀히 할 수 없고 삶을 등한시 할 수도 없다. 생활과 삶, 즉 현실과 이상의 조화는 결국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된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따지는 것은 우매하다. 날기 전, 양쪽의 날개를 두고 오른쪽 날개가 낫냐 왼쪽 날개가 낫냐 묻는 것과 같다. 조화는 균형이다. 몸의 균형감각만큼이나 정신의 그것도 필요하다. 어린 나이 때 주로 키나 몸무게 등 몸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부모가 아이의 정신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일은 삶의 균형, 조화로운 삶을 아이에게 선물하는 일이다. 균형과 조화는 나와 남을 더불어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다. 아이의 양 날개에 나와 남이 얹어져 있어야 한다. 이래야 그 날개로 균형을 잡고 활개를 칠 수가 있다.

 

아이들의 첫 번째 남(타인)은 부모다. 부모로서 처음 남을 알게 되고 남을 이해하게 된다. 자기가 아닌 남을 의식하며 타인의 삶을 부모에게서 가장 먼저 배운다. 따라서 아이와 부모의 관계에 균형을 잡아가는 일은 바로 조화로운 삶을 아이에게 익히게 하는 출발이다. 조화가 중용이란 단어를, 그리고 그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중용을 중간이라는 위치로만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용은 그르침이나 한 곳으로 치우쳐 기울어짐이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바로 균형을 의미한다. 자전거로 이해해보자. 자전거가 한 쪽으로 쏠리면 바로 잡아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몸도 따라 움직여줘야 한다. 가만히 가운데로 몸을 유지하며 달리면 넘어지게 된다. 또 시소로 이해해보자. 서로 다른 몸무게의 사람이 마주앉아 있으면 몸무게가 더 나가는 사람이 덜 나가는 사람 쪽으로 다가가야만 시소는 균형을 이룰 수가 있다. 이러지 않고 시소의 중심에서 같은 거리에 앉아 있다면 시소는 움직이지 않고 무거운 사람 쪽으로 고정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고정을 안정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안정이 아니다. 움직이게 함으로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바로 안정이다.

 

중용은 균형을 위해, 조화롭기 위해, 중심을 잡기 위해 움직여주는 동적인 행위이다. 가만히 있는 것-침묵 포함-을 중용이라고 절대 말할 수 없다. 따라 움직여주는 것이 중용이며 균형이기 때문이다. 중용도 균형도, 조화도 안정도 모두 다 움직임에서 비롯되며 움직임으로서 이뤄진다. 하지만 중용을 가운데 한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는 침묵 같은 비행위로 여기고 있는 사람이 많으며 이렇게 가르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절대 아니다. 중용은 올바른 방향으로의 움직임이며 전환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가운데가 아니라 치우침을 막는 것이다. 그러자면 움직여야만 한다. 따라서 중용은 행동의 철학이다. 조화로운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행동으로 얻을 수 있어야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 살려는 사람이 부쩍 늘고 있다. 이건 조화라기보다는 고립을 자초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장소라는 ‘어디에’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든 ‘어떻게’가 우선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영예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에 대해 평가하기를 원하는지 스스로 물어보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소크라테스)

 

인용한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타심을 함축한 말이 아닌가 싶다.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이타심이 영예로운 길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소크라테스는 독특한 대화법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플라톤만이 그의 제자는 아니다. 배우는 순간 모든 선인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게 우리이며 우리의 아이들이다. 어리다고 하여 우리 아이들을 소크라테스의 제자 반열에서 빼놓을 순 없다. 어린 딸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대화를 연상하게 한다. 엄마가 질문을 던지고 딸이 대답한다는 방법에서부터 그렇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자.

 

엄마; 우리가 타고 있는 이 자동차는 처음에 왜 만들었을까?
딸; 우리 편하라고 만들었겠지.
엄마; 누가 처음 만들었지?
딸; 발명가가!
엄마; 그럼, 발명가가 자기 혼자 편리하게 타고 다니려고 만들었나?
딸; 그럴 수도 있고 남들도 편하라고 만들었을 수도 있고.
엄마; 그렇지? 딸 말이 맞다. 자동차로 인해 발명가 한 사람만 편한 게 아니라 남들도 편해졌겠지?

 

‘나는 아는 게 없다’로 대화를 시작한 소크라테스가 그랬을 것 같은 방법처럼 질문으로 답을 유도했지만, 대화에서 이타, 남을 배려하는 삶과 그 의미를 엄마는 딸에게 은근히 들려주고 있다. 딸은 조금 더 큰 뒤에 이런 질문을 엄마한테 할지도 모른다.

 

딸; 왜 사람들은 운전을 무섭게 하는 걸까?
엄마; 딸이 보기에도 그렇니? 엄마도 그런데. 자기 하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이 저렇게 남을 무섭게 하면서 운전하게 만드나봐!
딸; 서로 편해지라고 자동차를 만든 건데, 그렇지 엄마?

 

딸은 운전하고 있는 아빠에게 다른 운전자를 떠올리며 ‘아빠는 무섭게 운전하지 않지?’ 라고 말하지 않을까. 충분히 예상되는 가족의 대화다. 부모가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대화를 끌어가는 모습에서 부모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라는 소크라테스가 되기도 한다. 자식은 플라톤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산파였던 어머니로부터 산파라는 역할의 대화법을 깨우쳤듯이 아이를 갖는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다. 철학자가 된다.

 

유치원 선생이기도 한 엄마는 유치원에서도 이런 방법의 대화로 꼬마학생들을 생각하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교감

 

‘나는 환자들을 진료실로 끌어내지 않는다. 대신에 내가 그들의 내부로 들어가고자 노력한다.’(올리버 삭스)

 

봉사나 자선이 그렇듯이, 이타심은 타인과의 감정교감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교감은 부정을 긍정으로, 불만을 만족으로 바꿀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만족이란 사람과 불만이란 사람이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만 족; 저 그늘 아래서 좀 쉬었다가 갈까?
불 만; 아까 내가 쉬자고 할 땐 안 쉬더니, 난 더 갈 테야.
만 족; 그땐 출발한지 얼마 안 됐잖아. 자주 쉬면 더 쉬고만 싶어지는 거라서, 이랬다간 오늘 중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서 조금 더 가서 쉬자고 한 건데...
불 만; 다 너하고 싶은 대로군. 넌 쉬어, 난 갈 거야. 오늘 도착해야 한다며? 방금 전에 네 입으로 그랬잖아.
만 족; 그럼 힘들지만 나도 같이 갈게. 함께 와서 떨어져 갈 순 없잖니? 혼자 가면 심심하고 더 힘들어.
불 만; 왜 꼭 나랑 붙어만 다니려 하니? 자립심 좀 가져봐. 넌 자존심도 없냐?
만 족; 니가 좋아서 그러지.
불 만; 난 니가 지긋지긋해졌어.
만 족; 여기 먼저 함께 가자고 한 건 넌데?
불 만; 그땐 그랬지. 하지만 다녀보니 지금은 아냐. 서로 찢어져 각자 갔어야 했어.
만 족; 난 너랑 함께 걸으니 더 좋은 걸? 좋은 걸 어떡해~~ 너무나 좋은 걸~~~
불 만; 노래까지? 너 동성애자냐? 같이 다니다보니 별 비밀 다 알게 되네.
만 족; 그런가? 나도 몰랐는데, 그런 점이 내 속에 잠재해 있을지도 모르지. 어떻든 혼자 이 길을 걸으면 지금쯤 무척이나 외로웠을 거야. 이렇게 얘기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불 만; 이게 얘기냐? 싸우는 거지. 주먹으로 치고 박고 해야만 싸우는 게 아냐. 의견이 달라도 싸움이거든.
만 족; 의견이 다르다고? 난 아닌데. 뭐 이 정도 갖고... 불만이가 정말 힘들었나 보다. 이쯤에서 꼭 쉬어야 할 것 같은데?
(느티나무가 나타났다. 만족이가 짐을 내려놓고 길바닥에 벌렁 눕는다.)
만 족; 누웠는데도 날아갈 것 같다. 어서 누워봐. 땅바닥이 마사지해 주는 것 같아. 땅이 날개 같아.
불 만; 껑까기는. 땅바닥에 손이 붙었냐? 동전 넣었나보지? 땅이 자동마사지기계냐? 너 참, 사람 웃길 줄도 아는구나? 엄청 뻥도 쌔요.
만 족; 못 봤니? 눕기 전에 내가 오백 원 동전 두 개나 넣었는데. 네 것 하나 내 것 하나!
(불만이도 따라 앉았지만 눕지는 않는다.)
만 족; 왜 안 누워? 허리가 정말 시원하다니깐. 오백 원 아깝잖아.
불 만; 너나 마사지 잘 받아. 난 물이나 마시고 곧 떠날란다. 지금 몇 시야? 벌써? 안 되겠다. 넌 쉬었다가 와. 난 먼저 출발해야겠어!
(이내 일어나는 불만이. 만족이도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난다. 둘은 말없이 걷기만 한다. 만족이가 말을 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만 족; 오늘 다 걸으면 얼마나 되는 거리를 우리가 걷게 되는 거지?
불 만; 힘들어. 걷기나 해. 도착만하면 되는 거지 거리는 왜 따져, 더 힘들게. 넌 힘도 안 드냐? 말하면서 걸으면 운동소모량이 몇 배나 더 소비된다는 것쯤, 상식이잖아? 이젠 말 시키지 마. 이러다가 오늘 중에 닿기나 할지 모르겠다.
만 족; 그래, 씩씩하게 앞으로!
(웃고 걷는 만족. 점점 울상인 불만.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구경하며 걷는 만족. 앞만 보고 때로는 땅만 보고 걷는 불만. 마주치는 강아지나 하늘의 새들에게, 안 녕, 인사하고 가는 만족이의 입에선 노래도 흘러나온다. 운동소모량을 줄이겠다는 듯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는 불만이의 입은 더 삐죽 나온다. 목적지가 눈에 들어 온다.)
만 족; 와, 다 왔다!
불 만; 다와? 걸어봐서 몰라? 저기까지 가려면 족히 30분은 더 걸어야 하는 것, 이쯤 걸어봤으면 짐작하고도 남을 텐데 츳츳, 헛 걸었군 헛 걸었어.
만 족; 발이 더 빨라지는 걸.
불 만; 넌 힘이 넘치나본데 그럼 뛸 힘도 남았겠군.
만 족; 뛰어도 돼?
불 만; 니 발 갖고 니가 뛰는데 내 발이 왜 잡냐? 내가 상관할 일 아님!
(달려가는 만족. 더 뒤처지는 불만. 만족이가 달리다가 저만치서 멈춰 기다린다.)
불 만; 왜 거기 서 있냐? 뛰니까 금세 지치지? 안배할 줄도 알아야 할 거 아냐? 마구 뛴다고 뛰어지냐고. 내 그럴 줄 알았어. 조 앞에서 꼬꾸라질 줄 알았지. 근데 양심도 없는 놈. 같이 걸어와 놓고 테이프는 먼저 끊으려고? 에이, 약기까지... 더 상종 못하겠군. 그러니까 같이 걸어보든가 하룻밤을 새봐야 사람의 진심을 안다는 말, 틀린 게 하나도 없다니깐.
만 족; 그래서 기다리고 있던 중이야. 친구랑 손잡고 만세 같이 부르려고.
불 만; 이 놈, 임기응변 봐라. 능구렁이마냥 잘도 돌려 넘기네. 에이 가증스러운 놈. 손 잡자고? 너 정말 동성애잔가 보네. 난 아냐, 그딴 놈. 징그럽게... 딴 데 가서 알아봐. 내가 왜 니 손을 잡냐?
만 족; 그래도 난 니 손을 잡아야겠어.
(마지못해 하면서도 불만이는 만족이에게 잡힌 손을 빼지는 않는다. 그리고 도착.)
만 족; 고마워. 너 때문에 이 긴 거리가 그래도 수월했어.
불 만; 고맙긴. 그래도 우리가 해냈네. 몇 킬로미터지? 우리가 오늘 걸은 게?
만 족; 이십 킬로미터 좀 넘을 걸? 수고했어. 너, 정말 대단하다.
불 만; 넌 안 걸은 사람 같이 말한다. 지 칭찬을 꽤 이상하게도 하네.
(비로소 웃는 불만이가 먼저 포옹을 해온다. 안은 채로...)
우리가 해냈는데 이벤트가 없어서야 되겠니?
만 족; 어쭈. 너도 동성연애자였구만?
(서로 한 번 더 꼭 껴안는 불만과 만족.)
불 만; 안으니까 그 지긋지긋한 네 얼굴이 안 보이네. 안으니까 그거 하나 좋다. 고 주둥이도 안 보이고 그 뺀질한 쌍판 안 봐 좋고.
(안았던 가슴들을 푼다.)
만 족; 시원한 맥주 한 잔 해야지?
불 만; 그럼 당근이지. 내가 쏜다.
(한 잔이 아니라 석 잔씩은 마신다. 만족, 불만, 둘 다 눈이 토끼 같이 빨개졌다.)
불 만; 혼자, 아니 너 아니었으면 난 절대 못 걸었을 거야. 고맙다 새꺄!
만 족; 나 역시 그래. 고마워, 친구야! 다음에 또 다른 데도 함께 걷자, 친구야!
불 만; 아냐 아냐. 됐어, 오바하지 마. 난 이번 한번으로 대만족! 기록해둬야지, 사진 한 방? 가문의 영광으로 두고두고. 이런 건 많으면 식상하는 거거든. 그래서 기념은 한번이면 딱 좋은 거야.
(그 뒤 먼거리 동행 걷기는 없었지만 함께 걸었던 이 길은 20km를 훨씬 넘어 200km, 2000km를 걷게 된다. 불만이는 만족이 앞에서는 물론 다른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그 때 걸었던 20km를 완주라고 표현하며 자주 자랑하곤 했다. 이 이야 기를 할 때 그의 얼굴은 당연히 웃고 있었다. 그것도 양어깨를 위아래로 들먹거리 면서 자랑스럽게.)

 

만족은 내 가슴에서 시작하지만 나눔으로써, 나는 물론이려니와 남에게도 기분 좋게 전염시킨다. 이들의 대화에서는 상대배려와 인내, 그리고 존중, 결국 이타심을 읽을 수가 있다. 바꿀 수 있게 하는 힘, 역시 이타심의 힘이기도 하다. 긍정의 힘이라기보다는 배려의 힘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좋은 대화의 바탕은 독백이 아니라 생각의 교환이다.’(니나 루게)

 

생각의 교환으로 이타심을 서로 나눌 수 있다. 이타는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독백만 하려는 이기심과도 절대 다르다. 이타는 너와 나 모두의 이기이다. 소중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상호이해와 존중을 부모의 대화와 행동으로 익히게 하는 것은 사회 모두를 이롭게 하는 출발점이다. 아이 때는 어느 누구에게나 이래서 또 너무나 소중하고 고귀한 시간이다. 결코 흘겨버리고 지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후회해도 돌아오지 않는 시간, 그 이상이다. 삶을 결정하는 아이의 시간은 과거가 아닌 미래의 시간과 일치한다. 아이의 지금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이다. 아이의 지금을 놓치는 일은 아이의 미래·장래를 포기하고 버리게 하는 반성이며 후회이며 회한이 되기 때문이다.

 

<자식 먼저>

 

“애들이 가라고 해서 왔다.”
인형만들기 사랑방에 한 엄마가 뒤늦게 왔다. 늦게라도 참석한 이유다. 어린이집에서 집으로 돌아온 도원이와 시원이 형제는 직장일로 피곤해 눕고 싶은 엄마에게,
“강아지 만들어 오는 날이라면서? 엄마, 왜 어린이집에 안 가?”

 

쉬어서는 안 되겠구나, 엄마는 아이들의 말에 나지 않던 힘이 나더란다.
“오늘 잘 왔네요. 인형 하나 만들기도 해서지만 집에 가면 애들 앞에서 면목도 생기고 당당하겠는 걸요.”
특히 엄마만 찾던 동생 시원이는 엄마가 어린이집을 다녀오는 동안 형하고 잘 놀고 있겠다고 자발적인 약속도 했단다. 사랑방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바로 문자를 보내왔다.
“정말 시원이가 형 말을 잘 들었나 봐요. 앞으로도 그럴 거래요.”
형한테 대드는 버릇을 고치려고 그렇게 긴 시간을 애태우며 애썼건만... 이렇게 간단히?
“인형을 만든 게 아니라 아이 하나 제대로 세워놨네요. 한 턱 쏘셔야겠네요.”

 

인형만들기 사랑방에서 새어나오는 우스갯소리다. <17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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