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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세밀화명상(7) 표현할 수 없는 투명색 마음으로 표현하다

 새해 새로운 첫 연재를 시작합니다. 오동명의 ‘세밀화명상’입니다. 오랜 기간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또 광고기획 일을 했던, 그리고 기자로서 카메라를 맸던 오동명 작가의 연재입니다. 모진 세상풍파와 맞닥뜨렸던 그가 그의 ‘자존’을 지키고자 그의 손놀림으로 다듬었던 채색과 스케치를 곁들인 명상의 담론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된 2017년-. 우리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상식의 사회’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사진을 보고 그림을 따라 그리는데 그러라 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염화시중이 떠오른다. 중학생 호정이가 썩은 참나무 뿌리춤에서 방금 전 채집한 넓적사슴벌레의 애벌레를 손바닥에 얹고 손가락을 모아 감싼다. 추워서 죽을지 모른다며 체온으로 온도를 높여주기 위한 거라는 데 호정이의 따뜻한 마음도 보고 있는 내게로 전해온다. 동네도서관에서 그 때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리는데 손그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손재주로 인해 더딘 만큼 오히려 생각은 더 깊어진다. 아마추어의 힘이랄까.

 

태어나 처음으로 나무 깊숙이 박혀 유충시기를 보내는 애벌레를 보는 순간 그 신기함에 놀랐다. 단단한 나무 속에 더도덜도 아닌 딱 적당한 자기몸 크기만큼의 집안에서 번데기가 되기 위해, 또 성충으로 세상에 나오기 위해 긴 시간을 칩거하는 이 작은 생물에서 자연과의 친화로 느끼는 조화의 적절함. 인간의 확장된 소견으로는 좁디좁아 답답할 것 같은 공간에서의 한치 오차 없음의 엄격함.

 

초등학생 때부터 채집에 이력을 붙여온 승민·호정은 시큰이 보인다며 근처에 애벌레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처음 듣는 단어라 시큰이 뭐니, 물었다. 애벌레의 배설물이라는데 집에 돌아와 암만 찾아봐도 시큰의 정확한 뜻을 알아내지 못하고 ‘thicken’이 아닐까 어림잡는다.

 

따라 그림을 그리는 중에, 승민이와 호정이가 곤충을 채집하여 기르는 과정에서 자연의 순환을 자연스럽게 깨우쳤을 테고 자연의 정밀성 또한 자연스럽게 알았으리라는 추측을 해본다. 자연이나 문화체험이라 명명한 프로그램 따위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리라. 자연은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는 너무나도 지당한 말을 생각한다.

 

하루에도 세 시간 이상 게임을 한다는 민규도 나처럼 곤충채집은 처음이란다. 신기하다고 한 민규나 나나, “그 안에 들어있을 것 같지 않았는데 있네.” 동시합창을 한다. 상상이나 예상 밖의 것들과의 조우가 발견일진대 이런 발견이야말로 신기함의 다른 표현일 테다.

 

그러나 나무를 쪼개며 세 시간을 더 뒤졌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자연은 발견의 기쁨을 주지 않았다. 며칠 후의 채집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적당함, 적절함으로 자연의 정밀성임을 알아간다.

 

“우린 참나무 밑둥 하나에서 찾아낼 건 다 찾은 듯해.”

 

승민이가 나무 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는 말벌을 보고 하는 말이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이 학생들이야말로 자연과 더불어 참으로 건강하게 살고 있구나, 절로 감탄한다. 도회지 서울에서만 살아온 내게 육십이 되어 마주친 자연은 내겐 더없이 신기한 세계이며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장의 사진을 보고 그리지만 이런저런 상념들이 섞여 따라 흐른다. 그리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하지만 스쳐지나가는 상념들로 더 긴 시간을 보낸 듯하다. 세밀화명상은 이렇게 시간을 연장한다. 우주적인 시간만이 아니라 감성적인 시간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절대 죽여서는 안 돼.”
“그럼요.”

 

 

 

영하 1도의 추위에 장갑을 벗어낸 두 손으로 애벌레를 여전히 옹그려 감싸고 있는 호정이의 대답이 시원하고도 단호하다.

 

‘살아있어요.’

 

동그랗게 오그라져있던 애벌레가 먹이를 갉아먹기 위해 몸을 편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호정이의 마음을 느낀다. 기쁨과 소중함의 바탕엔 세세한 정성의 보살핌이 녹아있다. 기특하네, 내뱉는 내 입이 이심전심이다. 떨어져서도 염화시중이려니.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게 한다. 성충이 되려면 언제쯤? 물으니 올 9월엔 성충이 된 넓적사슴벌레를 보여줄 수 있을 거란다.

 

손으로 감싼 애벌레를 따라 그리는 내게 벌써 9월이 다가온다. 유충이 아닌 성충을 그리고 있을 나는 그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부처가 치켜든 연꽃을 보고 마하가섭이 대중 중에 유일하게 웃었다는 깨달음의 그 웃음을 나도 짓고 있지 않을까. 중학생의 따뜻한 마음씨와 생명존중의 씀씀이를 전해 받으며 따라 그리고 있을 것이다. 채집 후 일주일쯤 됐을까.

 

“저 게임 끊었어요.”

 

민규의 말이다.
이 중학생들과 나무 속의 작은 애벌레(그리고 자라 성충이 된)가 내 나이 환갑에 치룰 잔치의 손님이 되어 날 축하해주겠지. 환갑이란 인간이 만들어놓은 순환에 자연의 순환을 보태는 생명에의 잔치가 음식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지 않더라도 충분하고도 넉넉히 풍성할 듯하다.

 

‘이제 알듯이 살아야 하는 거야.’

 

나의 전 삶이 삶을 전혀 모르고 주어진 대로만 살아온 60년이었다면 다시 시작해주는 앞으로의 삶은 육체적 한 살과는 달라야 한다. 그렇구나.

 

‘이제 알듯이 사는 거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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