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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부모인문학(6) ... 예의

5. 예의

 

공중목욕탕에 갈 때마다 드는 불쾌감은 공공의식 또는 대중의식의 수준으로까지 비약하게 되는데 종종 이웃 일본과 비교되곤 한다.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수건들이며 씻지도 않고 탕에 바로 들어오는 이들, 남의 귀에 거슬리는 시끄러운 대화 등이 그렇다. 이는 한국의 공중목욕탕 풍경이며 일본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철저한 관리의 나라인 일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엄한 통제사회에서 비롯된 관습이기에 역사까지 싸잡아 부러워할 것까지는 없지만 어떻든 현재 그들의 관습은 남을 배려하는 문화로 정착되면서 일본인의 정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2011년 3월 지진과 쓰나미로 폐허가 된 일본은 다른 면에서 세계를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그들의 정연한 공중질서 때문이다. 비인간적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그들은 지나치게 침착했는데, 이로써 더 큰 혼란과 소요를 막을 수가 있었고 그 근간에는 자기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어릴 적의 가정교육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그렇다. 일본은 취학 전 아동에게 가정에서부터 남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교육을 부모로부터 철저하게 받는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가? 비교해보면, 한국은 부모들이 취학 전부터 남보다 더 잘해야 하고, 어떻게든 1등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참고로, 미국은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의 공중의식이 무엇보다 우선임을 가정에서 가르친다고 한다. 관습은 역사라기보다는 교육이며, 습관이 모이면 관습이 될진대 이런 관습은 개개의 가정교육에서 이미 이루어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개인의 습관은 사회에 반영되어 관습이 되고 국민성으로 정착된다.

 

함께, 더불어

 

‘바람직한 삶을 만드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선의에 대해 갖는 의식으로, 이러한 의식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이는 함께 하는 삶 속에서만 실현가능한 일이며, 선하고 스스로 행복한 인간이길 원한다면 반듯이 벗을 필요로 한다.’(아리스토텔레스)

 

아버지와 아들이 욕조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는 모습은 남이 보기에도 정겹고 아름답다. 이런 모습은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반가웠다. 하지만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광경의 목격으로 부러웠던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경우를 종종 우리의 공중목욕탕에서 본다.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거리낌 하나 없이 욕탕 밖으로 침을 뱉는다. 부자 간의 대화는 계속 되며 시끄러워 귀에 거슬릴 정도로 깔깔 웃어대기까지 한다. 이런 아들은 그런 아버지로부터 자연스럽게 무엇을 배울까.

 

 

단순하게는 남과 함께 사용하는 공중장소지만 침을 뱉어도 되는구나, 이는 남이야 어찌 됐든 나 좋은 대로만 하고 살면 돼, 극히 잘못된 이기주의를 아버지로부터 처음 배운다. 직접 현장체험을 통해서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다. 씻지도 않고 욕탕으로 바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면 대부분 그 아버지나 할아버지도 그렇다. 자기 자신에게 선의를 갖는 의식이 없는 한 남과 함께, 남과 더불어 사는 삶을 기대하기란 매우 힘들다.

 

존중

 

일본의 공중목욕탕에서 받는 기분은 우리의 그곳에서 받는 기분과 사뭇 다르다. 시설은 오래됐어도 물은 늘 깨끗하고 탕 주변은 정갈하다. 쓰던 수건이 떨어져 있는 일은 거의가 아니라 전혀 볼 수가 없다. 불쾌할 일이 없으니 편하다. 목욕을 다 끝내고 나올 즈음이면 존중 받고 있는 나를 느끼게 된다. ‘존중 받고 있다’함은 대접 받고 있다는 말과 유사하다.

 

직접적인 관계로서 받는 대접이 아니다. 쾌적한 환경으로 말없이 건네 오는 존중은 남을 거슬리지 않게 하는 배려행위에서 비롯됨을 알게 한다. 이러한 각자의 행위가 모여 하나의 환경을 만들고 이는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이것이 기분이며 분위기이며, 이 기분이나 분위기가 바로 존중이며 존중 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서로 해가 되지 않는 행위를 하게 되면 결국 나 자신이 불쾌해할 일도 생기지 않는다. 남을 존중하는 일은 자기가 존중 받는 것과 같다. 결국 서로가 편하다.

 

이기주의

 

이기주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 출발은 그렇지 않다. 이기주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우정’이란 뜻을 가진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연원을 재확인시켜주기 위해서인지, 이기주의의 잘못된 이해를 깨우쳐주기 위해서인지 이미 오래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안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것을 더 사랑하는 게 이기주의’라고 했다. ‘이기주의는 사유(생각)함으로서 자신을 인간적으로도 더욱 훌륭하게 만들게 한다.’고도 했다.

 

이러한 이기주의대로 행동하며 이를 서로 나누다보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와 서로는 존중하고 존중 받게 되는 것이다. 이기주의는 나의 사랑이 남에 대한 존중이 될 수 있는 행위 또는 그 반대로 남의 존중으로 나를 더 사랑하고 사랑받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과는 다른 공중목욕탕(또는 찜질방)에서의 문화를 바꿔보는 일은 결국 나를, 그리고 우리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로 만드는 대단한 사회혁명이 될 수가 있다. 목욕탕이든 찜질방에서 우린 너무나 나 자신의 편이함, 편리함만을 즐기다 오지 않았던가. 부모와 함께 간 우리의 아이들은 여기서 무엇을 또 배우게 될까. 나 하나 바르게 산다고 달라지나, 하며 외면하고 나도 같은 부류로 합류한다면 우리는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은 서로 불쾌감을 감수하면서 제 것만 챙기는 못나빠진 에고 사회에서 내내 지지고 볶고 불평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편리이며 편의라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사람의 질적인 삶은 선진국은 물론이고 소위 경제적 후진국을 모두 포함하여 최하위로 그 불만족도도 높다고 한다. 편의는 나만이 아니라 남도 함께 편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자기만의 편리함은 불편으로 다시 내게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불만 많은 국가가 우리나라라는 사실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나 하나라도 하자’의 자세는 진정한 자기사랑이며 자기 삶에 대한 진솔한 애정행위이며 나와 다른 남도 아름다움으로 동행하게 만드는 힘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나로부터 시작하고 이것은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배우고 익히게 된다. 부모의 힘은 여기에서도 발현되어야 한다. 이러한 부모의 힘은 사랑스런 자식을 자랑스러운 어른으로 키우는 일의 원천이 된다.

 

공감

 

‘공감은 사람과 교감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술이다.’(골먼)

 

세상에 태어나 가정에서 처음으로 배우고 익혀야하는 것이 바로 공감이지 않을까. ‘엄마’ ‘아빠’라는 말을 처음 배우고 ‘이게 뭐야?’라고 보이는 것 족족 묻는 아이들. 바로 공감하고자 하는 아이들의 본능이며 천성이지 않은가. 사랑으로 결속된 가정에서의 첫 체험은 이렇게 공감에서 출발한다. 가정에서의 공감으로 소통하지 못하고서 어찌 사회의 공감과 소통을 기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가족끼리 공감하지 못하고 남을 공감시킬 수는 절대 없다. 그리고 공감은 예의로서 표출된다.

 

20여 년 동안 유치원에서 만난 아이들을 돌이켜보면 가장 떠오르는 제자는 역시 공감을 깊이 나누었고 이런 제자의 부모도 대체로 기억에 오래 남는다. 부모에게서 익힌 예의는 아이들이 처음으로 마주치는 사회인 어린이집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공감대는 부모·학생·선생 간의 삼위일체로 이루어진다.

“나에게 이렇게 찾아오듯이 다른 선생에게도 그러니?”

 

거의 15년째 스승의 날이면 잊지 않고 찾아주는 제자가 있다. 특별한 대접을 기대해서가 아니다. 존경한다는 그의 마음이 한정되거나 편협하지 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의 엄마는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던 삼년 동안 한 해 교육이 끝나면 손수 뜬 수예품을 선물해왔다. 손장갑이나 털토씨, 졸업 때는 조끼를 선생들에게 선물했다. 흐뭇한 마음에 흔쾌히 받았다. 전혀 뇌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꼭 편지를 동봉했는데, ‘감사함을 이것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지고 있는 이 편지들은 스승의 날, 제자가 찾아오고 난 뒤 집에 돌아오면 꼭 다시 꺼내보곤 한다.

“찾아오는 걸 불편해하시는 선생님도 계세요.”

 

부모가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고마움은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 우러나올 때 그 순수함도 겉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일, 어디에서 배우게 될까. 당연히 그의 부모다. ‘보이지 않는 교육’은 바로 부모의 언행이다. 고마움과 감사함은 그 목적이 없기에 이 감정은 현재와 미래까지도 강력히 견인하는 소명의식의 자극제가 되어준다. 어엿한 대학생이 된 제자는 군대 가기 전에도 찾아왔다. 몸이 여윈 편이었는데 UDT에 지원해 다행히 합격했다며 입대 전 보통의 젊은이 같지 않게 활짝 웃고 있었다.

 

“제가 겁도 많고 사내답지 못해서요. 어차피 2년 나라를 위해 의무를 해야 하는 시간인데 제게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원했는데 운 좋게 됐네요. 경쟁률이 꽤 높아서 떨어질 줄 알았거든요.”

 

문득 한 연예인이 해병대에 입대했다 하여 일시적으로 해병대 지원이 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어 물었다.

 

“그 연예인 영향은 아니고?”

 

‘텔레비전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으로 특히 젊은이들에게 나타나는 이기주의와 태만 등의 유행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토머스 리코나)

 

“저 어린애 아니에요. 선생님께선 저를 아직도 만날 울기만 했던 울보유치원생으로만 기억하시나 봐요. 이젠 아닌데...”

 

교육은 졸업하는 날로 끝내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주고받는 교육으로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이 제자는 중학교 때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의 형제들로 집안이 매일 시끄러웠다. 상속 받은 재산이 문제가 되었다. 부모는 자식들을 돌 볼 겨를도 없을 정도로 친척들에게 휘둘렸고 그 사이 착실하게만 자라왔던 아들은 제 방에 갇혀 지내며 그림을 그리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으면서 집안의 시끄러움을 피하려했다. 혼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늘면서 우울증은 더 심해져갔다.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말이 끝내 부모의 이혼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당신 형제들로 인해 우리 아이들까지 망치고 있다. 다 소용없으니 난 우리애들만 데리고 이 집을 나가겠다.”

 

이때쯤 처음 찾아온 제자는 이오덕 선생님의 글을 읽고 옛 스승을 찾게 됐다고 한다.

 

인연

 

‘이렇게 보잘 것 없이 살고 있는 내가 옛날 선생님을 어떻게 찾아갈 수 있겠나, 하고 주저한다면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이 바쁜 세상에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그저 내 멋대로 해보는 생각이지.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 이러는가. 부끄럽다. 다만 지난날에 어떤 인연을 맺었던 사람으로서, 이 쓸쓸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다시 만나 서로 마음을 주고받고, 그리운 고향 이야기라도 하고 싶을 뿐이다.’

 

전보다 더 말라있던 제자는 행동마저도 달랐다. 안절부절. 저녁을 함께 하고 헤어진 후 며칠 뒤에는 그의 엄마를 만났다. 자살까지 하려고 약까지 구입한 적이 있었다는 아들의 얘기를 듣던 엄마는 식당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제자에게 그랬듯이, 엄마에게도 오래 전 엄마가 보내온 편지들과 털장갑, 그리고 아들의 옛 공책을 내보였다.

 

과거

 

과거는 지나쳐버린 시간만은 아니다. 엄마는 내내 자기 손에서 오래 벗어나있던 자기와 아들의 옛 것들을 만지작거리면서 눈물을 흘렸고 헤어지면서 아들과 함께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 땐 아빠도 함께 왔다. 처음 보는 제자의 아빠다. 짧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제자는 전과 다른 표정을 지었다.

 

“옛 제자가 찾아와주는 것만으로도 전 고맙고 감사하지. 또 언제라도 날 찾아준다면 선생은 그저 기쁠 뿐이란다. 오히려 힘들 때 찾아오면 더 좋을 거야.”

 

제자는 편지를 보내왔다. 글보다는 그림이 더 많은 편지의 끝엔, ‘사랑할 수 있는 선생님이 계셔서 저는 정말 큰 힘이 됩니다.’ 자살까지 생각했다던 제자가 훈련이 험하기로 자자한 UDT에서 군 생활을 시작한다니 걱정보다는 오히려 선생의 가슴은 뿌듯하다.

 

인성교육자 토머스 리코나는 또 이런 말로 사회를 우려하며 경고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것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심각한 윤리적 실패라 할 수 있다.’

 

그는 존경과 책임감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학교로만은 역부족인 게 현실이다. 학교보다는 가정에서 우선 존중과 책임을 몸으로 체득하게 해야 한다. 자식 앞에서의 부모의 언행이 가정교육의 전부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다. 언행불일치한 행동을 우리는 자식 앞에서 얼마나 자행하고 있는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어불성설을 우리의 아이들이 누구에게서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지 참으로 곱씹고 또 곱씹어 볼 일이다. 정의를 입으론 말하며 행동은 그와 반대로 하고, 바른 마음을 누누이 말하면서도 부모의 행실을 보면 어린 눈으로 봐도 그와 같진 않다.

 

모순과 이율배반을 처음 접하게 되는 곳이 가정이라면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은 거짓을 부모로부터 처음 배우게 될 수도 있다. 이는 평생 이어지는, 고쳐지지 않는 진짜 평생교육이다. 그릇된 평생교육은 삶을 그르치게 하고 만다. 바꾸기 결코 쉽지 않기에 이것이 우리 사회를 흔들어 놓는 그 시발점이 된다. 이러한 가정교육은 당연히 사회를 혼란시키고 혼돈의 세계로 빠져들게 할 것이다.

 

소통부재, 불통의 사회는 누가 만들었을까.

 

소통부재의 사회는 불만족스럽고 불평 많은 사회 속의 나, 나를 괴롭히는 사회일 뿐이다. 오로지 나만의 이기적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나를 위해서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소통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이기주의로 다들 편한 세상, 소통의 사회를 만들어 나아갈 수 있건만.

‘소통을 거부한다는 말은 나를 나 자신에게 드러내 보일 모든 기회를 내 스스로 저버린다는 뜻이다.’(야스퍼스)

 

<어른 먼저>

 

아이들은 소홀히 듣는 게 없다. 흘겨보지도 않는다. 뭐든지 새롭고 궁금하다. 궁금하니 보게 되고 듣게 되고 묻게 된다. 아이들은 이렇게 알고 싶은 게 많다.

 

“오늘은 아빠가 바래다주셨니?”

 

여섯 살 진하가 이 말을 듣고,

 

“데려다주지 왜 바래다줘요?”

 

묻는다. 진하는 부모나 다른 어른으로부터 ‘데려다준다’는 말만 들었던 게다. 어린 꼬마의 질문에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다.

 

‘바래다주다’나 ‘데려다주다’나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미지로 떠올려보면 의미가 약간 다르게 느껴진다. ‘바래다주다’에서 더 정겨운 모습이 보인다.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장면이 연상돼서다. ‘데려다주다’ 역시 비슷하지만 이 말에선 자동차가 먼저 떠오른다. 손잡은 정경의 ‘바래다주다’란 말이 더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유별난 느낌일까. 그래서 ‘데려다주다’란 말 대신 ‘바래다주다’라는 말을 더 의식적으로 써왔을 것이다.

 

말(언어) 속에는 생각뿐만이 아니라 사상(철학)도 들어있다는 말을 한 꼬마의 질문에서 다시 새기게 된다. 듣고 보고 맡고 느끼는 것, 모든 오감을 총동원해 감정이 민감하고 감성이 풍부한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둔감하게 반응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아이들의 감성키높이에 맞추지 못하는 어른들의 어긋난 행위가 된다. 어린이와 키높이 맞추기는 단지 키를 낮추거나 목소리를 어린애소리로 바꾸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건 형식에 불과할 수 있다. 겉으로만 하는 것을 아이들은 다 감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른들만 모른다. 모든 아이들은 예술성에서도 어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천재성을 갖고 태어난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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