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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1)

<제이누리>의 새해 웹소설 연재를 시작합니다. 지난해 신개념 웹연재소설 [라이브카페-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를 연재해 인기를 거둔 오동명 작가의 신작입니다. 문명의 이기에 짓눌린 현대의 일상을 다룬 환상과 추억의 판타지 소설 [옛 우표첩]입니다. 기존의 연재와 달리 거꾸로 추억을 더듬어 가는 소급형 연재가 이번 소설의 특징입니다. 신개념 소설의 재미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
아래로만 흐르는 강물을 굳이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떠올려봅니다.
강물은 시간이고 세월이란 생각이 듭니다. 물이 같은 물줄기를 다시 찾아오는 일은 결코 없다고 해서입니다. 흘러버리면, 흘려버리면 그만인 것, 시간이고 세월이기에 강물입니다.

 

그러나 다시 거슬러 찾아간다는 연어는 기억이고 추억이란 생각이 듭니다. 귀소라는 본능에 이끌린 되찾기이기에 기억도 추억도 본능입니다. 우리도 연어나 제비나 개미나 게나 기러기나 벌이나 거북처럼 본능의 존재입니다.

 

지금 적든 많든, 나이가 든다는 것은 추억거리, 그러니까 되찾기의 쌓기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을 바라봅니다. 손에 잡힌 자그마한 기계가 추억의 저장장치처럼 여겨지다가도 1년 또는 2년 만에 기계교체로 다 지워버려야 하니 기계에 의한 추억이 기계에 의해서 분실돼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상상마저 남이 해주는 세상.
만족마저 대리해주는 세상.

 

구속·강요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선택·결정하며 산다고 착각하게 하는 자유환각의 물적 세상에, 추억의 본능은 한순간에 포맷해버릴 수 있는 저장의 한계기능으로 변해가고 있는 듯합니다.
아름다움도 슬픔도 기계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추억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으로 과거를 되찾는 것일진대.
다 찾아내는 기계의 대용량저장이 아니라 거의 잊혀도 남겨진 소소한 애틋함으로 찾아가는 게 추억이 아닐까.

 

이해하기보다는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눈에서, 귀에서, 손에서 느껴지는, 이래서 과거가 아닌 현재, 지금 당장을 추억이 사로잡습니다.

 

‘오빠, 생각나?’
여동생이 오빠에게 지난 과거를 지금 현재로 끌어냅니다.
여동생과 오빠는 추억으로 또 다른 추억을 쌓아갑니다. 먼 훗날 또 이러겠지요. 십년 전, 이십년 전에도 그랬듯이.

 

‘오빠, 보고 싶어.’

추억은 되돌리기의 과거가 아니라 찾아가기의 미래일 것 같습니다.
미래를 견인하는 추억의 세계로 제이누리 독자 여러분과 함께 돌아가 봅니다.
/ 오동명
================================================================

 

 

 

36 엄마의 손에 이끌려 우리는 난생 처음 기차를 탔다. 아빠는 승용차로 청량리역까지 우리를 태워줬다. 집을 떠나면서 이미 들려줬기에 우리가 춘천으로 갈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서 안내팻말의 춘천이란 글씨를 발견하고 바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엄마의 손에 묶인 나는 눈으로만 춘천선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오빠도 나랑 같았을 것이다. 오빠가 나를 쳐다봤다. 오빠의 눈이 슬퍼보였다. 나도 오빠에게 그렇게 보일까? 나를 본 뒤 엄마의 손을 내려다본다. 엄마는 우리의 손을 더 꽉 붙들었다. 엄마는 늘 우리의 생각보다 앞서서 움직였다. 오빠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엄마는 앞을 가리켰다.

 

“여기 청량리역에서는 춘천으로 가는 경춘선만 있는 게 아니란다. 저기 봐봐. 강릉이라고 쓰여 있고 안동이라고도 쓰여 있지?”

 

안동은 엄마의 고향이라 자주 들어본 곳이다.

 

“엄마집에 갈 수 있겠네.”

 

내가 고개를 돌려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엄마집은 대치동이지. 우리가 오늘 가는 곳은 춘천이라 경춘선을 타고 갈 예정이지만 청량리역은 중앙선의 출발역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해.”

 

엄마는 우리의 눈을 쳐다보면서 눈 위 머리 쪽을 의식적으로 치켜보였다. 뇌가 있는 머리를. 우리는 엄마의 요구대로 머리 속에 입력시켰다. 언젠가는 엄마가 꼭 물어볼 것이다.
‘중앙선은?’

 

이미 천자문을 깨친 우리 남매는 기차 좌석에 앉자마자 서울 경(京)자와 춘천의 봄 춘(春)자를 종이에 써 보이며 서울서 춘천까지니까 경춘선이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있었다. 궁금한 중앙선에 대해서는 더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야 알았는데 오빠도 나처럼 이게 궁금했나보다.

 

“중자로 시작하는 도시 이름이 뭐지? 앙자로 시작하는 도시 들어봤니?”

 

내가 묻고 싶은 것을 오빠가 내게 먼저 물어왔다.

 

“춘천으로 안 가?”
엄마는 강촌표를 끊었다. 오빠가 앞에 앉아있는 엄마에게 물었다.

 

“이 기차는 춘천이 종착역이지만 우린 중간에 내릴 거야. 강촌이란 곳에서. 아빠랑 여기서 처음 만났거든.”

 

엄마는 잔뜩 신이 난 사람처럼 얼굴이 핑크빛으로 변해 있었다.

 

“너희들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된 출발이 바로 여기, 강촌이란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빠와 나의 출발역은 강촌이네.”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래. 우리가 그곳엘 지금 가는 거란다. 우리 가족의 출발지로 말이다.”

 

그 때 오빠는 나보다 세 살이 많아 여덟 살이었고, 나는 다섯 살이었다. 나는 유치원생이지만 다른 애들보다 일 년 빨리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돼 있었다.

 

“귀희도 오빠처럼 한 해 일찍 시작해야 해. 그래야... 그럼 그럼.”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첫 기차여행이었다. 처음이라 그렇겠지만 처음이라고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기에, 강촌 가는 기차여행은 오빠에게나 나에겐 참으로 특별했다. 차마 엄마에게 알리지 못하는 비밀을 내가 갖게 되어서다. 오빠가 섣불리 엄마 앞에서 말을 꺼냈다가 혼쭐이 나서 나는 더욱더 혼자만 간직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 내 가슴에 더 깊이 품어둔 비밀, 나의 비밀 같지 않은 비밀을 갖게 한 여행이어서다.

 

“기차는 거의 직선으로 곧장 달리는데 버스는 꾸불꾸불한 길을 달리고 있네. 버스가 강하고 같이 붙어 달려. 기차보다 버스가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여기저기 다 나닐 수 있을 테니까.”

 

오빠가 기차 차창 밖을 내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엄마가 싸온 김밥엔 손도 대지 않고 연신 창밖만 쳐다보고 있던 오빠는 급기야 엄마를 화나게 만들고 말았다.

 

“엄마, 나 나중에 크면 버스운전아저씨 될래!”

 

다섯 살인 나도 이 말을 하게 되면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쯤은 할 수 있었다. 나보다 세 살이나 나이가 많은 똑똑한 오빠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난 보았다. 오빠가 저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새로움이랄까, 발견이랄까. 오빠는 여기에 빠져들며 엄마의 노여움 따위를 잠시 잊었던 게다. 역시 엄마는 나의 예상대로 오빠에게 호통을 쳤다.

 

“얘가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말 당장 집어치우지 못해?”

 

오빠는 그 정도로는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엄마를 잠깐 쳐다보고는 다시 창밖만 내다보았다. 정신이 좀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빙긋 웃음을 띠고 있었다.

 

“엄마가 지금 말하고 있지. 근데 너, 규범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어디 보고 있느냐고. 엄마를 똑바로 안 볼 거야?”

 

그제야 오빠는 제 정신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냥 내 꿈 얘기를 한 것뿐인데요.”

 

오빠나 나나 엄마 앞에서 가끔 존칭어를 쓸 때가 있는데, 주로 꾸지람을 들을 때다. 그러나 엄마는 꿈이라는 얘기에 더 발끈 화를 냈다.

 

“꿈? 지금 꿈이라고 했니? 꿈이 고작 기사야? 버스기사?”

 

엄마는 펼쳐놓은 김밥과 과일을 주섬주섬 모아 싸고 있었다.

 

“엄마가 오늘 괜한 짓했다. 데리고 나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빠는 눈치를 차리고 뚜껑을 닫으려는 김밥통에 손을 내밀었다.

 

“엄마, 그냥 해본 소리예요. 그냥요. 보니깐 버스운전수가 되면 신날 것 같아서요. 엄마가 그랬잖아요.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라고요. 저도 잘 알아요. 그냥 꿈이라니까요? 저는 엄마가 원하는 검사가 꼭 될 거에요. 그러니까, 엄마, 이제 화 푸세요. 우리 엄마 김밥, 정말 맛있다, 정말. 귀희야, 그치?”
나는 유별나게 더 여러 번 고개를 끄덕끄덕거려줬다.

 

“으응, 오빠. 유부초밥은 더 맛있어. 우리 엄마표 유부초밥!”
“얘들이 엄마를 아주 가지고 놀려고 들어. 아무튼 큰 애, 너 규범이, 그냥이든 빈말이든 그런 말 한 번 더 했다가는 엄마는 어디 산 속에 들어가 너희들이 찾을 수 없는 깊은 곳에 숨어서 다신 널 안 볼 거야, 알았지? 어떻게 키우고 있는 내 자식인데... 알았지?”

 

오빠를 쏘아보더니 나에게도 얼굴을 돌려,
“귀희, 너도 마찬가지야. 너희 둘, 너희 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엄마를 실망시키면 안 돼, 알았니?”

 

엄마의 눈시울이 눈물을 막 쏟아낼 듯 붉게 물들었다. 우리 남매는 엄마 손을 잡아드렸다.
“걱정 마, 엄마.”

 

한동안 기차 안의 한 좌석엔 침묵이 돌았고 그 동안 오빠는 김밥과 초밥만 집어먹을 뿐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내게로 몸을 돌려 창을 등지고 앉았다.

 

“엄마, 우리 출생역을 오늘 꼭 가보고 싶어.”

 

다행히 오빠의 이 말 한 마디에 엄마가 피식 웃었다.
“손가락으로 말고 여기 나무젓가락으로 집어먹어라. 손에서 나쁜 병균 옮는다.”

 

오빠의 그냥꿈으로 어쩌면 내가 품게 될 나의 진짜꿈을 그날 영원히 갖지 못할 수도 있을 뻔했다. 더 다행인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그날 비록 이루지 못할 꿈이라도 품고는 지낼 수 있는 꿈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우리는 강촌역에서 내렸다. 다리 위에서 강물이 흐르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흐르는 강물 위에 종이배를 하나 띄웠다. 물론 상상으로. 이 강의 하류에 있다는 서울까지 내려가겠지? 그러다 서해바다까지 나가게 되면 더 어디까지 떠내려갈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가슴이 먹먹하며 답답해왔다. 이대로 여기 나의 출생역에서 머물러 있고 싶었다. 나는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 고마워.”
“응? 뭐가?”
“이런 데 데리고 와주셔서요.”

 

혼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난 엄마한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서 그럴 것이다. 정말 고마웠다. 이러면서 더 하고 싶던 말을 끝내 못했지만. ‘자주 이렇게 구경 나오면 좋겠어요.’ 하지만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너희 뜻을 이루고난 뒤 맘대로 활개치고 살아. 놀기부터 먼저 하려들면 나중엔 더 힘들어진다. 남의 밑에서만 살게 된다고.’

 

엄마가 하지 않아도 이 말은 내 귀에 들려왔다. 다리에서 돌아 나와 강촌역 옆을 지날 즈음 엄마가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해서 거리에 우리 남매만 남았다.

 

“강을 따라 버스길이 나 있더라. 길이 꼬불꼬불해. 그 길에 버스가 다니더라. 꼬불꼬불해도 그 길로 서울까지 갈 수 있겠지?”

 

“오빠아~~~”

 

우리끼리만 있잖니, 말하는 오빠가 또 슬퍼 보인다. 여덟 살 꼬마가 슬픈 얼굴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마냥 깔깔깔 웃어야 할 어린 나이가 아닌가? 오빠의 얼굴이 거울 같다. 오빠를 보고 있으면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나는 오빠를 쳐다보기가 싫다. 아니 겁난다. 엄마가 왔다.

 

“엄마 없는 동안 생각해 봤니? 저 강이 무슨 강?”
“한강.”
“맞는데 아니다. 북한강이야. 한강은 양수리라는 곳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남쪽을 흐르는 강은 남한강이라 하고......”

 

우리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 뒷말을 알고 있어서 이지만 강은 흐르는 물로만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를 여기 어디서 처음 만났어?”
내가 물었다. 엄마가 멈칫 하더니 이내,

 

“역, 그래, 아까 내린 강촌역에서 처음 만났지, 처음 맞아.”
엄마는 애써 웃어보였다. 엄마의 기억은 강촌역보다는 다른 데에 있었다. <글,그림=오동명/ 35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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