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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5)

32 아빠와 오빠는 나를 쳐다보았다. 아빠도 오빠도 입을 다물고 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긴 지청구 뒤 엄마는 뜨거운 한숨을 내 얼굴에 뿜어냈다.

 

“이애 저애 다 섞인 고등학교 때와 지금이 같은 줄 아니? 최고라고 하는 수재들이 모인 곳에서 이제부터 시작인데 긴장을 내려놔?”

 

서울의대를 막 입학한 후였다. 우리 집은 욕구에 의한 양육강식이 지배하는 또 하나의 동물의 왕국이었다.

 

당신이 아이들을 뭘로 책임질 거야.

 

어린 너희들이 뭘 알아.

 

엄마의 무엇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 처세일 것이다. 욕심이며 동시에 사랑일 것이다. 지혜이기도 할 것이다. 표적은 최고지향이었다. 확고한 욕구의지로 거느리는 엄마의 통솔에 끌려가는 가족이 아프리카의 사자 떼와 다를 게 없었다.

 

너희들이 이만큼 잘 커온 것은 다 너희 엄마 때문이다.

 

아빠가 엄마 뒤를 따르고 우리 남매도 당연히 그 뒤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엄마는 거실 바닥에 내팽개쳤던 내 그림노트를 다시 집어들었다.

 

“만유인력이 꼭이 질량에 의해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끌림이란 유혹은 사람이나 사물이나 다 지니고 있다. 귀희를 붙들고 있는 그림도 마찬가지다. 이러니 이 요물을 없애지 않을 수 없구나. 엄마가 임의대로 처리하겠다. 알겠니?”

 

엄마, 제발. 앞으론 그림 안 그릴 테니 제발 그것만은.....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엄마의 의지를 무슨 수로 꺾는단 말인가. 불가항력에 포기하고 체념할 수밖에 없다. 그냥 쫓아가는 사자새끼가 그런 것처럼. 내 의지와는 무관했다. 엄마에겐 유혹으로 보인 그림이 내게는 마력이었다. 마력이란 위로·위안의 힘이었다. 내가 의지한 유일한 것이 위로였다. 공부로부터의 일탈이지만 일탈은 제자리로 돌아온 나를 공부에 더 전념하게 해주었다.

 

엄마, 내 머리로 서울의대를 들어간 게 아니야. 이 그림이 나를 버티게 해준 거라구. 나를 지켜준 거라구. 공부, 그거 머리로 하는 줄 알아? 버티는 힘이 끌어주는 거야. 엄마가 더 잘 알잖아?

 

역시 말할 수 없었다. 그림노트 안의 꽃그림이 우표를 보고 그린 것이라는 사실을 다행히 모르고 있어 우표첩은 무사히 내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아빠의 선물이기에 엄마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아이들에게 해준 선물인데.

 

초등학교 때 이미 사라져버렸을 우표첩이 지금까지 남은 것은 아빠의 애절한 이 한 마디 때문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이 후 우리 네 식구가 함께 모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각자 해야 할 일이 많았고 할 일도 서로 달랐다. 하루 네 시간만 자던 엄마가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우리 남매가 엄마가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들어간 뒤 엄마만이 할 일을 잃은 듯이 시간을 누워서 보냈다.

 

오늘도 바쁘니?

 

엄마가 물어오면,

 

바빠.

 

 

내 대답이었고 오빠도 그랬던 것 같다. 실로 그랬다. 이미 짜준 엄마의 계획표대로 우리의 미래는 맞춰졌고 대학 입학 전과는 달리 엄마가 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되었기에 엄마의 손이 미치지 않을 뿐이었다. 우리도 그만큼 머리도 컸다. 성인이 되어 있었다. 공부가 쉬운 것은 결코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수월했다. 제대로 말하면, 할 줄 아는 다른 게 공부 외에는 없었다. 공부로 하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이것이 아빠가 말한 엄마의 덕분일 것이고 사랑의 결과일 것이다.

 

잘못 꿴 단추는 풀어 다시 채우면 되고 기초를 잘못 쓴 건물은 부숴 다시 지으면 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모든 것은 처음이 중요하다. 사람은 더욱 그렇다. 어릴 적은 이래서 방치해둘 수 없는 부모의 의무이며 사회의 책임이다.

 

루소의 교육론 부분 신봉자가 엄마였다. 한번은 이 말에 아빠가,

 

루소는 정작 자기의 다섯 자식들 모두 버렸다던데...

 

이랬다가 되레,

 

교육은 선택하고 선별하는 거예요. 어느 것도 완전할 수 없어요. 좋은 것만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이래야 교육이 안전해지는 거지요. 교육의 목적은 완전이 아니라 안전이 아닐까요?

 

엄마를 어찌 말로 이길까. 말의 강도는 욕구의지의 크기와 비례했다. 아빠는 의지를 견인할 욕구가 엄마보다 훨씬 부족했다. 어쩌면 욕구보다는 이해를, 의지보다는 양보를 아빠는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번번이 침묵으로 드러냈다. 아빠의 침묵은 우리 남매에게 힘이 돼주질 못했다.

 

남들은 다들 나를 부러워했지만 나는 내 대학생활이 답답했다. 따분했다. 극히 단조로웠다. 갑갑했다. 자동화기계에 얹힌 전자제품 같았다. 잘 짜여진 대로 우리는 조립공정 위 컨베이어시스템에 놓여있었고 놓인 채로 따라가 주기만 하면 되었다. 명품도 공산품이다.

 

오빠가 사법연수를 마치고 서울지검 남부지청으로 발령장을 받고 방학 같은 휴가를 집에서 보내고 있을 때였다. 나는 본과 1학년 의대생이었다. 가족이 오랜만에 자리에 모두 모였다.

 

나를 가두고 있는 철창우리를 벗어나야 했다. 성취했다는 오빠를 보니 그런 마음이 더욱 절실하게 들었다. 철창우리는 틀이다. 그 프레임 안에 현재도 미래도 다 정해져 있었다. 오늘처럼 몇 년 똑같이 지내다보면 의사가 되어있을 것이다. 나의 만족과 남들의 부러움이 연속된다는 것, 틀은 굴레에 굴레를 덧씌우면서 더 견고해진다. 가두는 틀이 크고 강할수록 굴레는 더 공고해진다. 유연해지고 싶었다. 그러자면 벗어나야 했다. 삶을 확고부동하게 해줄 안정이라는 시멘트블록을 깨고 싶었다. 단조로운 생활에 긴장이 있다면 경쟁밖에 없었다. 경쟁은 부추기는 것이다. 타의적이다. 따라서 소모적이다. 나는 없다. 경쟁으로 성취감은 채워졌지만 이럴수록 더 불안했다. 분명해지고 확실해지는 프레임에 ‘평생 이렇게...’

 

그즈음, 감옥이 꿈에 자주 나타났다. 법의학 수업 때 다녀온 현장, 직접 보고 온 서울 구치소였고 꿈에서는 그 안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관람자가 아닌 죄수로. 거기서 보았던 수인 대신 내가 그 안에 있었다.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꿈에선 내가 책을 읽고 있었다. 삼시 세끼 남이 만들어준 밥을 얻어먹기만 하면 됐다. 나는 책만 읽어주면 됐다. 등을 돌려 앉아 있던 책 읽는 수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데 내 얼굴이었다. 무표정한 얼굴. 꿈이지만 데드바스크 같은 내 얼굴을 보는 나는 무서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음악이 들려왔다.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2악장이었다. 배경은 감옥이지만 음악으로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나이팅게일·메추라기, 그리고 뻐꾸기소리가 들렸다. 베토벤이 냇가를 걸으며 작곡했다는 이 곡은 청각을 잃은 베토벤 없이는 들을 수 없던 음악이었다. 로맹 롤랑도 나처럼 들었던 음악.

 

이 새소리들은 작곡가에게는 이미 소멸된 하나의 세계를 자기 자신의 정신세계 속에 재창조한 것.

 

실연과 청각 상실로 실의에 빠져있던 한 예술가가 그러나 내게는 그의 데드마스크로 더 인상이 짙고 깊다. 4악장이 들려왔다. 천둥소리, 바람소리. 그는 5악장에서 감사의 마음을 오선지에 담았다지만 내게 각인된 무표정한 데드마스크의 삶은 비록 재창조되었다 해도 어린 내게는 고뇌에 불과했다. 그 때였다. 무섭고 두려워 떨고 있을 때였다. 감옥 안에서 유일하게 바깥과 빛으로만 소통할 수 있었던 쪽창으로 까치가 날아들었다. 까치는 내 귀에다 대고 하듯 큰 소리로 지저귀고는 이내 사라졌다. 놀라 잠에서 깼다. 두 손을 얼굴 앞에 모으고 모로 옴츠려 누워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언가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이 있었다. 우표첩이고 엄마의 손에 사라진 그림노트였다. 꿈에서 깨어 우표첩을 찾았다. 오빠의 것이었다. 몇 년 전엔가 바꿔보고 돌려주지 못한 자동차 우표첩. 뒤적였다. 우표들 사이로 쓴 글씨가 보였다. ‘떠나고 싶다’ 어눌한 글씨체로 보아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 오빠가 쓴 듯해 보였다.

 

“아빠, 엄마”

 

난 기억으로는 아마 처음으로 아빠를 엄마보다 먼저 불렀다.

 

“나, 미국으로 떠나려고 해요.”

 

온가족 모임이 오랜만이라며 엄마가 손수 장만한 음식들이 식탁에 듬뿍 놓여있었다. 얼마나 신나 있었을까, 어렵지 않게 엄마의 기쁨이 드러나 보이는 음식들 앞에서, 자리에 모두 앉아 축하한다며 주인공 오빠를 바라보기도 전에 나는 내 말부터 꺼냈다. 검사가 된 오빠를 축하하고 나면 곧 내게로 관심이 옮겨질 것이다. 이게 싫었다. 그리고 오빠를 축하해주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는 축하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더 갇혀 살게 될 더 견고하고 높은 시멘트 벽채 안으로 첫 발을 들이려는 오빠를 축하할 수 없었다. 식탁 주변엔 한참 침묵이 흘렀다. 내가 깨야했다.

 

“오빠, 축하해.”

 

나는 오빠를 쳐다봤다. 몇 년 만에 보는 오빠의 얼굴인가. 더 해쓱해진 오빠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갈비찜으로 보이는 덩어리 하나를 입에 넣어 오물거리고 있었다. 또 꿈에서 봤던 베토벤의 데드마스크가 오빠의 얼굴에 덧씌워졌다.

 

“이제 막 앉았는데, 귀희가 성급했구나. 귀희 얘기는 조금 후에 듣기로 하자. 규범이가 그 동안 수고 많았다. 그리고 고맙다. 우리 다 같이 건배할까?”

 

아빠였다. 엄마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니, 언제 떠나려고?”

 

엄마와 얼굴을 마주 하고 앉아본지도 꽤 오랜만이었다. 엄마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환자의 얼굴로 변해있었다. 아마 이 때 처음으로 엄마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울컥했다. 이런 엄마가 가여웠지만 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일 년 후에요. 준비해야 하니까요.”

 

일단 여기서 대학은 마치고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아빠의 말을 엄마가 끊었다.

 

“그래라. 잘 했다. 잘 결정했다.”

 

거의 손도 안 댄 음식들이 음식물쓰레기통에 분리돼 버려졌고 엄마만 주방에 남겨진 채 거실로 나왔다. 커피를 마시면서 아빠와 오빠가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엄마에게로 갔다. 어색했지만, 나는 엄마의 등에 내 가슴을 바짝 대고 엄마를 안았다. 내 팔 한 아름에 안긴 엄마의 몸은 야위어 있었다.

 

“엄마, 나랑 내일 우리 대학병원에 가자.”

 

엄마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뼈만 만져지는 딱딱한 엄마의 등에서 훈기가 느껴졌다. 엄마는 울고 있었을 것이다.

 

“난, 괜찮다. 너희나...” <글.그림=오동명/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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