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4)

33 오빠,

 

그 동안 잘 지냈어? 그 동안이 너무 길었네. 십 년이 넘었구나. 십삼 년? 내가 의대 본과 2학년 마치고 미국에 왔으니, 그래 벌써 그렇게나 됐네. 그 동안 이렇게 편지 한번 못 했고 전화만 고작 두어 번 했나? 육년 전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난 가보지도 못하고.

 

오빠,

 

병원에서 인턴하랴 바빴지만 실은 두려웠어. 말없이 누워있을 엄마를 차마 볼 수 없을 것 같았어. 엄마와 풀지 못한 것도 많고. 그 때 내 나이 서른이었지만 남들과 비교하면 스무 살도 안 된 어린애에 불과했지. 미안한데, 오빠도 그럴 걸? 우리 남매가 태어나자마자 책만 꿰차고 있었으니 지식은 남들보다 많을지 모르지만 지나치게 나 자신, 에고적으로만 키워진 우리잖아. 학교에선 통했는데 사회에 나와 보니, 아니다, 미국에 와서 보니 내가 얼마나 잘못 자랐는지를 알겠더라고. 나는 비틀어진 어른이 돼있었어. 그 넓은 초원에 그 작은 구멍에 넣어보겠다고 하는 골프처럼 우리는 만들어졌지. 결국 넣긴 했지만 구멍일 뿐. 내가 아닌 엄마가 넣은 것이고. 내 몸 하나만 넣어둘 수 있는 구멍 속에 나는 갇히게 되었고 내 스스로 나를 가두는 데에 긴 시간을 다 할애하고 말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참으로 힘들었어. 삶을 취미 같이 살 순 없는 거 아니겠어? 이런 걸 느낄 때마다 엄마를 원망하곤 했으니 엄마 마지막도 지켜보지 못한 불효자가 되고 말았네.

 

오빠는 어때?

 

잘 지내? 오빠는 잘 지내면 좋겠다. 아직 검찰청에 있는 거야? 그 사이 변호사가 된 건 아니고?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해. 엄마를 떠나보낸 후에는 오빠도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테니까. 오빠도 엄마에게 힘들어했잖아.

 

참, 아빠는 어떻게 지내셔?

 

나는 더 이어 쓰지를 못했다. 다 쓰지 못한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책상 있는 방을 한 동안 열어보지도 못했다. 마음으론 늘 방문을 열고 편지를 이어 쓰고 있었지만 몸은 그러지 못했다. 한국의 가족이 쓰다만 편지 같았다. 마음에선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지만 다가가지 못하는 사랑은 모든 걸 서먹하게 만들었다. 이러니 부치지 못하는 편지로 그저 가슴에 담고만 있어야 했다. 쓰다만 편지가 또 생각나면 한국에서 가지고 온 우표첩을 꺼냈다. 바꿔 보고 돌려주지 않은 오빠의 우표첩이다. 꽃 많은 내 것은 오빠가 잘 가지고 있겠지.

 

오빠, 오빠 꺼 더 좀 보다가 돌려줄게.

 

 

대학을 막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자동차와 기차들로 가득한 우표에는 관심이 없었다. 간간히 보이는 오빠의 서툰 그림들, 우표를 보고 따라 그렸을 그림들이 오빠의 우표첩을 더 갖고 있게 했다. 오빠도 이런 생각을 했구나.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오빠의 꿈은 여전히 버스운전기사였다. 의대에 들어간 내가 아직 화가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듯이. 오빠는 정말 그림을 못 그렸다. 초등학교 1학년 수준? 그런 그림에서 피카소나 샤갈을 떠올리게 했다. 오빠의 그림은 샤갈에 가깝다. 분명히 도로 위로 달리는 버스를 그리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빠의 차는 항상 공중을 날고 있었다. 이래서 샤갈 같았다. 이래서 오빠가 화가 같았다. 나보다 더. 나는 사물을 똑같이 그리는 세밀화에 자신이 있다. 그러나 상상이 결여돼 있다. 보이는 것 대로만 그릴 줄 알았다. 그래서 화가가 되는 것을 뒤늦게 포기했지만 그림은 여전히 그리곤 한다. 그리고 있을 때가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니까.

 

아빠에 대해 더 묻지 못했다. 묻기 전에 눈물이 먼저 쏟아져서 쓸 수가 없었다.

 

오빠,

 

내 꽃 우표첩은 아직 가지고 있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해. 나한테 돌려줘야 하는 빚이니까. 오빠가 내게 진 부채. 오빠가 채무자. 나는 채권자. 우리가 서로 이런 건가? 채권자이면서 동시에 채무자인 남매. 법조인이라 잘 알 거 아냐. 오빠, 이거 농담. 웃겨? 썰렁하지? 안 해 봐서 그래. 하지만 이제 남도 웃기고 나도 웃고 살고 싶다. 또 직업이 이래서 이러지 않으면 안 되고. 오늘 본 환자 한 명 이야기해줄게. 오빠도 무척 바쁘겠지만 동생의 이런 말도 들어주는 여유를 가져봐. 정말 오랜만에 오빠 만나니까 말이 많아지네. 이것도 이해해주고.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왔데. 불법이었지. 이십 년이 넘었다는데 지금은 경제적으로 살만한가봐. 이러니 상담료 비싼 내게로 왔겠지? 이것도 농담. 웃기지 않아도 웃어주는 아량 넓은 남자가 내 오빠 맞지? 향수병에 걸려있어. 몇 년 전 아들을 잃고 난 후의 트라우마도 겹쳤고. 그녀가 그랬어.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게 고향이라고. 이제 돌아가려니 두렵다는 거야, 고향이. 이래서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타향이 고향이 되었는데 이것이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는 거지.

 

일주일에 한번 시간 정해놓고 그녀를 만나는데, 오늘은 오빠의 우표첩을 치료에 이용해봤어. 오빠가 그려놓은 그림이 환자치유용이라는 게 재미있지 않아? 흥미롭지? 사실 그녀와 나는 똑같은 병을 앓고 있고 나의 자가치료법을 그녀에게도 적용해본 거지. 효과가 있어 지금 이렇게 오빠한테 편지를 쓰고 있잖아. 십삼 년 만에 말야. 그녀도 치유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는 해보지만 사람마다 더욱이 정신적인 요소들은 다 각기 다르니까 장담할 순 없지만 오늘 보니 그녀가 꽤나 관심을 갖고 마음을 열더라고. 그런데 그녀는 우리의 우표첩 같이 추억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며 우울해하긴 했는데, 일단 그림그리기부터 시작했어. 생각나는 것부터 그리기. 처음엔 잃은 아들이 생각난다고 안 하려 했는데 한 시간쯤 지나니까 재미있게 그리더라고. 얼굴 보면 알잖아. 나, 정신과 의사하다가 관상쟁이 다 됐어. 이것도 농담으로 들려? 고향집을 그리더라. 우리나라 토담집과 비슷해.

 

참, 오빠는 결혼 당연히 했겠지? 결혼할 땐 나한테 연락을 주지 그랬어. 오빠는 나를 피하는 것 같아, 일부러.

 

오빠,

 

나는 다 잊었어. 아니 우리 남매의 어릴 적 상황을 이해해. 그것엔 내가 전문가가 되었잖아. 꼭이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아도 일반인들이 이젠 다 아는 상식이지만.

 

아, 나는 아직 미혼이야.

 

사랑이란 게 무언지 모르겠어. 엄마한테 너무 많이 들었고 받았던 사랑인데, 정작 내 안에는 사랑이란 게 없는 건지 사랑에 무덤덤해. 두렵다 사랑이 난.

 

오빠, 언니는 누구야? 어떻게 생겼어? 오빠처럼 법조인? 아님...

 

난, 내 동생 같은 여자랑 결혼할 거야. 단 의사가 아닌 화가여야 해. 내가 버스를 몰고 다니며 보고 온 것을 그대로 그려줄 수 있는 여류화가.

 

그 때, 나도 오빠 같은 남자라고 했었지? 여자 말을 들어주는 남자.

 

우리 남매는 끌려가기만 한 데에 지쳤던 게다. 사랑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일방적이어서는 불편한 사랑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이 편치 않아 피하고 싶었던 사랑. 아빠는 엄마를 두둔했다. 힘은 강한 쪽으로 쏠리게 돼 있었다.

 

모든 사랑은 존중되어야 한단다. 어떤 사랑이라도 말이다. 지나치다하더라도 포용해야 하는 게 사랑이다. 사랑은 계산하고 따질 수 있는 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악의가 없다. 선의만이 사랑일 수 있다. 이러니 어떤 사랑도 존중되어야 한단다.

 

아빠는 힘들어하는 우리 남매를 애써 외면했다. 아빠는 누구보다도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를 존중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아빠는 말을 줄여갔다.

 

오빠의 아내는 누굴까. 샤갈처럼 그린 오빠의 그림을 보며 따라서 그려봤다. 그러나 나는 예쁘게만 자꾸 그려졌다. 프레임에 갇힌 나를 내가 그린 그림에서 본다. 내가 그린 오빠의 아내는 꽃처럼 아름다웠다. 보고 싶다가도 미워졌다. 오빠가.<글.그림=오동명/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31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