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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부모인문학(9) ... 시간

 

8. 시간

 

‘우리 내면에는 변화를 완강히 거부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또 우리 내면에는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변화가 삶에 긴장감을 준다는 사실을 알며, 변화를 찾아 나서게 하는 다른 무엇인가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개인이든 인류든 발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후자에 속하며, 변화하려는 우리의 내면이 우리 몸 안에서 더 힘차게 작동하게 한다.’(존 W. 가드너)

 

변화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타고라스가 어렸을 때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서 아무런 능력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를 가르쳐보았지만 보통의 다른 아이만큼도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부모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피타고라스는 결국 수학에서 먼저 재능을 보이더니 철학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누구나 뛰어난 재능 하나쯤은 가지고 태어나지만 대부분 이것을 찾아내지 못한다고 한다.

 

피타고라스의 재능을 찾아낼 수 있게 한 것은 피타고라스의 재능이라기보다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신뢰이며 끈기였다. 그 뒤의 발견이었다. 여기에는 시간에 대한 투자가 함께 한다. 발견은 시간의 투자와 비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발견과 우연은 전혀 다르다. 자식을 믿고 기다린 뒤에 얻게 된 발견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들은 같은 시간 여러 것에 관심을 쏟았지만 나는 하나에만 무려 3년 이상 집중하기도 했다. 같은 시간에 여러 것을 하려 하는 그들에 비하면 내가 오히려 게으를지도 모른다.’(에디슨)

 

신뢰나 끈기, 이는 모두 시간을 우선 필요로 한다. 시간이란 곧 변화로 이어지게 하는데, 시간을 갖지 않고는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서 재능을 찾아내는 일은 시간축적의 결과에서 생겨난다. 들인 시간만큼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이들 재능의 발견이다. 이러니 시간축적은 부모들의 몫이다. 인내도 축적의 시간에 해당된다.

 

세상과의 첫 만남

 

생일을 우리는 태어난 그 해만이 아니라 매년 기념한다. 세상과 처음 만난 그 시간을 숨이 끊어질 때까지 기념하며 기억한다. 단순히 주민등록번호나 바코드·QR코드와 같은 신분제품 확인용이 아니라, 세상과의 조우를 시간과의 만남으로 상기시켜 알려주는 게 생일이다. 그렇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시간과 처음으로 대면한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시간에 매이다가 시간과 헤어진다. 삶은 시간이다. 나이를 세며 사는 우리는 시간의 노예이자 동시에 시간의 관리자이기도 하다. 노예로 사느냐 관리자로 사느냐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끌어가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시간에 어떻게 적응 또는 대응하느냐에 따라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드너는 변화에 대한 반응으로 구분하고자 했다. 변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지금보다 달라지고자 하려는가 지금에 안주하며 이대로 눌러앉을 것인가, 이는 시간을 다루는 자세에 달려있다. 누구나 더 나은 변화를 기대할 것이기에 변화는 마음에 갖고만 있는 것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기에 생각은 전시된 음식, 진열장의 입을 것에 불과하다. 맛나 보이면 뭐 하나. 멋져 보인들 뭐 하나. 내 것이 아닌데. 저장용·장식용에 그치면 생각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것은 시간을 정지시킬 뿐이다. 생각은 중요하지만 머물고만 있으면 흐르지 않는 물, 결국 썩게 된다.

 

생각도 머물면 부패된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생각은 서점의 책과 다를 바가 없다. 정치인들의 홍보용 사진의 배경 속 책장의 책과 같다. 생각을 전시하며 보여주고 싶어 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생각은 책장 밖으로 나와야 움직임으로 발전하고 비로소 살아나는 것이다. 전시된 생각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양장본 책과 같다. 잘 꾸며진 명사들의 서재에 절대 혹할 일이 아니다. 명사들을 운운하는 현혹의 미사여구에도 혹할 일이 아니다. 명사의 서제니 명사의 글읽기 등등 이런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명사 역시 남이다. 나를 남이 살게 할 것인가. 나를 남인 듯 포장만 하며 살 것인가. 남은 남일 뿐 나는 나다. 내 곁에 펼쳐진, 읽다가 말더라도 한 권의 책이 더 소중하고 더 의미가 있다.

 

과거·현재·미래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시간은 자신이 바뀌어가고 자신을 바꿔가는 변화에 의해서 구별될 때 발전을 소망하며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희망할 수 있다. 나를 중심으로 시간은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은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후진이냐 정체냐 진행이냐, 시간은 우리 주변을 늘 붙어 다닌다. 시간은 오히려 운전에 비유해야 더 적절하다. 움직이지 않으면 운행이 아니듯이 시간 역시 움직이지 못하면 정지·정체로서만 남는다. 언제나 그 현재는 정지요 정체다. 그 시간은 주차장에 놔둔 차와 같다. 운전자인 나는 어느 한 순간도 시간이란 운전대를 놓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렇게 시간운전면허증을 발급받고 태어나는 것이다. 누구나. 남이 대리운전해 줄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의 시간이며 나의 삶이기에 태어나면서 부여받는 첫 선물이 시간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 태어나 처음 주어진 일이 시간관리다.

그리스어로 크로노스(chronos)는 시간을 지칭하며 이는 자신의 아이들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신을 떠올리게 한다. 파괴와 죽음을 연상시키는 게 시간이라고 본 것이다. 시간이 폭풍우에 해당되는 단어에서 유래된 프랑스와 유사하다. 라틴어에서는 시간을 ‘햇볕에 달구어진 포도의 온기’를 의미하는 ‘tepor’에서 그 유래를 추정한다고 한다. 이는 내부에 전해지는 따뜻함으로 결국 과실을 익게 한다는 함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온기로 달콤하게 하는 것, 이것이 시간이라니 참으로 멋지다. 라틴어의 시간, 즉 ‘햇볕에 달궈진 포도의 온기’를 진정한 나의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가. 시간은 기다려줌이기도 하다. 포도가 그렇듯이 나를 믿고 빛이 그래주듯이 나에게 쏟아 붓고... 이런 기다림!

 

소중함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한다. 어릴 적 아이들의 선택은 부모에 의지하고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의지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의지를 많이 한 아이들은 커서도 그 의지심성을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의타심이 몸에 배게 되는 시절은 바로 아이 때이다. 과잉보호 또는 지나치거나 그르친 사랑이 의존적인 아이 그리고 의타심 많은 어른으로 키운다. 따라서 시간의 관리자가 아닌 시간의 노예로 만들게 하는 그 주원인은 부모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랑하는 자식을 시간의 노예로 만들 것인가 또는 시간의 관리자로 키울 것인가는 부모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평생 몸과 정신에 바싹 달라붙어 다니는 시간은 어린 시절부터 그 소중함의 의미로 익혀둘 필요가 절실하다.

 

독립심

 

서양의 귀족들은 의타심을 없애고 자립심을 강하게 하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부모와 떨어져 있게 한다. 방을 따로 쓰는 것과 기숙학교에 보내는 일이 그렇다. 이러한 관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는, 우리의 자식사랑은 어떤가? 자식을 옆에 꿰차고 있는 것이 깊은 사랑으로 알고 있는 부모가 많은 듯싶다. 허약한 아이, 나아가 의지박약한 어른으로 만들고자 함을 우리는 자식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 주변을 돌아보면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버젓한 대학을 나와서도 부모에 의지하며 손을 내밀고 사는 젊은이들이 참으로 많다. 젊은이들이 문제라기보다는 그들을 그렇게 나약하게 키우고도 모자라 어른이 다 된 뒤에도 그 뒷바라지를 해주는 부모가 더 문제다. 이 문제는 심각하다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문제로 확산되고 있질 않은가. 결코 사랑이 아니다.

 

‘독립성은 모든 선물을 포기하더라도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귀중한 것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그라시안)

 

타이밍

 

시간은 적절한 시기와 동행할 때 유효하며 효과적이다. 시기는 시간을 담아두는 튜브다.

 

스무 살의 J.S. 밀은 프랑스 여행을 다녀온 뒤 소년기와 청년기의 좌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교육의 힘을 찰떡같이 믿은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교육되어져 인위적으로 키워졌다. 아버지 제임스 밀은 아들과 같은 또래의 자녀를 둔 그의 친구와 내기를 한다.

 

“두 아기 중 누가 가장 완벽하게 고결한 젊은이로 성장할 것인가 우리 내기합세!”

 

이렇게 해서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지식인으로 만들어진 아들 J.S. 밀은,

 

“인간 감정의 힘에 대한 이해가 없이 어른이 되고 말았다.”며 소년 시절을 푸념하며 불행으로 여겼다. 프랑스 여행 중 자유계몽사상을 접하면서 아버지로부터 조각된 자신을 차츰 벗겨내기 시작한다.

 

‘모든 어린이는 소망스러운 생존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타고나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J.S. 밀)

 

그는 그의 <자유론>에서 지극히 이성적이며 최고의 지적 인간으로 길러진 자신을 되돌아보며, 인간에 있어서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밝히고 있다. 인간의 자유와 다양성을 평생 주장한 밀은 문학으로 자신을 바꿀 수 있었고, 여행을 통해 자신의 사상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가 문학과 여행을 통해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적합한 시간과 적절한 시기와의 만남이기도 했다. 모든 만남은 적당한 시간과 적절한 시기에 의해 주어진다.

 

‘이전의 시간은 나의 활동 뒤에 가만히 그리고 온순하게 숨어있었기 때문에 내가 인지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은 시간이 알몸으로, 시간 본연의 시간으로 나에게 다가왔다.’(밀란 쿤데라)

 

순수할수록 만남은 그 만남의 시간에 더 충실할 수 있다. 인생의 긴 시간에서 가장 순수한 때는 어린 시절이다. 이 시기를 부모의 이기적인 사랑으로 인해 순수성을 상실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본다. 순수성을 잃는다는 것은 만남이라는 시간의 소중함을 잃는 것과 같다. 타이밍은 우연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잡아챔으로써 얻는 것이며 어렸을 적엔 이를 부모들이 일시적으로 대신한다. 대리란, 말 그대로 임시 맡아 대신하는 일이며 대리요구자에게 충일해야만 한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은 대리라는 생각을 잊고 또 잃기 쉬운 관계이기에 서로 의지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대리의 함정이랄 수 있다. 이 함정은 사랑의 집착이나 사랑의 소홀 모두에 의해서 생겨난다.

 

아이의 온전한 삶을 위해서 부모가 순수해질 필요는 절대적이다. 부모는 아직 미숙한 아이의 삶을 잠시 건네받아 부모가 대리운전해주는 것이지 아이의 모든 삶까지 다 책임지려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사랑이 깊다 해도. 어떠한 사랑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부모의 사랑은 순수해야 한다. 제 자식만 아는 이기적인 사랑은 순수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을 자식사랑이라고들 말한다. 자식사랑이 자가당착에 빠졌다.

 

가장 아름다운 배려

 

영국의 J.S. 밀이 그랬듯이 독일의 괴테 역시 여행을 통해 변화를 꾀했고 발전할 수 있었다. 10여 년 동안 이루지 못한 사랑에 지친 괴테는 여행을 통해 울적한 기분을 벗어던졌다. 그 동안에 쌓아놓은 화려한 경력을 다 포기하고 서른여덟 살 생일에 떠난 이탈리아 기행은 스스로 끌어들인 자기 시간에의 할애이며 자기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배려였다. 자발적으로 시간과 시기, 즉 타이밍을 관리했던 것이다. 이들처럼 시간에 자기의지가 보태질 때 비로소 삶은 내 것이 된다. ‘인간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흥미 있는 존재이다.’라고 했던 괴테의 말을 바꿔본다. ‘아이야말로 자기에게 가장 흥미 있는 존재이다.’라고. 아이가 아이 자신에게 흥미를 갖게 하는 일은 삶을 내 것이게 하는 삶의 출발이 되게 하지 않을까. 자기에게 주는 배려의 시작임이 분명하다.

 

‘보이는 세계의 본체는 의욕이다. 세계는 의지의 거울이며, 또 그 투쟁장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 된다.’(쇼펜하우어)

 

어느 조경수의 깨달음

 

유치원 마당의 나무들을 조경사가 거의 네 시간째 다듬고 있었다. 땀에 저린 그의 얼굴은 어두웠는데 꼭이 지쳐서만은 아닌 듯했다. 거듭 고개를 갸우뚱하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가 나무에서 멀리 떨어져 담배에 불을 붙인다. 조경사가 물러난 나무 사이로 아이들이 들어와 뛰어논다. 다 끝내지 않은 조경이라 아이들을 제지하려다가 조경사는 멈칫한다. 조금 후 그의 표정이 밝아온다.

 

“나무 가까이 붙어서 작업할 땐 보이지 않던 게 쉬려고 물러나서 보니 보이더군요. 그제야 이곳이 어린이들의 유치원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떨어지니 보였습니다. 아이들을 나무에서 떼어내고 작업에만 급급했다면 어른 키에 맞춰진 나무다듬기만 하고 말았을 겁니다.”

 

시간은 공간이 되기도 한다. 공간의 변화는 시간의 전환이기도 해서다. 휴식의 시간, 그리고 물러나서 보기가 때로는 더 적합하고도 더 적절한 타이밍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조경사의 깨우침은 멈춤의 시간도 진행의 시간임을 알게 하는 발견이었다.

 

며칠 전 중학생 딸과 크게 말다툼했다며 울먹이기까지 한 친구가 문득 생각났다. 초등학교 때 입은 화상 상처가 오른 팔에 지금도 남겨져 있는 딸을 가진 친구다. 더욱이 사고는 부부싸움 때 벌어진 일이라 친구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 팔을 내놓아야 하는 여름이면 딸은 더 예민했다. 남들과 달리 긴 팔 교복을 입고 다녀야 하는 딸은 등교를 거부해오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학교 안 가고 집에서 공부할 거야.”

 

설득하려던 친구는 딸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수차례의 수술로도 굽어진 팔은 펴거나 구부려지지 않았고 화상의 흉한 상흔도 없애질 못했다.

 

“그럼, 엄마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그래도 공부만은 마쳐야 하지 않겠니?”

 

아무리 딸이라 해도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울고 있는 엄마에게 딸은,
“나한테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어.”

 

끝내 엄마로서 들을 수 없는 말을 딸에게서 듣고 만다.
“어차피 결혼도 못할 거라면 지금 이 세상에서 사라져주는 것이 엄마에게 효도하는 거야.”

 

너보다도 더 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말로 설득해보았지만,
“병신이면 다 병신인 거지 더 낫고 못한 게 어딨어. 병신은 다 병신인 거야.”

 

딸은 엄마의 가슴을 더 미어지게 했다. 학교에 나가지 않는 딸은 더 심한 심적 갈등에 휩싸일 것이며 고독이란 새 병도 얻게 될 것이 뻔하기에 학교를 그만 두고 다른 대안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러니 딸의 의견을 순순히 따라줄 수만도 없었다. 유치원으로 찾아왔다.

 

“어떻게 하면 좋으니? 나는 내 딸에게 해줄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질 않아. 어찌해볼 힘도 내겐 없다. 내 딸이 너를 잘 따랐잖니? 어떻게 하면 우리 딸을...”

 

추억에 최면걸기

 

사람은 망각이라는 또 하나의 다른 시간을 가지고 산다. 망각은 추억으로 감춰질 수도 있다. 이것도 끄집어내면 추억이 되고 아름다울 수 있다. 행복했던 추억을 꺼내보기로 했다. 과거는 담아두면 정지된 시간으로 남을 뿐이지만, 다시 꺼낼 수 있다면 과거를 현재로서 흐르게 할 수도 있다. 시간이 정해놓은 건 없다. 인간이 과거·현재·미래라고 규정지어놓고 옭매여 살 뿐이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시간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다.

즐거운 추억에 최면걸기를 해본다.

 

이는 과거라는 시간을 현재에 관리하는 방법이다. 과거를 떠올리게 하면서 현재를 잊게 하거나 극복하게 하는 방법이다. 유치원 꼬마들에게 봉사하는 시간을 딸이 갖도록 해보기로 했다. 제자를 즐거웠던 어릴 적으로 돌아가게 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치유는 단기적으로, 더욱이 즉흥적으로 끝내서는 절대 안 된다. 아픔이 클수록 치유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인내야말로 가장 고귀한 시간이다. 즐거웠던 추억으로 다가가기 하는 제자 그리고 딸의 표정은 무척 밝아보였고 더없이 맑아보였다. 학교를 다니는 대신 방학 땐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들과 놀 것을 약속했다. 아르바이트라며 일한 대가에 대해 비록 돈이지만 보상해주기로 했다. “정말요?” 제자의 얼굴에서 어릴 적 표정을 다시 보게 되었다. 보는 선생도 이리 기쁜데 그 아이의 마음은 더 어떨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돈으로 아이들과 아이스크림 사먹어도 되지요?” 평소 아이스크림 등과 같은 달콤한 것들을 몸에 안 좋다고 먹지 못하게 하던 선생은 고개를 끄덕끄덕끄덕거리며 “당근이지.”

 

‘풀을 뜯고 있는 가축의 무리, 혹은 친근하게 느낄 어린이들을 보면 마치 잃어버린 낙원을 추억하는 듯이 감화되고 만다. 어린이는 아직 부정할만한 과거를 갖고 있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울타리 사이 맹목적인 행복 안에서 노닐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행복이든 행복으로 하여금 행복하다고 느끼게끔 하는 이유는 언제나 하나다. 즉 잊어버릴 수 있는 것. 과거의 것을 미래의 삶을 위해서 사용하고, 이미 일어났던 일에서 다시금 역사를 만들 때 그 힘에 의해서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니체)

 

<엄마 먼저>

 

“엄마 보고 싶어!”
“엄마 왜 안 와?”

 

어린이집에서 자주 들려오는 아이들의 말이다. 듣고 있으려면 가슴이 찡해온다. 저릿하기까지 하다. 이런 아이들을 바라볼라치면 아이 표정처럼 마음이 울적해진다.

 

맞벌이부부의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언제나 늦게 찾아오는 엄마나 아빠가 밉다.
“엄마, 하늘이 밝은 낮에 안 오고 왜 이제 와.”

 

반가워야 할 아이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야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그런가하면 친구들과 한참 신나게 놀고 있을 때 엄마가 찾으러오면 대체적으로 아이들은 짜증을 낸다.
“이제 막 재미있어지려는데...”

 

노는 데에만 정신을 팔고 있는 듯하지만 아이들은 ‘기다림’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하고 단순하기에 엄마나 아빠가 데리러올 시간만을 고대한다. 이 아이들은 아직 시계를 볼 줄 모르고 더욱이 시간은 모르지만 시간이란 개념을 아이들은 분명히 갖고 있다. 품고 있다고 해야 더 적확하겠다.

 

“오늘도 내가 꼴찌잖아.”
“마당에 우리 둘 다 엄마가 있었으니 우린 똑같이 집으로 간 거지?”

 

조금 늦게 왔지만 어린이집 마당, 즉 아이의 시야에 함께 두 아이의 엄마들이 들어왔으니 같은 시간에 엄마가 자기를 찾아온 것이라고, 그래서 꼴찌로 데리러온 건 아니라고 자위하고 싶은 것이리라. 이런 아이들의 감각적인 시간 안에는 어른들의 구체적인 시간보다 타이밍이 더 중요해 보인다. 이때의 타이밍은 마뜩한 시간을 말한다. 이래서 5시 반 또는 오후 등 시계로 확인되는 어른들의 시간보다도 감각으로 느끼는 아이들의 시간이 더 정확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아이들의 시간은 들쭉날쭉 제 기분에 따라 달라지니 어른들이 말하는 정확성과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아이들의 시간 속에는 숨겨져 있는 아이들의 감정이 들어있기에 아이들의 시간은 더욱더 존중되어야 한다. 존중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엄마, 하늘이 밝은 낮에 안 오고...”
“엄마, 하늘 봐봐. 껌껌하잖아.”
“이렇게 늦게 오려면 더 늦게 오든가.”(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의 말이다.)

 

‘늦거나 빠르거나’의 기준엔 엄마·아빠를 기다리는 집중된 마음의 시간이 서려있다. 아이들 세계의 타이밍에 변덕스럽다거나 갈피를 못 잡겠다고 무시하거나 폄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때 부모의 할 일, 대응법은 솔직해야한다는 것이다. 일관성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엄마·아빠에 꽂혀있는 아이들의 기다림을 일관성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말이다. 부모의 솔직함 역시 일관성으로 맞춰져야한다.

 

“오늘 회사에서 바빴단 말야.”
“일찍 나오려고 하는데 일이 더 생겼지 뭐니. 미안 미안.”

 

대개 이렇게 아이에게 응수하지만 아이들은 거짓으로 받아들일 게 분명하다.
‘늘 이러면서 늦잖아.’

 

이 말 대신 아이들은 밝은 하늘에 빗대어 말하고 깜깜한 하늘로서 약속을 어긴 엄마나 아빠를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변명이란 단어를 모르는 아이도 변명의 의미는 알고 있으며 이것은 곧 거짓으로 받아들인다.

어린이집 아이들에게서 자주 듣는 또 다른 말이 바로, “약속을 안 지켜!”다. 엄마나 아빠에게 주로 하는 말이지만 선생들에게도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이것은 아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시간은 바로 기다림으로 나타나고 그 기다림 속에 지켜봄이 숨겨져 있다는 것. 이래서 아이들에게 있어서 타이밍은 시계의 시간보다 더 소중하기에 부모나 선생 등 어른들은 아이들의 시간을 존중해줄 줄 알아야한다. 순수하기 그지없고 이래서 단순한 아이들은 타이밍이 어긋나면 약속을 어긴 것이고 따라서 거짓말쟁이로 보는 것이다.

 

부모나 선생이 아이들에게 거짓말쟁이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지켜야 하지만 지키지 못할 것이라면 후에 변명으로 대충 넘어갈 생각을 말아야 한다. 지켜보는 기다림에는 대충이란 시간, 대충의 타이밍은 없다. 타이밍에 대충, 얼렁뚱땅은 없다. 기다림이 절절할수록 더 깊다. 시계를 볼 줄 모르니 시간도 모를 것이라고 하며 아이들의 시간을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이다. 아이들의 시계는 어른들의 시계와는 다르다. 아이들의 감성의 시계에 귀 기울여 주목하자.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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