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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부모인문학(15) ... 인내

인내

 

‘세월이란 것은 화살같이 달리니, 늙음은 곧 찾아오겠지요. 성공은 이루지 못하고 나이만 먹으니 서글픈 생각이 절로 듭니다.’(유비)

 

나이 50의 유비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살다보니 허벅지살이 붙어 한탄했다는 비육지탄이다. 이 탄식을 듣고 집안의 형뻘 되는 유표가,
“다 때가 있을 것일세.”
했고, 유비는 그 후 기나긴 기다림의 시기를 지나 제갈공명과 인연을 맺으며 촉한왕조를 세운다.

 

 

준비된 기다림

 

‘모든 것은 기다리는 동안 무엇이라도 하는 사람에게로 온다.’(에디슨)

 

막연히 기다리지만 말고 뭐라도 해야 한다고 함은 준비된 기다림이다. 기회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것은 단지 참아내는 것이 아니다.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기만 하는 침묵도 아니다. 기다림에도 움직임이 있다. 정중동의 기다림. 기다림은 침묵 같아 보이지만 내 가슴에 대고 하는 가장 강렬한 외침이다. 이래서 망설임과는 다르다.

 

‘만일 우리가 진실로 행복하다면 인생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불행한 단 한 가지 원인은, 조용히 앉아 있는 시간 또는 그 방법을 모르는 데에 있다.’(파스칼)

 

때로는 아이들에게도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부모가 다 해주려고 한다면 세상을 살면서 꼭 필요할 기다림과 인내를 익히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빨리빨리’ 조급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주변 상황에 휘둘려 살게 될 것이다. 이 조급병은 남과 비교하게 만들고 이럼으로서 불안해하며 결국 포기하거나 체념 또는 타협하며 현실에 급급한 삶을 살게 한다. 남보다 좀 낫다하더라도 자만이나 오만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이것은 쫓기는 삶이자 끌려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시간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게 삶이라 하거늘, 쫓기는 삶·끌려가는 삶은 내 삶이 될 수 없다.

 

촛불타임

 

엄마는 집에서 뿐만 아니라 어린이집에서도 촛불타임을 종종 갖곤 한다. 대낮이라도 창문의 커튼을 다 치고 방 안에는 촛불만 켜놓는다. 그리고 깜빡거리는 촛불을 바라보게 하고 눈을 감게도 한다. 아이들은 이채로운 분위기에 좋아하지만 굳이 얘기하지 않았으니 그 의미를 모른다. 하지만 모르는 가운데 몸이 받아들이며 몸이 먼저 이해한다. 잠시라도 쉬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어린 아이들은 처음에는 답답해한다. 그러나 명상이란 단어를 결코 한 번도 쓰지 않아도 명상을 스스로 하게 된다. 유행을 타고 있는 프로그램의 틀에 박힌 명상은 진정한 명상이 아니다. 가만히 내버려뒀을 때 아이들은 촛불에 집중했던 눈을 자신에게로 집중하게 된다.

집에선 자식이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서, 촛불에 음악이 보태지고 촛불 불빛 속에서 잠깐의 대화시간도 갖는다. 세상을 다 지우는 어둠은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훤한 곳에서 상대의 눈을 보고 하는 대화와는 달리 캄캄한 곳에서의 대화는 상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더 몰입하게 한다. 자기에게 솔직해지고 자신에게 진솔해지게 하는 차분한 분위기는 마음 속으로 깊이 전달된다. 말의 속도는 늦추어지고 음악의 쉼표처럼 말을 잠시 멈추게 한다. 촛불어둠이 서두르기보다는 느긋하라고 이끌어준다. 느슨하게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준다. 불안감보다 안정감을 심어준다. 촛불어둠에서는 여유로움이 아주 자연스럽게 찾아든다. 사위는 조요하지만 가슴은 더 뜨거워짐을 느낀다. 자신을 불태우면서 주변을 숙연케 하는 촛불을 닮아간다.

사람 사는 곳에선 화가 나는 일은 하루에도 여러 번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촛불타임을 갖는다. ‘조용히 앉아있는 법을 모른다’던 파스칼의 지적을 넘어서 촛불로써 극복하고 기다림의 미학으로 승화시킨다. 결코 정지상태가 아닌 정중동의 흐름인 기다림은 서두름의 폐해도 막아줄 수 있다. 화를 누른다. 기다림, 즉 인내는 사유를 동반한다. 시간을 머물게 해주면서 동시에 정신의 엔진을 돌린다.

 

‘그대의 작은 생각을 밀고나가라. 끝에는 분명히 진주가 있다.’(베글르리)

 

작은 생각으로 기다릴 줄 아는 여유는 추진력이 되어주고 다져진 인내는 추동력으로 발산한다. 몸에 익히는 것, 이것을 습관이라고 한다. 이래서 인내하는 습관길들이기는 어렸을 때 더욱 필요하다.

 

‘몸으로 가르치는 게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낫고’(중국 속담)

 

그러나 모든 것이 지나치면 아니 한 것만 같다고 했듯이, 인내도 도를 넘으면 주저하게 하고 분별없이 양보만 하고 끝내 주저주저 겁쟁이로 만들 수 있다. 여기에 부모역할이 필요하다.

 

‘위의 대들보가 바르지 않으면 아래에 있는 것도 바를 수가 없다.’(중국속담)

 

부모는 아이들로 인해 바뀔 수도 있다. 성급하고 즉흥적이던 부모의 버릇이 아이들 앞에선 돌아가는 기다림의 지혜로 순화되기도 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의 속담은 부모버릇이 자식에게 그대로 옮겨진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기에, 부모는 자식 앞에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고 이럼으로써 부모 역시 아이들로 인해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건강을 자식으로부터 받는다. 자식으로도 부모가 변한다. 자식으로도 부모는 꿈을 꾼다. 자식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절대!

 

 

포커페이스

 

‘아이들 보기에 부끄러워...’
흔히 하는 말 속에서 소망스러운 사회개혁의 단초를 본다.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말이다. 부끄러움은 자각의 동기이며 건전한 모든 변화의 시초가 된다. 부모도 부족한 게 많은 인간이지만, 자식 앞에서는 영웅이요 우상이고자 하려는 속성이 있다. 이것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부모로 만들곤 하는데, 아이들을 그르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커페이스를 한 부모가 의외로 많다. 포커페이스란, 포커를 칠 때 자기 손에 좋은 패가 들어오든 나쁜 패가 들어오든 상대편에게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해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시치미를 떼고 있는 얼굴을 말한다. 자식과 포커를 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자식에게 이겨 돈 뜯어낼 것도 아니면서도 포커페이스를 하고 사는 부모, 특히 그런 아버지가 상당히 많다. 결코 권위가 될 수 없다. 가정이 도박장일 리 있겠는가.
부끄러움은 직설이 아닌 우회의 기다림으로서 생겨나고 선회함으로서 변화를 유도한다.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부모만이 아이들을 온전하게 키워낼 수가 있다. 부끄러움은 감정의 기다림이며 자각의 동기이며 실천의 출발이다.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엄마들 사이에 한 아빠가 눈에 띈다. 버스가 도착하니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각자 제 집으로 흩어졌고 아빠는 딸을 등에 업고 얘기를 나눈다. 유난히 기다린다는 단어가 잦은 그들 부녀의 대화를 엿들어본다.

 

“아빤, 나 없는 사이에 뭐 했어?”
“우리 딸 기다렸지.”
“아무 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만 했단 말야?”
“아빠가 뭘 하면서 우리 딸 기다렸을까요?”
“궁금해. 말해줘!”
“그럼 우리 예쁜 딸은 어린이집에서 뭐 했어?”
“응. 선생님 말씀 잘 들으면서 엄마·아빠 만날 걸 기다렸지. 만나면 아빠 줄려고... 오늘 만든 거 가방에 있어.”
“뭐지? 뭘까?”
“종이 코스모스 꽃이야. 내가 만든 거지만 아빠가 엄마한테 선물해!”
“내가 엄마한테? 엄마가 우리 기다리느라고 심심하겠다. 우리 빨리 걸을까?”
“우리? 아빠만 걷고 있는데?”
“아빠만 빨리 걸으면 되나? 하하”
“나도 내려서 뛸까?”
“아냐. 아빠가 좀 더 힘을 내면 돼. 부웅~~~ 코스모스 꽃을 만들었다고? 그 많은 꽃 중에 왜 코스모스일까?”
“엄마가 코스모스 피는 가을에 병원에서 나온다고 했잖아.”
“엄마 퇴원을 우리 딸이 무척 고대하고 있구나?”
“당연하지 아빠도 참! 나도 가르쳐줬으니까 아빠도 뭐하면서 날 기다렸는지 알려줘야지.”
“그래. 그러지 뭐. 며칠 전에 쿠키 먹고 싶다고 했었지? 아빠가 우리 딸 좋아하는 치즈를 넣어 치즈쿠키를 처음으로 만들어봤는데, 맛이 있을까 걱정되네.”
“무조건 무조건 맛있어. 아빠가 만든 건데 뭐. 엄마 것도 만들었지?”
“그럼. 당근이지!”
“어딨어, 쿠키!”

 

작아지는 기술

 

부녀 그리고 부모의 기다림은 떨어져있어도 함께 하는 시간이 된다. 만남을 전제로 하는 모든 기다림은 이래서 만남의 연속이다. 또 기대하기에 소망의 연장이며 희망의 잉태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기다리는 동안 무언가 하는 사람에게 온다.’던 에디슨의 말은 제대로 맞다. 시간의 낭비를 줄이는 일이 기다림이며 인내로서 시간을 집중하게 하는 것도 기다림이다. 인내는 시간을 단지 참아내는 일이 아니라 미래에 투자하는 시간이다. 기다림은 미래로 가는 간이역이다. 이래서 인내는 외롭지만 따뜻하고 희망적이다. 시골의 여느 간이역처럼. 크고 넓지 않아 작지만 가슴에 더 깊이 찡한 느낌을 주던 그 간이역.

 

‘작아질 수 있다는 것, 화초나 어린이와 가까워지려면 그들의 키만큼 작아져야 한다. 모든 선한 것에 관계하고 싶은 자는 때로는 작아지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니체)

 

기다림도 작아지는 기술일 수 있다. 기다림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자식이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의 소망은 모두 기다림의 시간이다. 부모가 기다려주면 우리의 아이들은 제대로 자란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 기다려야한다. 부모의 인내심에 비례하여 아이의 미래도 따라서 더 희망적일 수 있고 더 크게 키울 수가 있다. 부모의 인내심은 아이들을 비로소 어른이 되게 하는 물이요 비료다. 부모의 작아지는 기술로 자식을 더 크게 키울 수가 있다.

부모가 아이의 키에 맞추는 것, 바로 어른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기다림이다. 부모의 기다림으로 아이는 기다림의 소중함을 몸으로 익힌다. 부모가 기다리고 있는 간이역으로 아이가 달려오고 있다. 이 정겨운 풍경을 상상해보자.

 

<친구부터>

 

일곱 살의 두 어린이로부터 그림편지를 받았다.
“정민이가 그리는 것을 보고 따라 했어요.”
서영이가 먼저, 조금 후 주저주저하던 정민이가 꼬깃꼬깃 접은 쪽지 종이를 내놓는다.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예요.”
편지 속의 그림은 나를 그른 듯한 사람의 형상이었고 글은 짧았다. 아직 글을 거의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선생님 사랑해요’
고맙다는 말일 것이다. 무엇이 고맙다는 걸까? 이 아이들에게 내가 해준 것이라곤 함께 놀아준 것밖에 없는데... 무엇보다도 자발적으로 편지를 쓰려 하고 줄 생각을 했다니 기특해서 내가 더 고맙다. 집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정민이가,
“선생님을 그려볼까?”
했단다. 아이들은 곧잘 잊어버리는 줄만 알고 있었는데 집에서도 떠올려지는 선생이라니... 이 또한 얼마나 고마운가. 이래서 행복감으로 가슴이 따뜻해져온다.
“나도.”
서영이가 따라 했단다. 그즈음 글씨를 하나둘씩 배워가고 있었다. 평소 수줍음이 많고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여려 기대어오는 버릇이 있는 정민이가 그림 위에 글씨를 쓰고 나더니,
“내일 선생님한테 줄 거야.”
편지를 접어서 우표까지 그려놓았다. 봉투가 된 겉종이에는 ‘목공 선생님’이라고 수신자 이름까지 적었으니 격식을 다 갖춘 편지가 되었다. 서영이도 그대로 따라했지만 엄마에게 가르쳐달라고 해서 한 문장을 더 하나 붙였단다.
“놀아줘서 고마워요.”
오늘, 최고의 편지를 받았다고 다른 선생들에게 자랑하면서,
“어떻게 편지를 쓸 생각을 했을까요?”
했더니 한 선생의 말,

 

“배운 것을 흉내 내서 꼭 해보고 싶은 게 어린아이잖아요. 며칠 전 학부모들한테 편지를 부친 적이 있었지요? 우표가 붙은 편지는 아이들이 처음 보았을 겁니다. 더욱이 우표는 자기들 사진으로 우체국에 주문해 만든 우표잖아요. 이것이 아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을 겁니다. 선생님의 편지가 이미지로 가슴에 새겨진 것이지요. 추상적인 글보다도 구체적인 이미지로 아이들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니까요. 어때요? 아이들이 참으로 귀엽지 않나요? 정말 사랑스럽지요?”

매일 만나는 아이들이지만 종종 편지를, 그것도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앞에서 마주 보고 나누는 대화도 좋지만 편지를 쓰고 우표를 사서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 일련의 시간들은 바로 기다림으로 대화와는 또 다른 소통이다. ‘우표 붙인 편지 보내기’는, 이리도 바쁘기만 하고 빠르기만 한 지금 세상에 아이들에게 기다림을 가르치는 아주 좋은 방법이란 생각도 든다.

 

기다림은 소망이며 꿈의 시작이지 않을까.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가끔은 편지로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은 이런 부모에게 답장을 꼭 보내올 것이기에. 이만한, 이보다 더 나은 감성수업은 없을 것 같다. <15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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