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 그리려다가 안 되겠다싶어 더 배우자 한다. 웬만한 것, 곧이곧대로 따라는 그리겠다는 자만을 스스로 들통 내고 만다. 언제나 그렇듯이 좀 알고 나면 더 힘들어진다. 모를 때는 무식해질 수 있지만 아는 한 무식함을 인정하게 된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진정 아는 것의 힘이 아닐까. 몰상식한 제 주장만 하는 자와 그런 주장이 20여 퍼센트 이상 먹혀드는 사회(지난 번 대통령선거에서 한 후보자가 극렬하게 보여주었지만, 절대 정치로만 선을 그어서 볼 일이 아니다.)를 보고 있자면 무식하고도 뻔뻔할 수 있는, 알지 못하는 것의 힘을 체감한다. 무식은 부끄러움이며 부끄러울 때 무식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무식의 힘이 존재한다 함은 무치해도 당당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일진대, 무식-무치-무식의 순환, 바로 악순환이 아닐 수 없다. 무식하고 무치해지고 싶지 않아서, 비록 염우는 없더라도 염치는 달고 살자 해서 든 책이 나를 더 부끄럽게 한다. 수채화의 대가(헤이즐 손/영국인)가 쓴 책(<종이 위의 마법, 수채화>/방소연 번역하고 소네트에서 냄)의 이 구절이다. “내가 그린 거의 모든 것은 여전히 내게 실험이며, 수채화에 대
▲ 그림 아래 ‘addicted2groove’는 사진에선 보지 못하고 따라 그리다가 찾았고 알아냈다. ‘2’는 ‘to’일 것이고 하면, ‘최고로 중독된’... 사진가가 잡아내고자 하는 주제가 집힌다. 우리 학당(또바기 학당/전북 남원에 있다)의 심적·경제적 동지인 이종덕 님이 낮기온은 이미 한여름인 최근, 사진을 보내왔다. 보는 비로 시원하고 받는 마음으로도 시원하다. 황사·미세먼지·꽃가루 등 건조한 날들의 연속으로 가슴까지 쩍쩍 갈라져가던 날, 그 사진을 다시 꺼내 보며 따라 그려보기로 한다. 남의 그림을 그림으로 따라 그리기는 그나마 좀 덜 부담스럽다. 그러나 사진 앞에선 다르다. 더 똑같게 그려야 한다는 부담이 하나 더 가중된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명상은 외면이 아니라 극복이다. 피동이 아니라 능동이며 유별나게 굴지 않아도 비움의 고지에 오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역설 같지만 비움이야말로 가장 근사한 채움이지 않을까. 비우고 난 뒤에 이는 채움 욕구는 타인의식이나 경쟁이 동반되지 않은 자기에게의 순전집중이다. 포기가
시골흙집에서 살아보기 위해 사는 이 없이 거의 10년째 방치해 허물어진 부뚜막을 손 보고 금이 간 바닥은 두께 15cm 넘게 황토몰탈로 덧씌웠지만 연기가 새는 듯하다. 기대한 대로 자고나면 상쾌해야 할 시골흙방에서의 잠자리는 그렇지 않았다. 개운치가 않다. 그래도 바닥은 뜨끈하고 하루를 때면 이틀 이상을 가니 열이나 시간에서나 매우 효율적이었기에 환기를 시켜가며 지내왔는데 동네 칠순 노부부가 나무로 때는 이런 방에서 밤새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덜컥 겁이 일었다. 아들이 듣고 이내 온돌을 흉내 낸 전기장판을 보내왔다. 시골흙집에서 드디어 살게 됐다는 기쁜 흥분은 잠시잠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생활로 접어들면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매사 그렇듯이 선택과 결정에서 온 부정이었다. 그리 야단을 떨고 서울을 떠나더니, 그리 법석대고 시골찬양으로 떠들어대더니 결국? 고작? 너도 별 수? 이런 류의 자기부정이었다. 심리이론에 인지부조화론이라는 게 있다. 틀리든 맞든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을 믿으려고만 한다는 인간의 심리가 내게는 이론조화론-남의 이론,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꿰맞추기-으로 치환돼 자기부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몇 달 겁 집어먹고 방치했던 부뚜막을
뜻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는 것은 손재주의 서투름이련만 손보다 급한 마음을 더 잡지 못하는 서두름에 어찌 해보질 못하고 손 탓만 한다. 똑같지 않는 데에만 연연하니 다르다고만 불평할 뿐. 다른 것이 어째 불평할 일이기만 한가. 서양의 카메라 루시다가 우리나라에도 그림에 이용됐다는 사실을 역사책이 아닌 그림책에서 본다. 카메라 루시다는 대상, 즉 인물 또는 사물을 똑같이 묘사하기 위해 카메라가 세상에 나오기 전 화가들이 애용했던 도구이다. 빛에 투사된 장면을 그대로 베끼는 일종의 복제기이다. 그동안 서양의 그림들만 보아왔는데 20세기 초 한국 땅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일을 한국책에서 확인한다. 반가워 보고 바로 따라 그렸다. 서울의 한옥도서관에서 먼저 흑백-펜화-으로 그린 뒤 집에 돌아와 채색했다. 일본의 건축가가 유럽을 돌며 스케치한 그림을 본 떠 봤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란다. 따라 그리기로 유럽을 다녀온다. 발 대신 손으로 자세히 둘러본다. 눈보다 손이 자세하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다. 후다닥 그린 흔적이 그림에 여실하다. 복잡한 대상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일까. 들킨 심사가 반영되었으리라. 동네 작은 도서관에선 ‘내가 만일’이란 노래가 흐르고 꽂힌 저마다의 책들 속에는 나름 아주 특별한 사랑들로 채워져 있다. 거짓말. 그런 사랑은, 그러니까 책에나 있고 영화에나 나오고 노래로나 대신하는 것이지. 있을 수 없는 것은 다 거짓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부정의 경우의 수를 늘려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못돼 먹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단정한 사랑을 또 기껏 책에서 찾아 나선다. ‘우리는 사랑일까.’ 그리고 ‘불륜’ 점심을 두 번 함께 한 젊은 도서관장에게 ‘불륜’(코엘료의 소설)만 내밀기 멋쩍었나, 알렝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를 불륜 속에 끼어 넣어 내미는데 컴퓨터로 빌린 자, 빌린 책을 확인하는 관장이 십일(대출기간)인데 연장해드릴까요, 묻는다. 아니요, 라고 했다가 바로 정정한다. “예.” 불륜을 연장하고 이것이 사랑일 것이라고 대답하는 듯한 표정을 짓
“그림을 그리려면 뭐든지 자연 자체를 그래도 옮겨라. ...... 자연은 그야말로 한 폭의 살아있는 커다란 그림이다.” (이탈리아 피렌체파 화가, 안드레아 델 사르토) 언젠가 내 글에 인용할 양으로 <나의 백과사전 3>에 옮겨 놓고는 사르토가 한 말대로 자연을 찾아 주변을 훑었다. 나비가 날고 있었다. 올해 처음 보는 나비다. 보고 그리려니 이미 딴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기꺼이 내 그림의 모델이 되어줄 생각은 없었다. 나비가 그랬는지 내 생각인지, 아무튼. 흘겨본 대로 스케치로 그려보기로 하자며 연필을 집는데 사르토의 말이 적힌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렇게 긴 소설인지 몰랐다.-꽤 두꺼운 책을 그래서 부러 외면하는데 자꾸 신경이 쓰인다. 나비는 쉽게 그려지겠지만 똑같이 따라 그려보기로 한 이상 원본이 없으니 핑계가 생겨난다. 나중에! 그러며 소세키를 다시 집어 들었다. “자네가 곧이곧대로 믿을 줄은 몰랐네. 하하하.” 이탈리아 화가가 한 말이 아니라 인용까지도 지어냈다는 글이 이어졌다. 그 ‘자네’는 나이기도 했다. 속았구나, 그냥 무턱대고 베껴 쓴다면?
현미경을 볼 수 없는 나는 누군가 대신 보고 그대로 재현해 그려놨을 염색체의 복제그림으로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다. 엿보는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나 감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림이 남(아버지)과 여(어머니)로부터 각각 23개씩의 염색체를 물려받아 46개의 염색체인 한 인간이 태어나게 된다고, 참으로 천연덕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애들 그림 같아서다. 너무나 간단하고도 명료해 보여서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 같이 다 다르고 같은 부모에게서 같은 23개의 염색체를 받았을 자식들마저도 다 다르거늘. 염색체는 색으로 표시돼 있다. 수정 되어 복제되기 전까지는 실(염색사)이었던 것이 모여 굵어져 염색체로 바뀐단다. 두 번의 분열(감수1분열, 감수2분열)로 모세포가 딸세포를 복제해내는 과정의 그림은 그 복잡한 생명의 탄생을 단순하게 그림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려니... ‘그런가?’가 아니라 ‘그런가 보네’로서의 이해로 드뷔시가 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음악은 음과 음 사이에 놓인 침묵이다.” 나는 음악을 그림으로 바꿔본다. “그림은 종이와 붓 또는 연필 사
사진을 보고 따라 그리려는데 선 하나로 마쳐야 할 그림인 줄 알건만 미덥지 못해 선을 얹고 또 얹으며 수정하려고만 한다. 지우개를 거의 쓰지 않는 성미라서지만... 결국 종이를 바꿔 새로 시작해보는데 이번엔 잡념이 끼어든다. 筆法雅妙 無一點俗氣 ‘잘 그려야지’가 ‘똑같이 그려내야지’로 둔갑한 욕심 때문이리라. 피아니스트 파스칼 드뷔용이 마스터클래스(개인레슨)에서 피아노를 더 잘 연주하고 싶어 왔을 한 학생에게 피아노는 옆으로 제켜놓은 듯 마음다스리기로 주어진 한 시간을 다 할애한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은 연신 훌쩍훌쩍 흐느낀다. 많이 떨었던 게다.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 자신에게 실망스러워서 울고 있는 것일 게다. 음악수업으로 들리지 않는다. 어깨와 손가락 그리고 손등의 뼈 움직임에 대해 마디마디 차근차근 일러주는 모습이 마치 체조 레슨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지난 2월 전북 남원에서 제2회 지리산 국제음악제가 열렸다. 음악콩구르에 참여한 학생들은 마스터클래스를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 비하면 참으로 시골다운 우리 마을에서 이런 국제음악제가 열리다니, 은근히 깔봄이 깔렸을 호기심에 들렸다가 되레 더 큰 수확을 얻었
새해 새로운 첫 연재를 시작합니다. 오동명의 ‘세밀화명상’입니다. 오랜 기간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또 광고기획 일을 했던, 그리고 기자로서 카메라를 맸던 오동명 작가의 연재입니다. 모진 세상풍파와 맞닥뜨렸던 그가 그의 ‘자존’을 지키고자 그의 손놀림으로 다듬었던 채색과 스케치를 곁들인 명상의 담론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된 2017년-. 우리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상식의 사회’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사진을 보고 그림을 따라 그리는데 그러라 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염화시중이 떠오른다. 중학생 호정이가 썩은 참나무 뿌리춤에서 방금 전 채집한 넓적사슴벌레의 애벌레를 손바닥에 얹고 손가락을 모아 감싼다. 추워서 죽을지 모른다며 체온으로 온도를 높여주기 위한 거라는 데 호정이의 따뜻한 마음도 보고 있는 내게로 전해온다. 동네도서관에서 그 때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리는데 손그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손재주로 인해 더딘 만큼 오히려 생각은 더 깊어진다. 아마추어의 힘이랄까. 태어나 처음으로 나무 깊숙이 박혀 유충시기를
새해 새로운 첫 연재를 시작합니다. 오동명의 ‘세밀화명상’입니다. 오랜 기간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또 광고기획 일을 했던, 그리고 기자로서 카메라를 맸던 오동명 작가의 연재입니다. 모진 세상풍파와 맞닥뜨렸던 그가 그의 ‘자존’을 지키고자 그의 손놀림으로 다듬었던 채색과 스케치를 곁들인 명상의 담론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된 2017년-. 우리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상식의 사회’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 매달 보내오는 작은 잡지에서 황태를 만났다. 황태가 간에 좋다는 등 흔하디흔한 요리정보의 글에서다. 다른 두 마리의 명태, 바싹 마르면서 사뭇 달라진 마른 명태를 따라 그려보기로 감히 작정하고 우선 연필을 든다. 따라 그려보려는 저의는 ‘단순하지만 매우 복잡한 대상을 내가 그려낼 수 있을까?’ 사실 도전이다. 말려진 생물들이 거의 그렇듯이 거의 비슷한 동일색들의 조합이라서 재생해내기가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도전이라 하며 짐짓 멈추게 하고 까짓 모험으로도 간주한다. 아마추어라서
새해 새로운 첫 연재를 시작합니다. 오동명의 ‘세밀화명상’입니다. 오랜 기간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또 광고기획 일을 했던, 그리고 기자로서 카메라를 맸던 오동명 작가의 연재입니다. 모진 세상풍파와 맞닥뜨렸던 그가 그의 ‘자존’을 지키고자 그의 손놀림으로 다듬었던 채색과 스케치를 곁들인 명상의 담론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된 2017년-. 우리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상식의 사회’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 따라하기는 여러 면에서 유용하고 유익하다. 하지만 유행과 같은 맹목적인 따라하기와는 구별해야 마땅하다. 멘토여야 하고 모델이 될 만한 것의 바탕에는 이성이 깔려 있다. 그 이성에는 자존감이 깃들어있다. 자존감이란 따라하더라도 그 따라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따라할 만하니 따라한다는 것은 따라하는 것만으로 그치게 하질 않는다. 따라함을 넘어서는 것에 따라하기의 힘이 있다. 그래서 따라하기의 전제에 무조건이 아닌 ‘제대로’가 붙는다. ‘제대로 따라하기’는 결코 똑같이 따라하기는 아니다. 반복의 순환,
새해 새로운 첫 연재를 시작합니다. 오동명의 ‘세밀화명상’입니다. 오랜 기간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또 광고기획 일을 했던, 그리고 기자로서 카메라를 맸던 오동명 작가의 연재입니다. 모진 세상풍파와 맞닥뜨렸던 그가 그의 ‘자존’을 지키고자 그의 손놀림으로 다듬었던 채색과 스케치를 곁들인 명상의 담론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된 2017년-. 우리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상식의 사회’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주경야독을 멋 좀 부려 주축야서(晝築夜書) 낮에는 벽돌 등 쌓으며 집짓기하고 밤에는 글쓰기하기로 마음먹고 실천한지 두 달이 거의 다 됐다. 계획과는 달리 글쓰기는 못했다. 낮에 다섯 시간쯤 마당에서 노동을 하고나면 지쳐 바로 눕게 되고 남의 책 읽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좋다. 60년 동안 장작불 지피는 부뚜막으로 쓰여 왔던 곳을 책들을 쌓아둘 공간으로 바꿔보겠다며 시작했는데 이런 노동을 안 해봤으니 서툰 건 당연하고 더딘 건 지당하다. 요령이 없어 힘든 것은 애초 예상했고 그대로였다. 공사는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시작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