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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세밀화명상(1) 필법아묘(筆法雅妙) 속기무일점(俗氣無一點)

 새해 새로운 첫 연재를 시작합니다. 오동명의 ‘세밀화명상’입니다. 오랜 기간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또 광고기획 일을 했던, 그리고 기자로서 카메라를 맸던 오동명 작가의 연재입니다. 모진 세상풍파와 맞닥뜨렸던 그가 그의 ‘자존’을 지키고자 그의 손놀림으로 다듬었던 채색과 스케치를 곁들인 명상의 담론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된 2017년-. 우리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상식의 사회’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살 때가 있었다. 독자우선이라고 주장하는 신문사는 제 신문에 정론을 펼치겠다는 기자강령을 1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하면서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그런 신문사의 기자로 살던 때였다. 불행하게도(?) 양심이란 게 남아있던 때라, 아니 다행히도 쪽팔린다는 게 뭔지는 알고 있던 때라 데스크(부장 등 신문사 간부)에게,

 

“현장과는 다른 기사와 사진입니다.”

 

하지만 일선 기자, 더욱이 일개 사진기자는 학교나 책에서 배운 정도(正道)의 언론에 대해 그저 무기력한 존재, 그냥 위에서 시키거나 사건 현장에 가기도 전에 이미 정해진 편집방향이나 의도를 눈치껏 맞춰주는 기계적인 민완기자로 자족하라고, 자족해야만 한다고, 그래야 편하고 따라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굴종의 미학을 하루에도 수차례나 타협의 ‘적당히’로 나를 유혹하곤 했다.

 

역사를 처음 배울 때부터 익히 들어온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정권은 그 후 500년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지혜로운 처세나 둥글게 살아라는 두루뭉술한 처신의 바른생활 모범이 되어 나의 모든 행동을 옭죄어 왔는데 내 이름 뒤에 따라붙는 기자라는 직업은 그런 처세나 처신에 대해 왠지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신자각을 품게 했다.

 

 

기자로 살기 시작하면서 갈등도 함께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연말이 되면 1400%나 되는 보너스에 특별보너스까지, 웬만한 중소기업체의 연봉에 가까운 거액의 월급 외 별도 성과금(부장의 판단 하나만으로 결정되는 고과에 따라)에서 거의 늘 최하의 푸대접을 받고나면 타협에 타협하지 못하던 나는 그 타협을 긍정의 힘으로까지 변질·전환하고, ‘좋은 게 좋은 것’ 어려서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 익숙한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대충 섞여 어울려 사는 게 긍정의 지혜로 발전하고 만다.

 

그러나 이런 따위의 타협이나 억지 긍정은 곧 무너지고 마는데, 미련한 천성은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어차피 바뀌지 않는데, 바꾸려는 게 더 스트레스를 주는데 ‘생겨먹은 대로 살자’ 하며,

 

“내 이름은 빼주시죠. 내가 찍지도, 더구나 쓰지도 않았는데......”

 

타 신문사에서 얻어온 사진과 현장에 있지도 않은 사회부나 정치부 기자 후배가 쓴, 현장과는 거의 반대나 다름없는 기사에 맞춰진 글인 사진캡션(사진에 붙는 짧은 기사)에 대해 부장에게 강도를 높여 정중하게 저항한다. 역시 돌아오는 것은,

 

“너, 기자 맞아?”

 

또 1000만원까지도 차이가 나는 보너스가 순간 날아가는 게 보였다. 때로는 일찍 퇴근이 강요되는 행운(? 따져대는 놈을 없애놓고 뭘 해도 편할 테니)도 얻긴 하지만.

 

이런 신문사, 당연히 다니기 싫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제파악만은 잘 하는 나는 내 스스로에게 묻곤 했는데,

 

“그래. 신문사 그만두면 뭐하고 살 건데? 뭘 할 수 있는데 니가?”

 

스트레스임이 분명했다. 해서 생겨난 게 ‘단순해지자’였고, 해서 하게 된 게 스트레스라 여기면 바로 무엇인가를 손에 짚고 그리거나 만들었다. 그러자면 오히려 내게 스태미너가 되어줬다. 스트레스꺼리는 바로 잊고 이젠 신이 났다.

 

굽히지 않고 살아도 신명나는, 그래서 얻은 게 취미인데, 이 취미의 제목을 ‘세밀화명상’ 또는 ‘세밀화수양’이라고 내멋대로 불러보곤 하는데, 정작 그런 신문사를 그만두고, 그러했던 기자란 직업을 때려치우고 난 뒤에는 이 ‘세밀화명상’은 나의 새로운 삶을 견인하며 타협하지 못하는 성질을 나름 정신(나를 세워주는 정신)으로 내 삶과 생활을 공고하게 해주고 있다. 스트레스해소용으로 시작한 4B 연필이나 펜으로 종이에 그리거나 조각칼로 돌을 새기는 작은 작업이 ‘이제 앞으로 남은 삶은 어떻게 살자’라는 삶의 행동지침이 되어주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가? 실천적 철학의 주체자가 되어줬다는 것이 절대 과장이 아니다. 이러한 ‘나를 세우며 살기’의 이 ‘세우기’는 흔들림이 없기에 아집이나 고집으로 남에게 보일 테고 미련둥이로 볼 테지만 주변에 휘둘리지 않는 삶으로 나의 말년을 더 즐겁고 기쁘면서도 의미나 보람도 갖게 해준다.

 

진정한 생세지락(生世之樂, 이왕 태어난 거, 당당함으로써 즐겁게)

 

나는 여러분과 같이 그림과 조각 따위의 학습은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시간에서 배운 게 고작이다. 문외한이지만 그리고 있거나 조각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한없이 기뻐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고 이런 나를 자랑하고 싶게 만들면서 결국 나를 또 즐겁게 해주는 즐거움의 순순환의 연속을 만끽한다. 잘 그리고 멋지게 새겨서가 아니다. 오히려 서툴다고 해야 더 잘 맞다. 하지만 연필이나 펜, 또는 조각도를 손에 들고 있을 때 내 가슴을 자연스럽게 절로 채우는 것은 집중, 바로 몰입의 단순함이다.

 

‘내가 무언가에 빠져있구나!’

 

이 단순함의 힘은 바로 쏠림이며 쏟음이다. 이러면서 저절로 품게 되는 자족의 흡족함은 나를 절로 웃게 만드는데... 이러면서 ‘단순하라’했던 샤르트르의 자발적 수제자가 된다. 이래서 더러 또는 때로 힘들 때일수록 술잔 대신 연필과 공책과 조각도와 돌을 찾는다. 비록 기량으로 무디무딘 초보아마추어지만 ‘筆法雅妙, 俗氣無一點(필법아묘, 속기무일점=그림이나 글이 우아하고 묘한 기운이 있지만 세상 때묻은 기운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이나 서투름에 자족할 수 있는 것은 손끝의 재주가 아닌 가슴으로 먼저 더듬어 그리려했기 때문이리라.

 

 

힐링이란 말이 요즘 유행하는데 치유라는, 모든 이를 다 환자로 취급하는 용어보다는 더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일 ‘명상’ ‘수양’으로 이름을 붙여본다. 더구나 ‘세밀화명상’은 비싼 돈 주고 사방 콱 막힌 답답한 곳에 갇혀 하는 명상이나 수양이 아니라 마음만 잡으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돈 별로 들이지 않고도 바로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더 권하고자 한다.

 

그 안내 정도의 책으로 여러분이 삼아보심이 어떨까 싶어 세상에 내놓고자 했다. 작은 종이 위의 그림들과 조그만 돌 위의 새김이 지금은 제법 뻔뻔스러워져서 집을 고쳐보는 데로 덩치 크게 발전해가고 있다. 소목이 대목이 되어간다고 할까. 지금 짓고 있는 집은 지은 지 70년 된 시골흙집으로 서당으로 쓸 양으로 고쳐가고 있는데 한 달 전엔 거의 구들장이 무너져 쓸모없는 부뚜막을 나 혼자 손을 봐서 ‘부뚜막도서관’을 만들어냈고 마침 오늘은 외풍이 심한 옛 한옥헌집에 외벽을 쌓고 통유리까지 달아 매우 현대적인 카페 같은 집으로 개조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몽땅 부숴 조립식주택으로 완전 바꾸며 옛 것을 말살하려는 집주인에게 내가 고쳐 살겠다고 해서, 그 3년 후 지금 구입하여 당당한 내 집으로, 훗날 내가 죽고 난 뒤에는 이 동네 아이들이나 아주머니·할머니·할아버지도 드나들며 책을 읽고 차도 마시는 ‘책보며 노는 서당’으로 남게 되길 소망하며 하나씩 조금씩 고쳐 나아가고 있다. 그 바탕이 되어준 게 다름 아닌 바로 이 ‘세밀화명상’이다.

 

이 부뚜막도서관의 창을 바람막이하기 위해 창호지를 붙였는데 이 창호지 위에도 나의 서툰 그러나 그저 한없이 흐뭇한 세밀화를 그려 넣었다. 이 그림부터 ‘세밀화명상’을 시작해볼까 한다.

 

“행복한 생활은 덕이 있는 활동이고 이것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고귀한 덕에 이르는 이성의 활동은 관조적인데 이 활동이 최선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만족감이 가장 큰 것도 관조의 활동이다. 그래서 친구가 없어도 관조할 줄 아는 그는 스스로 가장 만족할 수 있다. 행복은 한가함 속에도 있다. 우리가 바쁘게 일하는 것은 한가함을 얻기 위해서다. 바로 이성의 활동은 관조하는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진지함에 그 가치가 있다. 그 자신에게 고유한 즐거움, 스스로 만족함, 한가함, 진지함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행복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활동은 모든 생애에 걸쳐 이루어져야 한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신을 영원한 존재가 되게 하고 자신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따라 살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

 

이 연재가 비록 작고 적지만 위와 같이 될 수 있게 이끌어줄 것을 확신하며 이 연재로 독자 여러분의 삶 또한 우아하고 고귀해질 수 있길 바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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