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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23)

13 외벽도 간판도 모두 까맣다. 카페 이름으로 보이는, 그러나 상호 같지 않은 영문자 The만 흰색이라서 더 눈에 띈다. 큰 길의 모퉁이를 두 번 꺾어야 닿을 수 있는 골목길 안의 카페, <The>는 작다. <The> 안은 좁다고 해야 적절하다. 테이블 하나에 의자가 네 개, 그리고 벽에 기타가 기대어 있다. 기타 앞에는 악보대와 작은 의자가 있다. 주방은 싱크대가 딸린 원룸과 유사하다. 오히려 주방이 홀보다 넓어 보인다. 홀의 벽과 바닥, 천장 모두 다 새까맣다. 테이블 상판만이 하얗다. 기타 역시 검정색이다. 하지만 주방은 온통 흰색으로 밝다. 기타가 기대어 있는 벽에는 벽면을 다 채운 흑백사진이 한 장 걸려있는데, 원라이팅에 의해 여성의 몸이 한 줄의 흰 선으로 감추듯 드러나 보이고 몸이나 배경 역시 까맣다. 흰색으로 처리된 곳이 하나 더 있다. 천장의 전등이다. 긴 원통의 하얀 조명기구는 레이저 광선처럼 수직의 선으로 탁자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이 빛이 흰 테이블에 반사돼 어두운 실내를 그나마 밝혀주고 있다. 주방 안의 바닥에 한 여자가 싱크대 맞은 편 쪽 벽을 향하고 모로 누워있다.

 

“싫다니까.”

 

핸드폰에 대고 하는 소리와 함께 음악이 검은 실내에서 흐른다.

 

‘Paloma Regro Paloma Regro’

 

검은 비둘기를 애절하게 찾는 여가수의 노래는 끝나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한다. 몸을 뒤척인다.

 

“싫다니까.”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발목까지 닿는 긴 원피스가 한쪽 다리의 종아리를 드러내놓는다. 위로 말려 구겨진 원피스는 마치 호박넝쿨손처럼 몸을 휘감으며 허리춤으로 말아 올라갈 듯하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원피스의 얇은 천 넝쿨손이 그녀를 위로 더듬어 올린다. 돌아 엎드려 방바닥에 놓인 CD 플레이어에 손을 뻗는다. 엉덩이가 드러난다. 뽀유스름해서 흰 페인트칠의 벽 같은 엉덩이를 다른 한 손으로 내려 가린다. 홀 쪽을 바라본다. 음악이 바뀐다. Soledad Bravo의 CD를 넣어뒀는지 그녀의 노래가 다시 흘러 나와 방안에 퍼진다.

 

‘La Sombras’

 

어둠 속에서 여가수의 목소리는 불빛이 된다. 울던 여자의 멈춘 몸짓은 날개를 접고 날기를 주저하는 나비 같이 몸을 옴츠린다.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린다. 소리는 떨리며 흔들린다. 여자는 소리가 스스로 다 끝나도록 놔두고 핸드폰을 등지고 돌아눕는다. 괘종시계가 종을 친다. 열한 번의 외침 뒤 속삭임으로 바뀌어 똑딱똑딱, 숨을 쉰다. 시계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원피스 위의 사타구니 사이로 손가락을 펴 말아 넣는다. 손이 시계추의 리듬에 맞춰 움직거리는데 주방에서 보는 방 안이 무대 같다. 지휘자의 손이며 지휘봉이 움직이는 대로 Bravo가 흐느끼고 한 여자의 신음이 흐드러진다. 여가수도 여자도 목이 멘 듯 간절하다. 어둠의 노래가 여자를 간음한다. 어둠이 멈추고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기를 몇 번, 그녀가 엎드린 채로 핸드폰을 들어 번호판을 누른다.

 

“오늘도 안 와?”

 

하지만 여자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홀을 내다본다.

 

“언제 왔어?”

 

달려 나오려다가 머뭇거리며 멈춰 선다. 문규범이 그의 두 팔을 뻗어 양 귀 위로 올려 보인다. 다시 상의의 어깨춤을 잡아 위로 올려 보이다 말고 그 두 손을 아래로 훑어 내린다. 그가 하라는 대로 이선희는 그녀의 두 손으로 어깨끈을 벌리며 제 어깨를 가슴 앞으로 몬다. 단풍나무 씨앗이 허공에서 일시 멈추듯 가슴께에서 잠시 멈칫하던 원피스가 후루룩 바닥으로 내닫는다. 드러낸 여자의 살은 방금 켠 편백나무의 결 같다. 감추었던 속살의 색에서 피톤치드 같은 향기를 뱉어낸다. 나무의 향이 그렇듯이 여자의 향도 속내의 냄새를 지니고 있다. 머쓱한 마음에 두 손으로 몸을 가려보지만 선희의 몸은 향내로 더 벗는다. 눈으로 맡는 향은 눈을 감게 한다. 선희도 규범도 둘 다 동시에 눈을 감는다. 선희는 숨을 내뿜고 규범은 숨을 마신다. 그가 뿜어내면 그녀가 들이마신다. 숨은 생명이 된다.

 

 

‘너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야.’

 

선희가 했던 말을 규범이 떠올린다.

 

‘너는 나를 죽게 할 이유가 될지 몰라.’

 

규범은 자기가 한 말을 생각한다. 검은 바탕색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여명의 안개꽃 같은 여체가 두 팔을 벌린다.

 

“언제까지 날 잡아둘 거야?”

 

두 다리 위에 걸린 검은 보푸라기가 까치의 둥지이듯 위로 솟구쳐 높다. 가슴 아래에 달린 검은 털주머니가 열매를 맺은 배나무의 뿌리이듯 아래로 깊숙하게 깊다. 어둠이 여자의 몸을 가리며 노출된다.

 

“돌아서.”

 

회전인형처럼 서서히 돌아선 선희가 깍지 낀 두 손을 뻗어 제 엉덩이를 감싼다. 줄기에 매달린 오이가 바람에 무겁게 흔들리듯 몸을 둔탁하게 떤다.

 

“왜 뜸했어?”

 

등 진 몸으로 말을 걸어온다.

 

“다신 널 못 보는 게 아닌가 하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아?”

 

규범은 선희의 쭉 뻗은 마른 등을 바라보며, 제 손으로 제 가슴은 가려도 등은 가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 놓고도 나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니...’

 

얼굴보다 먼저 가슴이 삐쭉 내민다. 햇살 복숭아가 떠오른다. 살색으로 같아서고 둥근선으로 같아서다. 먹고 싶단 생각이 든다.

 

그가 그녀의 남편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남편 품에 안겨있었다. 안긴 채로 그를 보고 있던 그녀가 남편을 더 꼭 껴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서초동 검찰청에 근무하는 문규범 검사야. 당신도 이 분 알아두면 괜찮을걸.”

 

남편에게 소개했다.

 

“제 남편이에요.”

 

깍듯하고 공손하며 사무적인 말투로 소개했다. 다 벗은 그 팔로 규범을 안고 있을 때 그녀가 그랬다.

 

“너랑 이렇게 있을 수 있어 너무 행복해.”

 

그랬던 그 표정으로 그녀가 다른 남자에 안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낯설었다. 누구에겐 보아서는 안 될 것이 있고 누구에겐 보여줘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비밀스러워서 우리 사랑이 더 재미나다고 생각진 않니?”

 

선희는 규범보다 열 살쯤은 더 나이를 먹었다.

 

“감추지 않으면 안 될 비밀을 즐기는 건가? 난 그런 비밀은 재미없어. 담아둘 수 있을 만한 비밀이라면 모를까. 간직하지도 못할 비밀은 소모적일 수밖에 없지. 소모해버리면 쓰레기가 될 뿐, 사랑이 쓰레기가 되는 것 같아서 그런 사랑 난 재미없어. 비록 우리가 불륜이라지만.”

 

“그런데 나를 왜 만나는 거야?”

 

선희가 물었지만 규범 자신에게 더 묻고 싶은 말이었다.

 

“술이었잖아. 내가 선희와 가까워지게 한 건.”

 

“술집은 많아. 술집만큼 여자도 많고.”

 

선희는 말을 잘 들어주는 여자다.

 

“내가 버스운전사라면 말야, 지금쯤...”

 

“우표 모아 봤니?”

 

그는 그녀와 술을 마시면서 늘 이런 식의 대화를 즐겼고 따분한 그의 꿈이야기를 그녀가 잘 들어줬다. 그녀가 그에게 우표를 선물해주면서 둘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오래 전에 미국 언니가 보내온 편지에 붙어있던 우표야. 새 우표만 모으니?”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편지와 엽서들이 <The>의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우표들은 뜯겨져 규범에게 가 있었다. 읽고 싶었다. 사진엽서의 짧은 글을 물끄러미 읽었다.

 

선희야.

 

앞의 사진, 기억 나지?

 

네가 다니던 대학이니 생생하게 기억나겠지.

 

규범이 엽서를 뒤집어 사진을 보았다. 담쟁이넝쿨로 입혀진 오래 된 건물과 그 앞 잔디공원에 자유로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대학생들이 담겼다. 엽서를 다시 뒤집었다.

 

내가 내년 봄학기부터 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어.

 

선희도 계속 공부했더라면 지금쯤.

 

내동생 선희가 언제나 나보다 훨씬 뛰어났었잖니.

 

알고 있겠지? 의석 씨도 작년부터 여기서 강의하고 있는데, 아직도 싱글이더라.

 

네 안부를 묻기에 잘 지낸다고만 대답했어.

 

선희야, 정말 잘 지내는 거지?

 

(자주 편지 보낼게. 잘 지내렴.)

 

“의석 씨가 누구야? 옛 애인?”

 

“훔쳐봤구나.”

 

“떳떳하게 봤는데...”

 

“상관없어. 지워버린 과거니까 그래서 그가 누군지 나도 몰라.”

 

“미국서 대학을 다니다가 그만 뒀어?”

 

“그것도 몰라. 돌이키고 싶지 않고 그래서 잊어버렸으니까. 왜 그렇게 남의 과거가 궁금해? 인간은 과거의 동물 같아. 과거를 회상하는 동물이 사람 말고 있을까?”

 

“과거가 아니라 너, 이선희에 대해서 묻는 거야.”

 

“지금 이선희만, 아니 어떤 것도 묻지 마. 난 네 꿈인지 상상인지, 네가 들려주는 얘기만 듣고 싶어.”

 

선희가 주방 쪽 내실로 규범을 끌었다.

 

“같이 엎드려서 듣고 싶어. 우리 둘 다 다 벗고. 제 얘기만 하고 가는 너하곤 다 벗고 있어도 아무 일이 없을 것만 같아.”

 

“내가 남자도 못 된다는 듯 욕 같이 들리는군.”

 

“아무렴.”

 

“무슨 뜻?”

 

선희가 크게 웃어보이며,

 

“내 놀이, 동참 할 거야, 안 할 거야?”

 

“이런 놀이 자주 하니?”

 

선희가 짓던 웃음을 지우고 규범을 쳐다보더니,

 

“우리 한 번도 안 해 본 거잖아? 싫으면 그만 둬. ‘너하고만’이란 말은 하고 싶지 않아. 삶을 설명하려 드는 것처럼 따분한 건 없으니까.”

 

둘은 다 벗고 엎드려 누웠다.

 

“우표는 언제부터 모았어?”

 

“언제? 아버지 선물이야. 내가 모으기 시작한 건 사법연수원에서 였고. 그 때 우표가 없었다면 난 다 때려치우고 나왔을 거야.”

 

선희가 벗겨 놓은 규범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오늘은 나를 버스에 태워 어디로 데려가 줄 거예요, 규범 씨.”

 

“새삼스럽게 존댓말에 규범 씨라니?”

 

선희의 팔이 규범의 가슴을 감싸 안았다.

 

“벗으니 남자로 보이네.”

 

“네가 프로 같아 보이는데.”

 

“무슨 프로?”

 

“이렇게 남자들을 유혹해?”

 

“또 삶을 설명하라 하는구나. 삶을 생활로 전락시키지 마라 줘. ‘너하고만’ 이런 말을 듣고 싶은 거니? 우표수집가들은 다 같은 이유로 우표를 모으나? 왜 일률적이고 편리하게만 상황을 보려하지? 얘기 들려주기 싫으면 그만 옷 입어. 비밀스러움이 사라지고 말았어.”

 

규범은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다시 드러누웠다.

 

“사랑하지 않고는 난 섹스를 못해. 난 사랑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

 

“숫총각? 너에게서 대나무에서 나는 풋풋한 풀냄새가 났어. 그 냄새, 정액과 비슷한데, 너에게서 나는 냄새가 신선했어. 총각인 줄 알았지.”

 

“그러고 보니 대나무가 방에 걸려있네. 옻걸이? 어느 스님의 선방에서 본 적이 있는데”

 

“네게서 내 냄새가 났어. 대나무에 걸어둔 옷을 내려 입을 때마다 대나무 풀내가 나거든. 매일 옷은 갈아입어. 그리고 매일 벗고. 다 벗자고 한 뜻을 이제 알겠니?”

 

“매일 나를 느낀 거니?”

 

“형광등은 아니구나.”

 

규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자세로,

 

“나도 제안 하나 하고 싶은데.” 글.그림=오동명/ 12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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