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지난 7월 27일의 일기장에는 “봉택이 어멍은 죽어시냐?”라는 어머니의 물음이 적혀 있다. 만 하루와 반나절, 거의 36시간의 기나긴 꿈의 여정을 마치고서 홀연히 눈을 뜨신 어머니가 처음으로 내뱉으신 소리다.
나를 보시자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시면서, 마치 오랜만에 만난 귀한 자식 대하듯 절실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바라보신다. 하마터면 못 볼 뻔한 것처럼 반가움과 간절함이 가득하다.
“어머니, 봉택이 어멍 죽은 지가 언제우꽈? 40년도 더 되수게? 어머니는 어디 갔단 오십디강? 봉택이 어멍은 만나봅디가?” 그러자 어느새 제 정신이 드셨는지 시선을 천장으로 돌리신다. 그사이에 무척이나 수척해지셨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얼굴에 쓸쓸한 그림자가 잠깐 어른거리다가 사라진다. ‘봉택이 어멍은 어머니 조캔디, 어머니보다 먼저 죽으민 됩니까? 섯동네 우잣(텃밭) 넓은 집에 아들네영 손지들 거느리멍 막 잘 사는 거 닮음디다….’라고 이야기를 지어낼 걸 그랬나?
아니, 어머니는 알고 계신 거다. 봉택이 어멍이 죽은 것도, 물질하러 바당에 갔다가 혼자서 숨을 거둔 것도. 어쩌면 ‘망실이에 소주병을 남겨놓고, 작정하고서 남편이 있는 하늘길로 홀연히 떠났구나’ 생각하고 있는지도.
대포마을의 역사가 기록된 ‘큰갯마을'(2001)에 의하면 1948년 11월 19일 중문 신작로(대수구우영)에서 벌어진 서청의 집단학살에 의해 중문면 일대에서 18명이 한꺼번에 주검이 되었다.
어머니는 봉택이 아방을 말할 때면, 언제나 그 앞에다 ‘대포 1등 청년’이란 수식어를 덧붙이곤 하였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당신 나름의 애도이자 봉택이 어멍의 억울함을 절실하게 공감하는 표현이기도 하였다. 사실이 그랬다.
어릴 적에는 한 동네에서 처녀 총각이 만나서 결혼하는 것을 보면, ‘아하!’ 하는 탄성이 나올 만큼 절묘하게 어울리는 한 쌍이곤 하였으니까. 그런 결혼식에는 저녁쯤에 신부가 친지들로부터 받은 한복을 일일이 입어보는 게 관례였는데,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자랑하는 게 밉기는커녕 보기가 참으로 좋았다.
그렇게 옷을 다 입어 보인 신부가 관중에 대한 답례로 ‘신부 떡’이라는 반달 절편을 일일이 나눠주었으니까…. 어쩌면 옷을 많이 받은 신부네 곤떡은 좀 더 두텁거나 컸는지 모르겠다. 끄덕끄덕 졸다가도 그 떡 하나를 받아 들고서 신바람 나게 집으로 달려오던 날은 일 년 중 운수가 가장 좋은 날 중 하루였다. 봉택이와 누이의 외모로 추측하건대, 그 어멍과 아방도 그러한 선남선녀의 한 짝이었으리라.
어쩌면 어머니는 꿈속에서 봉택이 어멍을 만나서 ‘자식 보고 사는 게 여자 팔자’라고, ‘살당 보민 다 살아진다’라면서 부둥켜안고 울었을 것이다. “조캐야, 호다(부디) 울지 말라. 살암시민 다 살아진다. 니네 어멍도 우리 어멍도 아방 어시 우리 키우멍, 자식들 입속으로 숟가락 들락거리는 거 보멍 웃어신예”라고 달랬을 것이다.
문제는 어머니의 물음에 내 가슴이 무너지는 현실이다. 갑자기 표정을 바꾼 어머니가 다급하게 소리치신다. “정옥아! 바당에 강 매역새 좀 봉강(주워) 오라. 제게(빨리) 가라. 놈들 다 해분다….”라고. 어머니의 마음은 지금 바다에 가 있는 게다. 밤새 봉택이 어멍을 따라 바다를 헤매고 다니면서, 마음도 미역에 가 있었으리라. 그리고 ‘미역새(미역의 어린 순처럼 생긴 해조류로, 미역과는 달리 얕은 물가의 바위에 김처럼 붙어 있는 해조류)를 뜯어다가 말려서 다음 장날엔 팔아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미치자 마음이 다급해지셨으리라.
그 당시 대포마을과 같은 농어촌의 아이들은 철을 따라 들과 바다로 나가서 고사리‧꽁마늘‧미역새 같은 것들을 채취해다가 팔아서 학용품을 사기도 하였다. 가끔은 지네도 잡고, 추수하다 떨어뜨린 고구마도 주웠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일깨워줄 수 있는 교훈이란 ‘부지런허민 하늘이 도와준다!’라는 경험이었으리라.
오늘은 어머니께서 9시쯤 일어나셨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면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소리에, 게다가 우당탕퉁탕 뛰어다니면서 문을 닫는 소리가 겹치니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으셨던 거다. 방안에 들여다 놓은 요강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얼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세상에! 어머니가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소변을 하고 계신다. 아직도 이 생리작용을 함에 있어서는 방안이 낯설고, 그 뒤처리를 해야 하는 딸에게 미안하시다.
내 손을 마주 잡으시더니, 뜬금없이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정옥아, 울지 말라 이! 니만 못 헌 사람들도 한한했져(많이 있단다)... 살암시민 살아진다. 다 살아진다! 아이들 영양가 이신 거 멕여주라. 돼지고기도 삶아주곡....” 아, 어머니는 나를 통해서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보다 못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살다 보면 다 살아질 텐데, 아이들에게 돼지고기도 실컷 먹여주지 못했구나….’ 라는 그 속 마음을.
어제는 서귀포 오일장이라 언니가 돼지고기 앞다리와 풀빵을 사 왔다. 그 묵직하게 크고 먹음직스럽게 두툼한 고기를 보자, 어머니의 얼굴이 갑자기 화안해졌다. “정심아, 어떵(어떻게) 나 모음(마음) 속에 들어온 거추룩 알안(알아서) 이추룩(이렇게) 나가 꼭 사구정 헌(사고싶은) 괴기를 사와시니게! 고맙다. 이! 나는 니네들 아홉 성제(형제) 키울 때, 새 옷도 못 입지고(입히고), 좋은 것도 못 멕이곡, 고생만 고생만 시켜진 거 닮은디.... 니영 정옥이영 데령 모슬포장 중문장 서귀포장 댕기멍 메역장사 시킬 때도 그 먹구정 헌 풀 떡 하나를 못 사주고…. 점심도 못 멕이곡 서둘렁 집으로 돌아 왕, 어그라(곧바로) 태왁 짊어 정 와랑와랑 바당더레 내돌아신예. 그때는 무사 경 사는 것이 숨 넘어가게 바쁘던고....”
“아고, 어머니 무슨 소리우꽈? 다 잊어부렀구나 예? 매역 장시 끝나민 어머니가 우리한테 백 원씩 줘수게. 그거 가정(가지고) 강(가서) 풀떡 상(사서) 먹으랜 허멍 마씸. 경 헌디(그런데) 우리 생각에도 제게(빨리) 버스 탕(타고) 집에 가사 어머니가 물질 갈 거난..... 어머니 조름(뒤)에) 바짝 붙언 어그라(바로) 집으로 왔주.... 그땐 우리만 경(그렇게) 산 게 아니고, 다들 경 살아수게. 경 해도 어머닌 목숨 걸고 그 물질 허멍 우리를 고등학교 마당에 보내 주시난, 어머니 꿈대로 우리가 물질 안 허곡 농사 안 짓곡, 도시에서 이추룩 놀멍 쉬멍 살암수게.... 어머니가 우리 위해연 고생 하영 해수다. 고맙수다 예, 우리 어머니!”
언강(애교) 좋은 언니가 어머니를 덥썩 안아드리자, 어머니가 애기처럼 환하게 웃으신다. 103세 어머니는 3살 아기를 닮았다. 몸도 작아지고 얼굴도 작아지고 손발도 작아지고..... 그 시절 당신의 고생은 다 잊으시고, 우리를 고생시킨 기억만 안고 계신다. 당신의 창으로 자식을 바라보니, 그때의 고생이 생각나고 자식들에게 못 해준 것만 떠올라서 저리도 가슴이 아프신 게다. 그래서 당신처럼 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는 거다.

비가 그친 창밖을 바라보시면서 어머니가 한 말씀을 하신다. “오늘은 보름도 엇고, 뱉도 안 나고, 비고 안 오고, 일 허기만 첨 좋은 날이여, 이!
마침 오늘 아침 신문에 나온 한용운 시인(1879-1944)의 ‘나의 꿈’을 어머니께 올려드린다. 어머니 말씀처럼 ‘나만 못 한 사람들도 많거니….’ 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내 속으로 선선한 바람이 스며들지 않을까, 미안해지겠거니.
당신의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적은 별이 되야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것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야서 당신의 주위를 떠돌것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어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따람이가 되야서 책상 밑에서 ‘귀똘귀똘’ 울것습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