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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부모인문학(13) ... 대화

대화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율리우스 카이사르)

 

모든 관계의 동기는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생각이나 상상도 자기와 관계된 일일진대 이 또한 자기와의 대화로써 시작된다. 만남은 더욱 그러하다. 부부의 인연도 대화로써 이루어지며 사랑도 대화로써 시작하여 깊어진다. 대화는 화합 또는 결합을 위해 내딛는 첫 걸음이며 최종 또는 결과로 가기 위한 출발점이다. 모든 결합과 결과는 대화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이다. 대화 없이 결과 없고, 대화 없이 결합도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혼이 내게 주었던 가장 소중한 선물은, 아주 가깝고 친밀하면서도 언제나 확실하게 내가 아닌 남이며 순종적이지만은 않은, 한 마디로 살아있는 어떤 것의 영향력을 계속 느끼게 해주었다는 점이다.’(루이스)

 

 

닮은꼴

 

인간은 대화로부터 태어난다.
“당신과 같은 딸이면 좋겠다.”
“자기와 닮은 아들을 낳고 싶어.”

 

자식은 또 다른 나의 현시이며 현신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나를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식을 통해 만난다. 따라서 자식과의 대화는, ‘나와 유사한 다른 나’와의 대화이다. 인간의 종족보전의 이유와 당위가 여기에 들어있다. 닮은꼴로 이어가게 하기.

 

어려서 부모와 자주 얘기를 나눈 아이는 커서도 부모와의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간다. 대화는 완전히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관계의 소통에 있어서의 윤활제가 되어준다. 하면, 가장 바람직한 가정은 부모자식 그리고 형제·자매와의 대화가 잦은 가정일 것이다. 대화에서도 부모의 역할이 절실히 요구된다. 바쁘다는 이유로 대화를 엄마에게 떠넘기는 가정이 많다. 이러한 가정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대화가 줄어들 수밖에 없어 모든 문제의 갈등심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아버지의 역할은 대화의 단절에서부터 차단되고 가정의 불행은 이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단절되고 폐쇄되고 따라서 시끄럽고 혼란한 사회의 원인을 대화의 부족에서 찾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존엄성

 

대화가 적은 부부의 자식들 역시 대화가 적고 대화하는 방법에도 서툴기 마련이다. 이성적 인간관계의 출발이 대화일진대 부적합하며 비정상적인 사회인이 대화 없는 가정에서 배출되는 것은 당연하다. 남과 소통할 줄 모르면서 남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대화가 없거나 적다는 것은 상호 협의적이기보다는 대립 폭력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짙다고 할 수 있다. 폭력은 자기방어의 또 다른 수단으로, 자기존중이나 자기 존엄성의 상실에서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

 

‘이상하리만치 심한 공격성을 보이는 이유는 좁은 공간과 그 때문에 생겨난 본성에 맞지 않는 집단의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마토 바푸스)

 

대화는 타인에 대한 존중이면서 동시에 자기존중이다. 자기든 타인이든 소중한 존엄성을 지켜주는 습관은 어릴 때부터 몸에 배게 해야 한다. 부모와의 대화로써 자기의 존엄성은 몸 안에 축적된다. 존엄성의 상실은 자기 자신을 잃고 사는 것과 같다.

 

‘현대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인간이 자신의 눈으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기의 존엄성을 상실했다는 점이다.’(니체)

 

중년의 세 남자가 오랜만에 모였다. 대학동창생이다. 한 친구가 계속 스마트폰에서 손을 떼지 못하자 핀잔을 듣는다.

 

“애들처럼 뭐하는 짓이냐? 숨겨놓은 애인이니?”

 

불멸의 애인

 

“애인? 그렇지, 애인이지. 불변·불멸의 애인!”

 

‘어린 아이는 천진하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이다. 하나의 유희이다. 스스로 돌아가는 수레바퀴다. 맨 처음의 운동이다. 그리고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여, 창조의 유희에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는 궁극적으로 어린 아이가 되는 것이다.’(니체)

 

아들; 공부하다 힘든 건 차라리 쉬고 머리 식히면서 나아지는 법인데, 이렇게 답답한 건 방법이 없네. 조금 지나고 학교 다니다보면 낫겠지 뭐.

 

아빠; 일기장 꺼내 그 심사를 써보렴.
아들; 그래, 알겠어. 내가 혼자 외국 나와 있는 게 여러 번이었음에도 한국만 다녀오면 꼭 이렇게 힘드네. 글로 풀어보도록 할게.
아빠; 그래. 이번엔 더욱 이성적으로 견뎌보자. 바로 이 해법이 일기가 되어줄 거야. 아들의 그 나쁜 버릇고치는 것 이상의 능동적인 방법 ㅋㅋㅋ 힘내 아들!(아빠의 이 소리 들리니?)
아들; 그래. ㅋㅋ 아빠 소리 들으니까 좀 힘이 나려고해. ㅎㅎ 뭐 외국 나와 혼자 있는 게 힘들고 외로운 건 당연하지만... 일기 쓰며 한번 견뎌볼게.
아빠; 야~~~~~~~~~압!!! 아빠도 먼 나라 가서 혼자 잘 견디고 견뎌낼 아들에게 하나 약속할게! 내 몸, 몸짱 만들기!!! 그 이유는, 1. 다친 어깨를 운동으로 고쳐보려 함이고, 2. 아빠가 평소 혐오하던 일을 함으로써 아빠를 구속하는 일에서 벗어나기.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야. 이렇게 지금을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우리 서로 극복해보자꾸나.
아들; 그래 ㅋㅋ 꾸준히 운동하는 거 좋은 습관이지! 아빤 너무 운동을 안 하고 있더라. 근데 아직 뼈에 무리 줄 수 있으니까 천천히 하고... 간 쪽이 아프다는 것도 고집 피우지 말고 검사 받기!!! ㅎㅎ
아빠; 그래. 검사 받을게. 고마워 아들아. 우리가 만나게 될 여름방학 때쯤 아빠의 몸짱을 보여줄게, 기대하라 아들! 시드니 해변에서~~~ ㅋㅋㅋ
아들; 꼭 받아봐.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아서라기보다는 사전에 미리 건강 체크하고 예방해야지! 운동도 꾸준히 하고 ㅎㅎ 아빤 몸 잘 나오는 근육질이잖아. ㅋ
아빠; 그렇지? 좀 전에 내 몸을 거울로 보니 아들이 썼던 아령으로 몸 가꾸면 멋진 몸 될 것 같은 예감이 ㅋㅎ 지금은 똥배지만 흑흑흑
아들; 그렇다고 너무 무거운 거 들지 말고. 내 꺼 하나는 거의 10kg짜리라 조심해야 해. 작은 것이 4kg짜리인데 그걸로 먼저 충분히 아빠 몸에 맞추는 게 좋아. 아빤 뭘 시작하면 서두르잖아. 서두르다가 오히려 비실몸 보여주지 말고 ㅋㅋㅋ
아빠; 아빠도 운동하며 고쳐볼게. 우리 떨어져서도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하다가 만나자, 아들! 사랑해!

 

“아니, 아들이 몇 살이야? 대학생이잖나? 요즘 대학생이 엄마가 아닌 아빠랑 문자를 나눈단 말야? 그것도 저렇게 오래?”

 

비슷한 또래의 자식들을 둔 남자들은 거의 처음으로 자식 얘기로 화제를 이어갔다. 딸이 밤늦은 시간까지 불을 켜놓고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공부 잘 되니?’ 하고 물었다가 참견하지 말라, 내 일 내가 알아서 한다, 아빠가 언제 신경이나 썼어? 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또 황당했는지 모른다는 친구. 가끔 가족 모두 외식을 하긴 하는데 거의 대화가 없고 식당에 켜놓은 TV에 빠져 있는 아이들에게 말을 붙이기도 뭐 하더라는 친구. 두 친구는 아들과 하루에도 수시로 문자를 나눈다는 친구가 오히려 의아스럽고 신기해보였다.

 

“따라주는 아들이 대단한 건지, 아님 부모밖에 모르는... 그런 아이들이 많다며? 특히 공부 꽤나 한다는 애들일수록 그렇다는데, 니가 그런 거냐?”

 

“애 볶지 마라. 다시 네게로 돌아온다. 가뜩이나 힘든 세상인데 부모만은 자유롭게 내놔야 하지 않냐?”
이러다가 어디 좀 보자 하여 부자 간 나눈 문자를 보게 되었다. 돈 벌어다주느라고 어렸을 때 자식들과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는 두 친구에 비하면, 문자를 자식과 나누는 아빠는 어려서부터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이 많았고 대화를 많이 가지려 했다.

 

“돈 벌어 아파트 평수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하고 보내는 시간의 행복을 그 무엇과 비교하리요. 아파트 평수보다 행복평수를 무엇보다도 먼저 늘려야 하는 것 아닌가.”

 

 

TV

 

자식과의 대화를 강조하는 친구는 TV를 집에서 없앤 지 15년이 되었다고 했다. TV가 가족의 대화를 막는다고 주장한다. TV가 집에 없으니 가족이 더 모이게 되고 이러니 더 대화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책 읽는 시간도 많아졌다. 다른 친구가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아이들이 반발하지 않느냐 물으면서 미국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을 들려준다.

 

“TV or not TV, that is the question.”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명구,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을 비슷한 발음으로 패러디한 이 신조문은, TV가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비중이 큰가를 보여주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류의 대다수는 남의 삶을 그저 부러워만 하다가 삶을 마칠 뿐이다.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 인생! 남의 삶인 드라마만 보고 웃고 울고 할 뿐이다. 일박이일, 남들이 노는 것을 보고 웃고 있어야만 하나? 내가 놀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내 삶은 없다. 진정한 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식을 자기의 삶답게 살아갈 어른으로 키우고자 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기에 눈을 보호한다는 이유에서 처음 TV를 없애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잘 한 결정이었다고 말하는 친구는, TV의 대안으로 다른 문화생활을 더 많이, 그리고 골고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TV를 없앤 후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대화를 통해 대화법을 터득하고 또 마음을 나눌 기회를 자주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부모가 더 많이 말을 하게 되는데, 이는 자기 말을 하기 전에 남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나 자세를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Learn, Like, and Do! 이 문장도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이 하는 말이라더군.”
‘배우고 좋아하고 이렇게 배운 것들을 스스로 즐겁게 행동하게 하라’는 이 말은 가정의 대화에서도 꽤 유효하고 아주 적절했다.

 

“미국서 유행한다는 두 말, ‘TV or not tv...’와 ‘Learn, Like, and Do.’ 중 어느 것을 따르겠니? 누가 자기 삶을 더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는 걸까?”

 

경청

 

‘만약 우리가 듣는 것보다 말하기를 더 많이 하라고 창조되었다면, 우리는 두 개의 입과 하나의 귀를 가졌을 것이다.’(마크 트웨인)

 

경청을 통해서 아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머리와 가슴으로 정리할 수 있게 했고, 그 뒤 아이의 말을 부모가 다시 경청하곤 했다. 질문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것 같다며, 이것은 가족 간의 대화로 얻은 부수입이라고도 했다. 경청은 능동적인 행동화의 전초지이다. 부모가 물어보면 귀찮아하는 다 큰 아이들에게서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본다. 또 대화가 적은 가정을 보면 아버지의 잔소리가 많다. 잔소리도 들어서 좋을 교훈일진대, 아이들은 잔소리로밖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소리 또 하는 소리 그 소리의 되풀이. 술에 취하면 하는 또 그 소리는 잔소리로 들을 수밖에 없다. 잔소리로 듣는 것은 그것이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강압적이고 강제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귀담아 들을 리 없다. 일방적인 말은 결코 대화가 될 수 없다. 상대가 귀담아 들으려하는 자세가 돼 있지 않다면 애시 대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애비 말을 들어먹어야지.”
“요즘 애들 다 그렇지!”

 

애들 탓으로 돌릴 게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방목과 방치는 전혀 다르다. 대화에서도 소중한 아이들을 방치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방치는 무책임이다. 따라서 방치는 절대자유에 가깝다. 절대자유는 방종이며 방탕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제 뭐 어쩌겠어. 각자 제 삶대로 사는 거지.’
우리는 다시 방치의 악순환 속에 놓인 채로 포기하며 자조하게 된다. 시작이 어긋나면 중간과 끝은 더 벌어지게 돼 있다. 삶의 시작이란 어린 시절, 그 시간을 말한다. 대화가 안 되고 이러니 소통 없이 갈등만 잦은 사회는 바로 가정에서의 대화부족에 연유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온전한 어른으로 진정 사회의 리더가 되길 바란다면 부모는 아이들과 먼저 대화할 의무가 있다. 대화로써 충분히 아이들의 삶을 능동적이고도 긍정적으로 이끌 수가 있다. 스스로의 삶을 살게 하는 것, 자립은 가족 간의 대화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남의 말을 빌려 타고 긴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차마설’이다. 남의 말(馬)을 동물이 아닌 남의 말(言)로 바꿔보면 삶은 더 실질적이고도 더 실속 있게 이해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많이 듣고 출발한 삶의 여행은 시작부터 다르다. 충분한 자료를 갖고 떠나는 여행과도 같다. 더욱이 이 자료는 부모의 사랑이 담긴 진실한 고견의 정보이자 진심어린 온정의 선물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들려주는 얘기에 조잡한 악의나 조악한 고의는 없을 것이 아닌가. 부모 말씀의 지혜는 아이들에겐 어느 철학자의 말보다도 더 깊고 더 넓을 수밖에 없다. 부모와의 대화 속에서 일찌감치 꿈이 세워지고 키워진다. 부모가 아이를 꿈꾸게 한다.

 

<부모 먼저>

 

“아빠는 책만 읽어요.”
한 아이의 이 말 속에는 놀아주지 않는 아빠가 들어있고 대화 역시 없는 아빠도 들어있다. 아이의 불만으로만 들을 순 없다. 분홍색에 민감한 여자 아이가 있다. 분홍색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가장 싫은 색이 분홍이에요. 분홍색, 이제 질렸어.”

 

아이의 이 말을 듣고 더 세심히 관찰해보니 아이의 옷이며 가방이며 신발까지 온통 분홍색이다.
“엄마가 분홍색만 사줘요.”

 

이 역시 아이의 불만으로만 들을 수가 없다.

 

가장 손쉽게 먹일 수 있는 국이 미역국이란다. 너무 많이 먹어 질려서일까. 맛나게 끓여진 미역국도 무조건 싫다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또 미역국이야?”

 

이 또한 아이들의 불만으로만 단지 들을 순 없다. 위의 예에서 아이의 의사는 무시된, 아님 사랑이 너무 깊은 나머지 일방통행하는 부모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그것밖에 모른다, 라든가 그것밖에 없다, 로 여겨지면, 즉 지나치면 오히려 역반응, 역효과를 초래할 수가 있다. 과유불급,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말은 아이들에게도 부모들에게도 적용되는 격언이다. 일방적이라는 말은 상호나눔의 교호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대화가 없다는 것과 같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음과 같다. 들으려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그) 어린 것이 뭘 알아.’
싹둑 잘라내는 무시의 말 속에서 아이는 획일적이고 단편적인 사고의 아이로 키워지고 있는 중이다. <13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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