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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22)

14 규범의 출근 발길은 언제나 무거웠다. 검찰청 정문을 지나면서 매일 받는 수위의 예우로부터 자신의 왕국에 발을 들여놓는 듯해 보이지만 속 다른 겉의 허위는 허세로서 감춰질 뿐이다. 허세는 부리는 그 자신이 더 잘 안다. 그 앞에서 모두가 굽실거렸다. 범죄자는 물론이거니와 그 가족도, 사무실 직원이나 경찰들도 그의 말 한 마디로 그들의 감정까지 지배했다. 나이도 문규범이 가장 어렸다. 분에 넘치는 대접은 대체로 부담보다는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권한이며 위세가 되었다.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왜 여기에 사인을 해야 합니까?”

 

“당신이 지금 기자로 여기 들어와 있는 줄 알아? 경찰한테 보고 다 들었는데 죄질이 아주 나쁘구만. 장인을 패고 임신한 처형을 유산시키고도 끝까지 부인을 했다며?”

 

“안 했으니까요. 왜 내가 여기 수갑과 포승에 묶여 끌려왔는지 나도 모릅니다.”

 

“허허. 경찰이 말한 그대로구만. 당신이 한 짓은 법 이전에 천륜을 거스른 못된 짓이란 걸 모르나? 이건 <사실과 실화>에 나올 감이야. 그 잡지에 제보해야겠구만. 내가 그 잡지에 아는 기자가 몇 있는데 아주 좋아할 거야.”

 

“그게 계장님의 권한이라면 내가 무엇으로 막겠습니까. 하지만 없는 사실을 한 듯 계장님이나 경찰이 임의대로 작성한 조서에는 사인을 할 순 없습니다.”

 

“너희 기자들, 밥맛없는 것들이었는데 이번에 당신을 한 번 제대로 욕보여주겠어. 당신, 기자라는 것들, 이번에 혼 좀 나보라고.”

 

“내 개인의 일을 기자 전체의 일인 양 비약하지 말아주십시오. 기자들이 팩트 갖고 기사를 쓰듯이, 검찰 역시 사실, 물증이라고 하나요? 그 사실에 입각해 조사하든 수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계장님이 타자 쳐놓은 조서는 완전히 시나리오입니다. 아닙니다. 안 했습니다. 장인을 팬 게 아니라 장인과 장모에게 목이 잡혀 내가 그 집에서 끌려 내보내졌습니다. 처형과의 전화 통화는 한 번 했습니다. 우리 부부의 사정을 솔직히 얘기하고 처형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제가 전화했습니다. 여동생인 내 아내에 대해 얘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내 말을 듣기는커녕 화부터 내더군요. 그래서 바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도움이 필요 없을 것 같아섭니다. 그게 통화내용의 전부입니다. 그 전화 후 심장이 떨리고 유산할 뻔했다며 서초경찰서에 처형도 나를 고발했다는 사실을 경찰서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장인이 첨부한 의사의 진단서를 경찰서에서 엿보고 내 동생을 시켜 확인했습니다. 의사가 그랬다더군요. 처음 왔을 땐 목에 상처가 미비해서 진단서를 끊어주지 않았답니다. 다시 찾아왔을 땐 상처가 처음과 달리 컸는데 사위인 내가 또 목을 잡고 장인을 죽인다고 했다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장인이 의사에게 ‘사위도 자식이니 나쁜 손버릇을 고쳐주고 싶으니’ 하며 진단서 발급을 사정했다고 합니다. 난 장인과 장모에게 쫓겨나고 내 아들은 처갓집에 둔 채로 나와 그 다음 더 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또 내가 가서 상해를 입혔다고 했답니다. 의사는 상처가 전보다 깊었고 두 번이나 이런 일을 사위가 저질렀다던 장인의 말을 그대로...”

 

“기자라서 말이 많구만. 내가 더 들을 얘기는 못 되고, 그런 건 이미 경찰에게서 보고 다 받았단 말이오. 일단 여기 조서에 사인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 최소한 정상참작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니 잘 판단해서 하시오.”

 

“정상참작이라니요? 그래, 제가 검찰이 시키는 대로 일단, 그래요, 일단 사인을 할까요? 그러나 법원에선...”

 

 

 

 


“어쭈. 협박까지? 기자본성을 드러내는군. 이게 감히 어데 와서 협박에 공갈이야? 너 한 번 제대로 죽고 싶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개잡놈들.”

 

“검찰이 사람을 죽이는 곳입니까? 그리고 기자들 전체를 싸잡지 말아주실 것을 정중히 요청합니다.”

 

문규범 검사는 취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안쪽 검사방에서 주의 깊게 엿듣고 있었다. 비록 사적인 일로 구속된 자이지만 그의 직업이 중앙유력지 기자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피의자가 부인하고 있다지만 올라온 경찰의 조서에 따르면 정황은 조서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이 기회에 기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지요.”

 

아침에 전 계장의 보고를 받고 문 검사는 지시를 내렸다.

 

“원칙대로 취조하시오.”

 

이 원칙이란 윗선에서 내려올 상의하달을 의식한 정당한 방어책과 같은 것이다. 정당하기보다는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말이다. 정년이 가까운 노수사관인 전 계장은 말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빼도 박도 못 하게 옭아매겠습니다.”

 

방 안에서 들어보니 의외로 중앙지 기자 신분의 피의자는 흐트러짐 없이 깍듯하나 목소리는 떠는 듯이 들려왔다. <사실과 실화>라는 옐로폭로잡지를 들먹거리는 전 계장의 말에 문 검사의 눈이 찌푸려졌다. 동시에 검찰이 사람을 죽이는 곳이냐고 따져대는 피의자에게도 눈살이 올라갔다.

 

“뭐가 잘 못 됐소?”

 

문 검사가 안쪽 검사방에서 나오면서 계장에게 물었다.

 

“예상대롭니다. 사인을 안 하겠다는데요.”

 

50대 중반의 계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30대 초반의 검사에게 정중하게 보고했다. 문 검사도 이미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눈치며 조서 또한 그 내용대로 서술되었으리라고 짐작했다.

 

“어떤 점에 이의가 있다는 겁니까?”

 

피의자에게 물었다.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피의자가 검사에게 인사를 하며,

 

“내 인적사항 외에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그 반대입니다.”

 

검사가 기자를 쳐다보았다. 여느 기자들처럼 되바라져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경찰에서는 왜 인정했지요?”

 

기자가 검사를 쳐다보았다. 여느 검사처럼 빤질거리듯 생겨 먹지는 않았군, 속으로 생각하며,

 

“인정이라니요. 안 했습니다. 일방적이었습니다. 서초경찰서의 다른 형사가 내게 다가와 이러더군요. 억울하겠습니다 라고. 왜 이 말을 상관없는 다른 반 형사가 굳이 내게로 와서 이런 말을 하고 갔는지 지금도 궁금합니다. 내 판단으로는...”

 

“아니, 됐습니다. 피의자가 더 할 말이 아닙니다. 내 방으로 들여보내지.”

 

검사가 피의자를 소파에 앉혔다.

 

“물증도 없이 경찰이 조서를 올리고 검찰이 판단도 없이 구속시킬 만큼 허술하다고 생각합니까?”

 

“물증이라는 것은 진단서와 고소인의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고소인은 나의 장인이며 처형입니다. 장인을 상해했으니 존속상해죄에 해당될 것이고 자식보다는 부모의 말을 더 믿어주는 게 아직 우리 사회이니까요. 하지만 아까 밖에서 말하려 했듯이 법과는 무관하게, 아니죠, 법을 앞세우면서 법을 능욕하는 모략이 있음을 눈치챘습니다. 피의자로서 이런 말을 하기엔 지금으로서는 이르지만 군 보안대 중령 출신인 장인이 경찰을 매수한 듯 보입니다. 경찰은 매수를 당했고요. 이는 내가 감옥 안에서든 나가서든 꼭 밝혀내고야 말 것입니다. 우선 의사의 진단서부터요.”

 

검사가 일부러 크게 깔깔깔 웃어댔다.

 

“당신이 지금 기자인 줄 아시오? 한 번 눈을 깔고 내려다보시오. 수갑이 안 보입니까? 수갑의 의미가 뭐라 생각하오? 기자 양반.”

 

“손을 묶었지 입을 막은 것은 아니지요.”

 

이 때였다. 밖에서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등등한 누군가의 행동이 벽 안에서 느껴졌다.

 

“문 검사, 안에 있습니까?”

 

제지도 받지 않고 검사방 안으로 들어온 그가 소파에 초라하게 앉아 있는 피의자와 눈이 마주쳤다.

 

“너, 여기 왜 있는 거야? 경찰서에서 해결했어야지?”

 

문 검사와 신문사의 차장은 전부터 아는 사이 같았다.

 

“이 차장, 취재 건도 아니고 이거 너무 한 거 아니오?”

 

이 차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편해도 며칠만 참아. 너도 참 허술하다. 진작 얘기했어야지.”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 하지만 순전히 내 개인 일인 데다가 죄 될 일은 안 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차장이 문 검사를 돌아보았다.

 

“검찰이 무턱대고 기자 손에 수갑을 채웠을라고. 네가 뭔가 잘못은 있었으니... 아무튼 내가 힘쓸 테니까 수양한다 생각하고 맘 편히 있어. 서울구치소장에게도 다 얘기해뒀으니까.”

 

“이 선배,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러는 게 더 이상하고 내가 불편합니다. 내 일이니 내가 풀어야지요.”

 

“여전하군. 그러니까 이 생고생이지. 이번 일로 보니 편집국 안에서 박 기자에 대해서 두 패로 나뉘더군. 의외로 적이 많아. 박 기자가 너무 잘 났다는 거야. 그러다가 그 꼴 난 거라고 하며.”

 

“그것과 이번 일과는 다르지요. 암튼 이 선배나 회사에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이번 기회에 기자라는 직업도 벗어던지고 싶네요.”

 

“이 사람아. 자네 팬도 많아. 특히 후배들이 많이 따르더군 그래. 죄송하다면 나와서 열심히 우리 신문사를 위해서 기사로서 보답하라구. 난 이제 가 보겠네. 힘들어도 며칠만 참아.”

 

듣고 있는 문 검사는 이 말이 무척 거슬렸다.

 

‘며칠만? 누구 맘대로.’

 

이 차장은 문 검사에게 속삭이며 검사방을 나갔다.

 

“진급심사에 들어갔다더군. 문 검사도 명단에 들어있던데.”

 

이런 것이 싫었다. 외압과의 적절한 관계유지를 처세술에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곳이 법조계다. 적절한 관계란 원만한 대인관계로 보이지만 사실은 절대 그 반대다. 적절한 관계만큼 부적절한 관계는 없다. 타협은 절대적으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타의의 강압에 의한 굴종에 불과하다. 기자의 행태를 보며 검사의 세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굴종함으로서 출세할 수 있다는 게 처세의 방편이자 당위가 된 사회가 남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법조계이다. 문규범은 허세에 가려진 허위의 왕국에 점점 안주해가는 것은 아닌가, 부정하면서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검사로서의 경력이 쌓이면서 고민도 늘었다.

 

서초구 서래마을에 자주 드나들었다. 중년에 접어든 여자가 경영하는 자그마한 카페다. 술도 늘었다. 글.그림=오동명/ 13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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