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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13)

24 법대 동기들에게 자존심을 구기기 싫어 동문회에도 나가지 않던 엄마는 자식 앞에선 여느 엄마와 다를 바 없었다. 법대 동창회는 타 대학과 다른 데가 있다. 판검사·변호사 그리고 법대 교수가 된 동문들만 나오기에 너도나도 다 학생이었던 옛 학창시절을 기대하며 참석한 비법조인 동창생은 하나둘씩 자동적으로 떨어져나갔다. 소외는 집단의식의 산물이지 결코 개인의 감정이 될 수 없다. 법대 학번은 무시됐다. 사시·사법연수원 기수를 더 따져대는 이상한 대학 동창회의 성격은 우정의 친목도모라기보다는 권력지향·실세과시의 이익집단처럼 보였다. 동문주소록에는 기업체 대표나 언론사 간부·기자들이 간간이 눈에 띌 뿐 온통 법조인으로 채워져 있다. 법조인 주소록 같았다.

 

이십여 년 만에 만나는 대학동창은 공직으로는 부장검사를 끝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지 몇 달 되지 않았다. 아직 전관예우 기간임을 알고 있는 엄마는 많은 법조인 동창들 중 이 친구를 골랐다. 교수를 간첩으로 몰아 사형도 불사한 독재정권을 경험했고 사람만 바뀌었을 뿐 후진적이고 탈민주적 정치형태는 바뀌지 않았다고 보는 엄마이기에 몰염치에 의한 비합법이 정의로 버젓하게 행해지는 뻔뻔한 사회의 희생양으로 아들을 내놓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런 나라라지만 우리 규범이 만한 모범 엘리트학생을 어떻게야 하겠어? 더구나 시위대에 휩쓸리기는커녕 도서관에서 책만 파는 아인데 뭐. 걱정 마!”

 

사람 좋은 아빠는 매사 철저한 엄마로부터 여지없이 핀잔을 듣는다.

 

“당신도 아나? 서울대의 그 교수와 학생들이 간첩이라서 죽임을 당한 줄 알아? 형량은 법이 내리지만 그 운용은 인간이 한다고. 법이 정치의 시녀가 된 걸 당신이 몰라서 지금 그런 말 하는 거야? 규범이가 경찰에 대들었다잖아. 사법시험 공부하고 나오는 길이라고 고분고분 대답하면 이런 탈은 없을 텐데 연애도 못하는 나라냐고 따져들었다니... 그 녀석이 정신이 나가도 어떻게. 이번에 완전 무혐의로 나오지 않으면 안 돼. 규범이가 사법시험에 붙어도 그 꼬리는 늘 따라다닐 테니까. 연좌제? 법으론 없어졌을 진 몰라도 여전히 누구에게는 이 나라를 지배하는 힘이며 고삐지만 누구에게는 속박당하는 굴욕이며 코뚜레라는 것, 전라도 출신인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아무튼 조선우표는 뭐고 쿠바·소련 우표는 다 뭐냐고? 설마 그거, 당신이 사준 우표... 잖아?”

 

아빠도 겁이 덜컥 들어 움찔했다.

 

 

“우표 살 때 나라를 보고 고르나? 난 자동차 우표라서 산 거라구. 아이 수준에 맞게. 그러니 어느 나라 우표인지 내가 알 턱이 있나.”

 

엄마는 양미간을 좁히며 짜증스럽게 버럭 화를 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에 담길 내용 따위는 무시하고 그리나? 그저 시각적으로 예쁘거나 곱거나 아름다우면 다 그림이 되는 거야?”

 

엄마는 정치가 그림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다 미쳤어. 상식이 실종되었다고. 양심은 폐기되었고. 언제 또 소련 소설에 관심이 있었던 거야? 그 녀석이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 딴청이나 부리고... 고시는 언제 패스하려고 그 멍청한 짓을...”

 

엄마는 이러면서도 감방에 있는 아들이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노심초사했다.

 

인간은 경계적 동물이다. 유별난 경계심이 두뇌를 발전시켰다. 눈치에 밥을 덧붙여 사용하는 인간은 경계를 생존과 직결시켰다. 머리를 써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의구심도 의심도 다 경계용어로, 그 행동은 용기나 슬기보다는 아부나 야비로 발달시켰다. 인간의 본성은 부정에 있다. 사소롭고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일에도 침소봉대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본능이다. 이래서 악랄해지고 이래서 치졸해졌다. 인간은 인간을 지배할 목적으로 이 인간의 본능인 경계의 확대해석을 역으로 악용해왔다. 협박이고 공갈이다. 괘씸을 죄로 둔갑시키는 마술사 인간은 뒤집어씌우는 능력으로 발휘했다.

 

엄마는 오빠가 절대 데모 따위에는 얼씬도 안 했다고 믿었지만 경찰과 검찰의,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식 자기편의식 막무가내 법집행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 앞에 엄마는 더 소심했다. 취미로 모은 우표가 증거물이 되고 교양으로 읽는 소설도 증거물이 되는 것이 이 나라의 법이지 않은가? 영감소릴 이십 대에 듣고 말 거야 했던 전관예우 기간 내의 변호사는 법으로도 속수무책이었다.

 

“다행이지. 네 아들이 운이 좋았어. 담당 검사가 대학 후배더구나.”

 

시국사건이 다 그러했듯이 재판은 속성과정으로 진행되었다. 동창변호사는 재판관 앞에서 변호해야 할 법적 임무에는 충실하지 않았고 성의도 없었다.

 

“다 손 써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소연아. 여전하구나, 예쁜 건.”

 

법조인의 입은 법 얘기보다는 뒷골목 룸살롱에서 양복 잘 빼입은 조폭쓰레기들에게서나 들을 수 있을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었다. 뒤에서 손 써놨기에 앞에서 할 일이 없다는 건지, 대학 때나 다름없이 소심하면서도 얄기죽대는 표정으로 변호사는 피고인 오빠에게 물었다.

 

“검사의 질문에 소련·동구권 소설전집을 직접 샀다고 했는데 총 몇 권짜리인가요?”

 

“스물네 권입니다.”

 

“그 분량이 매우 많겠군요. 다 읽었나요?”

 

변호사 접견 때 사놓았을 뿐 전혀 한 줄도 읽지 않았다고 대답하라던 변호사의 주문을 기억하고 오빠는 머뭇거렸지만 대답을 회피하려해서가 아니라 셈을 하느라 시간을 더듬었다.

 

“거의 두 번씩은 읽었습니다.”

 

오른쪽 입술 끝이 약간 올라가서 남을 비웃는 듯해 보였던 변호사는 나이가 들면서 거만끼로 변했다며 방청석의 엄마는 세월의 흐름을 한 대학동창의 얼굴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읽었습니까 아님 여러 명하고 모여 읽었습니까?”

 

오빠는 변호사 대신 세 명의 재판장 중 오른쪽 판사를 쳐다보았다. 여 판사였고 전에 인사도 나눴던 대학 선배였다. 그녀가 피고인의 얼굴을 피했다.

 

“문학을 남과 같이 그것도 모여 읽는 사람도 있나요?”

 

오빠는 이내 검사를 쳐다보았다. 허리를 곧추세우며 웃고 있었다. 변호사는 비우호적인 의뢰인이 마땅치 않아 눈가를 찡그리며,

 

“두 번씩이나 읽었다면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묘사가 많을 것이다. 특히 기억나는 대목이 있는가?”

 

질문지를 사전에 확보해 훔쳐본 사람처럼, 미리 답안지를 써놓은 사람처럼 오빠는 줄줄 말을 늘어놓았다.

 

“따뜻한 오줌이 얼굴에 닿자 얼음으로 변해 눈썹과 코와 턱 아래로 고드름이 얼어붙었다는 구절은 수십 번도 더 읽었습니다. 따뜻함이 따가웠다고 했습니다. 에더라고 썼습니다. 얼굴이 햇볕에 탄 진흙 같이 갈라지더라고 했습니다. 물을 부었는데 타들어가는 땅처럼 갈라진 얼굴을 변호사 님은 상상이 되시는지요?”

 

“누가 싼 오줌인가요?”

 

변호사가 물었을 때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이요. 인간이 사람의 얼굴에다 대고 쌌습니다. 춥지? 하면서 말입니다. 덥게 해주마, 하면서 말입니다.”

 

검사가 재판과는 무관한 내용이라며 재판장에게 이의를 신청했다. 하지만 재판장은 웃으면서 더 들어봅시다 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몸을 피고인과 방청인 쪽으로 숙였다.

 

"삼청교육대에선 시베리아에서보다도 더 심했다고 합니다. 한국이 구소련보다 더 악랄하다는 거지요. 소련은 이 세상에서 이미 사라졌지만 한국 이 땅에선 이를 자행한 자들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지금도 매우 잘 살고 있습니다. 경찰이 내가 지닌 우표를 보고 나를 빨갱이라고 하며 폭력을 가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이 소련, 그러니까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것으로 보입니까? 남의 나라나 남의 주의 따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해, 우리가 고치거나 수리하지 못한 우리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밤 늦게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나오는 학생을 내 학교 우리 교문에서 붙잡고 왜 늦게 나오느냐고 묻는 게 우리나라 경찰입니다. 머리 지근지근한 법학책을 하루 종내 읽다가 막간 쉬는 시간에 머리를 식힐 겸 보는 우표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게 바로 지금의 우리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조선우표를 법전 속에 숨겼다고 하는데, 보이게 숨기는 게 숨긴 것인지, 그렇게만 몰아가는 우리나라 경찰은 소련의 공안경찰이 인간의 얼굴에 싸댔다는 오줌발보다 더 치욕적입니다. 따갑고 에게 만든 것이 얼음 때문일까요? 인간의 얼굴이 인간에 의해 오줌통이 되게 만든 폭력이 먼 어딘가에 있다가 사라졌지만, 인간의 언어도단으로 인간성을 강제·폭압하는 무식이 이 가까운 데에 있습니다. 표현은커녕 독서의 자유도 없는 나라가 좋은 나라 우리나라 이 나라입니다. 소련·동유럽소설전집은 이 나라 극보수 신문사에서 출판한 책들입니다. 정권의 끄나풀이고자 자처하고 나서는 그 신문사에서 낸 그 책들은 정적을 치기 위해 증거물 확보용으로 펴낸 정언합작 기획상품이었단 말입니까? 입질을 유도하는 미끼로 정치와 언론이 하나 되어 문학을 활용했다는 것입니까? 소설을 문학이 아닌 정치로 탈바꿈시키는 기상천외한 마술을 부려대는 우리나라 검찰의 재주에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하도 대단해 마치 지금 서커스장에 와 있는 기분이 듭니다. 혀를 차게 하고 박장대소하게 하는 서커스걸 검찰이 티브이에 나와서도 다름 아닌 우리나라 국민의 편이라며 매일 저녁 아홉시마다 쇼를 보여줍니다.

 

검사가 제재를 다시 요청했지만 재판장이 더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검사를 오히려 제재했다. 정치적 인간들도 때로는 감상적 인간일 때가 있다. TV드라마 앞에서 낄낄 대고 질질 짜는 서민의 마음일 때도 있다. 인간은 순간적으로는 누구나 단순하다. 이성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일 수는 없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감정이다. 단지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하든가 속일 뿐이다. 이성 역시 경계의 산물이다.

 

오빠는 그러나 정치적 인간, 그들에게 감정은 짧고 이성은 길다는 사실을 바로 감지하고 말을 줄였다. 재판장이나 방청인들을 웃기며 코미디언이 된 듯 느낀 오빠는 더 화가 났다. 하지만 개그는 짧을수록 효과적이라는 개그기능의 효율성으로 말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들, 재판장마저 자극해서는 불편해진다. 농락은 상대가 알지 못할 만큼만의 정도껏이어야 하고 그들보다 더 똑똑하게 굴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어눌한 척 겸양을 떨 때가 되었다. 고개를 잠시 숙이고 나서 이어 말을 시작했다.

 

“내 방에는 소련·동유럽소설책만 있는 게 아니라 박종화의 소설도, 서정주의 시집도 있습니다. 우표는 한국 것이 더 훨씬 많고 미국 것은 소련 것보다도 백 배는 더 많을 것입니다.”

 

가택수색을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 박종화나 시인 서정주가 어떤 처신으로 최고권력에 부침하며 삶에 연연했는지를 더 얘기한다면 그것은 사족이 되고 만다. 그리고 판사들의 옹졸한 자존심을 건드려야 좋을 것도 없다. 옹졸은 옹졸로써 상대해야지 대범 따위로 상대했다간 더 큰 화를 입게 된다. 피라미가 노는 물은 도랑이지 대양일 수 없다. 이럴 때 그들의 소설이나 시는 문학이 아니라 정치의 소용도구로 쓰면 그뿐이다. 사실, 오빠의 방에는 두 사람의 소설도, 시도 없었다. 오빠는 바로 풀려났다. 유쾌하지 못한 석방에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생색내는 전관예우 적극활용 변호사나 그의 생색에 고개를 끄덕이고 안도하며 자식 앞에선 다 작아지는 여느 엄마와 같은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 구치소 앞에서 무조건 첫 버스에 올랐다. 글.그림=오동명/ 23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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