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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세밀화명상(6) 예순 나이에도 엄마 생각에 흘린 눈물자국

 새해 새로운 첫 연재를 시작합니다. 오동명의 ‘세밀화명상’입니다. 오랜 기간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또 광고기획 일을 했던, 그리고 기자로서 카메라를 맸던 오동명 작가의 연재입니다. 모진 세상풍파와 맞닥뜨렸던 그가 그의 ‘자존’을 지키고자 그의 손놀림으로 다듬었던 채색과 스케치를 곁들인 명상의 담론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된 2017년-. 우리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상식의 사회’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

 

매달 보내오는 작은 잡지에서 황태를 만났다. 황태가 간에 좋다는 등 흔하디흔한 요리정보의 글에서다. 다른 두 마리의 명태, 바싹 마르면서 사뭇 달라진 마른 명태를 따라 그려보기로 감히 작정하고 우선 연필을 든다.

 

따라 그려보려는 저의는 ‘단순하지만 매우 복잡한 대상을 내가 그려낼 수 있을까?’ 사실 도전이다. 말려진 생물들이 거의 그렇듯이 거의 비슷한 동일색들의 조합이라서 재생해내기가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도전이라 하며 짐짓 멈추게 하고 까짓 모험으로도 간주한다.

 

아마추어라서다. 비슷한 것에서 다름을 찾아내는 일은 다른 것 끼리에서의 차이 찾기보다 결코 수월치 않다. 그래서 도전이요, 해낼 수 있을까 주저하게 되니 모험이다. 오지 아프리카나 현대인의 발이 닿은 적 없을 인도네시아 자바섬 주변으로의 여행만이 도전이요 모험은 아니다. 암튼...

 

 

 

글에 명태가 황태로 바뀌어가는 과정이 자세히 적혀있다. 그 말림과정에서 영양분도 늘어난단다. 그리고 오래 보존할 수 있어서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옛사람들의 지혜도 담겼단다. 그런데 그 인간의 지혜가 나에겐 어째서 인간의 욕심으로 보일까. 말려지는 과정을 생각하니 그렇다.

 

그렇게까지 해서 먹고자 하는 인간? 부정한 생각에서 출발하지만 내가 냉장고와 세탁기 없이 사는 이유와 엇비슷한 생활에서 그럴 것이다. 나이 들며 어느 날, 저장해두고까지 먹으려는 적극성이 왠지 탐욕처럼도 여겨지고 굳이 강의 오염을 의식치 않더라도 때 묻으면 그때그때 손으로 빨아 입으면 되지, 뭐 이러면서 몸을 더 움직여보자는 기계의존탈피의 단순의도가 나의 사고를 긍정적이게 해서다. 이 긍정은 발전해 그 적극성이나 능동성을 다른 데에 쏟아보자고 자극한다.

 

따라 그리며 인간의 지혜에 의해 말라져가는 생태였던 명태가 가여워지는 것은 단지 감정이입의 즉흥만은 아니다. 물속에서 평생 살았지만 흙색으로 변해있는 명태에서 물속 생물 역시 종국엔 흙으로 가는구나, 짧은 깨달음이랄까. 생각지 못한 데서 깨달음은 다가오고 깨달음은 또 예상치 못한 죽음의 의미로까지 확대된다. 미천한 명태 두 마리가 나의 사후는? 거창한 질문으로 유인했다고 하면 억지일까. 마른 황태의 흙색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이끈다.

 

명태는 이름이 없었다. 명태가 잡히는 동해안 쪽 사람들이 임금에게 이 이름 없는 생선을 올렸다. 맛있게 먹은 임금은 이름이 궁금했다. 이름이 뭔고? 아무도 모른다. 임금이 이름을 붙여주니 비로서 이름 없는 생물이 자기 이름을 갖게 된다.

 

“명태라고 하라.”

 

이 생선을 임금에게 바친 사람의 성이 명씨였다나? 명태를 그저 말리니 북어라는 이름을 얻었고 눈바람에 얼리고 녹이기를 겨울 내내 하고나니 황태란 이름도 얻었다. 대관령 황태를 달리 불러 관태라고도 한다. 꽁꽁 언 명태는 동태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 같은 명태다. 남의 글에서 읽은 명태가 마른 황태에게서 떠오르고, 명태라는 가곡도 굳이 CD를 돌리지 않고도 듣는다. 따라 그림을 그리다보면 잡념이 많아지는데 이 잡념이 나를 편하게 한다. 연필로 그린 후 색을 덧얹으려할 즈음이다.

 

북어국을 끓여줘야겠구나. 엄마 혼자 하는 말이지만 엄마의 등에 업혀 울고 있던 나는 분명히 들었다. 놀랬지 우리 아들. 태권도장에 다닌 지 십일쯤 됐을 때다. 오른 손을 쭈욱 뻗어 올려봐봐, 엄마. 두발차기로 높이 치켜세운 엄마의 손을 차내고 말겠다는 욕심이었다. 해내고 말았다.

 

과욕은 화를 일으키고 만다. 과분한 욕심이 몸을 띄워 공중 높이 날릴 순 있었지만 너무나 올라가버린 몸은 공중에서 제켜지며 결국 내 머리를 방바닥에 내리꽂게 하고 말았다. 입가에 흥건히 피가 흘렀고 사십대 후반인 엄마는 나를 이내 등에 업고는 내리 달렸다. 먼 후에 확인했는데 무려 2km쯤 되는 먼 거리였다. 엄만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짊어진 것 없는 맨 몸으로 달려도 몇 번은 쉬어야 할 거리인데도.

 

지금 예순을 넘긴 나의 아랫입술에 그 자국이 남아있다. 엄마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등 아래의 내 궁둥이를 중단 없이 도닥여줬다. 간이 콩알 만해지고 창피란 것도 느낄 줄 아는 나이였던 때라 쪽팔렸던 내게 엄마는 북어국을 끓여주셨다. 명태가 간에 좋은지, 또 어떤 영양분으로 진정을 시켜주는지 글로는 몰랐을 일자무식 내 엄마는 엄마 나이 예순 즈음, 지금 내 나이쯤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은행 가면 창피하다. 내 이름 석자는 쓸 줄 알아야겠다. 아버지에게 내내 의존하고만 살 수는 없다는 게 그때의 엄마였다. 마땅히 내가 가르쳐드렸어야 했다. 하지만 가족 외 다른 분이 가르쳐주셨고 예순을 한참 넘어서야 쉽게 만들었다는 한글을 깨치셨다. 이런 일자무식 엄마가 자식인 우리들은 창피했던 걸까. 자식 7남매 중 엄마나 아버지 일을 잘 도와준 편인 내가 왜 엄마를 가르쳐드리지 못했을까.

 

눈물이 그림 황태 위로 뚝 떨어진다. 오십 년 전 열 살 꼬마는 다친 상처가 아파서 울고, 오십 년 후 예순 환갑의 초로는 없는 엄마를 불러보며 마음 그립고 가슴 아려서 운다. 이제 엄마는 없다. 엄마는 이 황태처럼 서서히 흙으로 변하며 자연으로 되돌아가시지도 못했다. 화장이 제일 깔끔해. 엄마를 뒤이어 8개월 만에 아버지도 따라 돌아가셨다. 종교를 갖고 살진 않지만 난 내가 죽으면 가 있을 달님에 엄마도 아버지도 미리 가 계신 것쯤으로 그저 믿고 있다. 그래서 달님만 보면 내 의식도 들기 전에 무조건반사로 달님 앞에 두 손이 모아진다.

 

부모님께 매일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일이 부질없는 줄을 알면서 거르질 못하는 것은 그때마다 드는 후회나 반성이 앞으로의 내 삶은 어때야 한다고 묵언으로의 가르침이 되어 지금을 행동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말라빠져 쪼그라든 황태 두 마리가 엄마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내 삶을 이끄는데......

 

내게서 역사나 글쓰기를 배우고 있는 중학생들에게 선물한 공책 표지에 적은 글귀 그대로다.

 

‘이왕 포대나계(已往 抱大羅計)’

 

포대나계는 우리가 많이 쓰는 ‘뽀대나게(폼나게)’를 멋 좀 부려 한자로 바꿔 썼다. 내멋대로 한작한 ‘抱大羅計(포대나계)’는 ‘가슴에 크게 뜻을 품고 계획대로 펼쳐 나아간다.’이다.

 

已往 抱大羅計
‘이왕 태어난 거 뽀대나게 살다가 가자!’

 

나의 ‘뽀대나게’는 어쨌든 덜 부끄럽게 사는 것, 그래도 당당하게 사는 것, 그러자니 편의에 타협하지 말자, 편리에 순응만하고 살진 말자, 이다. 아쉬움 덜 갖고 죽기...려니. 부끄러운 일 그래도 덜 해서 다행이다, 라는 마음 갖고 내 마음의 종교인 저 달님에게로, 부모님 계신 곳으로 가고 싶다. 거창한가?

 

놀랬지, 우리 아들?

 

엄마는 죽어서도 이렇게 지금 살아있고 나도 죽어서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다면, 뭘 더 바랄 게 있겠나. 이것이야말로 ‘뽀대나게 산 삶’ 아니겠나.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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