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가을 운동회 – 오, 사랑이여!

  • 등록 2022.10.24 10: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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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이제는 다 살았다 (3)

오늘은 교회에서 전교인 체육대회를 하는 날이다. 100세 어머니가 가실 수 있을까? 아니, 가도 좋을까? 아침부터 이 생각이 갈까와 말까 사이를 방황하게 한다. 어쩌면 어머니에게는 이 가을이 생애의 마지막 운동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소풍도 아니고 운동회인데.... 민폐가 되지는 않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죽어도 교회에 가서 죽겠다’고 하신다. 언제나 일요일이 되면 교회로 앞장서시는 분이 아니신가. 반쯤 긍정의 문을 열고서 어머니에게 가을 코트를 입히려는 찰나, 핸드폰이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전한다. 각 구역별로 장소를 정해서 점심을 먹는데, 우리 구역은 돗자리가 없어서 불편하다고..., 그러니 집에 있는 비닐 깔판을 들고서 빨리 달려오란다.

 

구역(성도들의 주소지별로 적정 인원을 그룹지어서 편성된 구역의 책임자)의 장을 하는 아빠의 저음이 오늘은 높은 음자리의 테너 목소리다. ‘와아〜 잘 됐다. 명분이 생겼네!’ 하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매트리스를 찾았다. 혹시나 싶어서 담요도 챙겨 싣고서, 가벼운 마음으로 운동장으로 달린다.

 

어디 좋은 데 가나 보다 싶은 어머니의 얼굴이 아침햇살을 받고서 한 살 아기처럼 빛난다. 하기야 백 세 할머니는 한 살 아기와 다름 없는 동심이 아닌가.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드높은 아침. 누가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하였나.

 

말처럼 신나게 달려볼까 싶은데... 어떻게 내 기분을 아셨을까? 어머니가 마구 박수를 친다. 드라이브 가기 전에 “어서 가자 Go”를 재촉하는 어머니의 신호다. 왠지 모를 특별한 분위기를 감지하신 듯, 신바람이 나셨다. 때마침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얼굴을 간질인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가을은 너무도 예뻐서 우리의 얼굴을 단풍색으로 물들인다.

 

“가을은 참 예쁘다. 하루 하루가 코스모스 바람을 친구라고 부르네. 가을은 참 예쁘다. 파란 하늘이 너도 나도 하늘의 구름 같이 흐르네. 조각조각 흰구름도 나를 반가워 새하얀 미소짓고, 그 소식 전해 줄 한가로운 그대 얼굴은 해바라기. 나는 가을이 좋다, 낙엽 밟으니.... 사랑하는 사람들 단풍 같이 물들어” 박강수는 어쩌다 ‘가을은 참 예쁘다’는 노래를 불러서, 가을 아침의 우리 가슴을 이토록 아롱지게 하는가. 오, 주여! 이 가을에는 원없이 한도 없이 사랑을 다하게 하소서......

 

 

아, 오늘은 운동회가 아니라 왠지 소풍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 소풍 날에는 간식을 준비해야겠지? 중간에 차를 세우고 편의점에 들렀다. 새우깡, 맛짱구, 오징어땅콩, 맛동산, 오감자..., 그리고 사이다. 한아름의 과자를 안은 어머니의 얼굴이 보름빵처럼 둥글다. 오늘도 어머니 생애의 잊을 수 없는 그날이 되려나....

 

어머니는 학교의 소풍이나 운동회 날이면 쌀밥을 지으셨다. 쌀밥 하나로, 날마다 보리밥의 평범함을 넘어서 특별한 그날이 된다. 그런데 교회의 소풍에는 예외적으로 쌀에다 팥이나 콩을 넣으셨다. 어쩌면 김밥을 싸는 게 익숙치 않은 어머니의 궁리가 담긴 대책인지 모르겠다.

 

김밥처럼 다채롭진 않지만 팥물이 배어들어서 보라색이나 분홍색이 된 곤밥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다. 그 예쁜 밥을 한 낭푼이 듬뿍 싸서,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아이들에게 슬그머니 내어 주시는 손길. 그 팥밥의 구수한 냄새와 달콤한 맛, 정성과 배려가 담긴 따뜻함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아도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리고 어느새 혀 밑에서 솟아나는 군침이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아, 밥 냄새만으로도 그지없이 행복했던 시절이여!

 

그런데 반찬은 언제나 고등어구이였던 것 같다. 학교 운동회, 우리들 소풍, 교회의 야외예배에도 예외가 없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어머니의 고민이 깃들인 선택인 듯 하다. 옥돔은 11월의 늦가을부터 5월까지 제철인데다, 제사상이나 특별한 선물에 주로 쓰였다.

 

비싼 몸 값을 자랑하려는지, 고등어나 방어처럼 그물에 떼지어서 잡혀 들어오는 게 아니라, 낚시로 하나하나 유인해야 못이기는 척 끌려오는 생선이다. 그만큼 귀해서 가격 또한 제값을 한다. 제사상이나 귀한 손님의 밥상에 올려져서 제주의 대표 특산물로 브랜드 효과를 빛내면서 말이다.

 

대신에 고등어는 9월에서 2월까지가 제철이지만, 연중 내내 우리들 밥상에 아무 때나 오를 수 있다. 그만큼 대량어획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물론 ‘가을 배와 고등어는 며느리에게 주지 않는다'라는 속담처럼 가을철(9월 초~11월 말)에 잡힌 것이 가장 일품이긴 하다.

 

게다가 고등어는 지방이 많아서 기름지고 풍부한 감칠맛을 내며, 다양하게 요리하여 먹을 수 있는 다기능 생선이다. 쇠고기와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단백질이 풍부하다. 오메가-3 지방산(DHA, EPA)이 풍부해 아이들의 두뇌 발달과 노인들의 치매 및 심혈관 질환 예방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비타민 A, D, 철분, 미네랄, 아미노산 등 다양한 성분들이 함유되어 있어서 남녀노소 모두에게 필수불가결한 효능을 제공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고등어를 선택하셨을 리는 만무하건만, 옥돔만을 ‘생선’이라 부르면서도 정작 필요시에는 고등어를 고집하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봄소풍으로 기억된다. 당시 중문면 일대의 주민들은 ‘봄소풍’하면 으레 중문백사장을 그 장소로 여겼다.

 

중문초등학교에서 신작로를 거쳐 천제연 다리를 지나면 가시덤불과 거칠은 돌산 틈새의 돌짝길을 넘어가야 하였다. 지금은 관광단지로 개발되어 여미지 식물원과 야자수가 늘어진 도로, 잘 가꾸어진 호텔들이 고품격과 안락함으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연출하고 있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그야말로 소풍길이 귀양길처럼 멀고도 험하였다. 돌짝길, 자갈길, 가시밭길에 땡볕이 내리쬐니 소풍장소에 도착할 즈음이면 어느새 녹초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그당시 중문백사장 뒤편으로 솟아 있던 모래 봉우리를 쏜살같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마치 홍길동처럼 위에서 번쩍 아래서 번쩍 하는 재미를 즐겼다. 그리고 봉우리에 숨겨놓은 보물을 찾는 게 군침나는 놀이요 횡재이기도 하였다.

 

어렸을 적의 운동회를 회상하며 그리움과 즐거움에 빠져드는 사이에, 자동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운동장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거운 동심으로 가득해 보인다. 가을 햇살에 빛나는 얼굴들이 티 없이 해맑고도 영롱하다.

 

그래서 ‘딸 손자는 가을볕에 놀리고 아들 손자는 봄볕에 놀린다’는 말이 생겼나 보다. 땡볕으로 내리쬐는 봄볕에 그을면 보던 님도 몰라볼 정도로 살갗이 거칠어지지만, 가을볕은 과일을 익혀내는 온유함과 넉넉함이 있어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태우지는 않는다.

 

마음껏 누려도 좋은 가을볕 아래서 운동장을 단풍처럼 물들이면서 신나게 놀이에 빠져 있는 사람들.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하늘을 나는 새처럼 운동장 위를 가로질러 게임하는 선수들과 본부석 위의 선물더미에 화살처럼 꽃친다. 와〜 경품이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 경품의 행운을 누려본 적이 있던가? 마음을 추스르고 우리 구역 식구들을 찾아보니, 세상에! 운동장 남쪽의 나무그늘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머니가 하루를 보내기엔 더 없이 좋아 보이는 장소다.

 

‘안 그래도 오셨으면 참 좋을텐데...’ 했다면서 어머니를 끌어안고 좋아하는 사람들. 백세 어머니를 조금도 귀찮아 하지 않는 모양에 가슴 뭉클하니 눈물이 솟구친다. 어쩌면 나 혼자 어머니를 감당해 내느라 지치고 고단해졌나 보다. 어머니를 위해 의자를 비워주고,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주는 손길에 가족애가 흐른다.

 

덕분에 어머니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는,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게임들, 뛰노는 아이들, 반가운 얼굴들을 대하면서 바야흐로 소풍 기분을 맛본다. 아, 이래서 한 아이를 키우는 것 못지 않게 한 노인을 돌보는 데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나 보다.

 

운동장으로 찾아오는 바람은 우리 구역에 드리워진 나무 밑으로 모여드는 듯. 서늘하니 기분좋은 분위기에 어머니는 이내 조을고, 나 또한 오랜만의 안락함에 젖어서 어머니를 기대고 졸고 앉았다. 사노라면 이렇게 보물찾기와 같은 행운, 뜻밖에 찾아온 휴식, 가슴 따뜻한 환대, 사랑이 넘치는 편안한 시간 들이 선물처럼 한꺼번에 주어지기도 하나 보다.

 

나는 모처럼 여자 축구에 선발되어 전후반 40분을 뛰고 나서 녹초가 되었다. 이후로는 꼼짝 않고 나무그늘에 앉아서 팔자 좋은 구경꾼으로 일관하였다. 줄다리기에조차 면제를 해준 건지, 아예 제쳐놓은 것인지 동원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졸았다 깨었다를 반복하면서 이따금 경품뽑기에 귀를 쫑긋거리며 기대를 가졌다가 내려놓곤 하였다. 끝까지 경품의 행운은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그런데 풀이 죽어 있는 우리에게 목사님이 다가오셨다. 눈치를 보니 운동장을 돌아가면서 일일이 성도들의 안부를 물으시는 듯 하다. 가장 연세가 많은 어머니를 보시더니,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부둥켜 안으시고 축복기도를 하신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 하시는 어머니 옆에 나란히 앉으셔서 말동무가 되신다.

 

와아〜 우리 어머니가 오늘의 MVP, 최고 경품의 당첨자가 되셨구나. 그 증거를 공유하기 위해 현장 상황을 사진으로 남겼다. 오늘이 어머니에게 마지막 가을 운동회라면, 이 사진 또한 추억의 마지막 사진이 될 것이다. 어머니를 저토록 행복하게 해주는 가을이여, 오, 사랑이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원제: The Happiest Man on Earth))에게 삶의 연료는 ‘사랑’이었다고 한다. 사랑과 우정, 친절과 희망,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 들이 우리의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 이른바 몸의 엔진을 돌게 하는 전력인 셈이다.

 

 

그러면 100세 시대는 축복인가? 이 질문을 두고 설문조사를 실시한 어느 노인연구에 의하면 전체적으로 부정이 긍정을 능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세대별로 구분해 보면 젊은층은 장수사회를 축복으로 응답하는 이들이 많은 반면에 노년층은 부정적 인식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나이가 많아갈수록 장수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높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다. 왜 그럴까?

100세 시대에 관한 종합대책을 연구중인 어느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개발도상기와 새마을운동을 겪어온 이 시대의 노년층(80세 시대)은 스스로가 ‘노인에 대해 사회적 부담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장수에 대해 단순히 오래 사는 것(living longer)’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100세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젊은층은 노인을 생산적인 사회적 자본으로 보면서 장수를 활동적으로 오래 잘 사는 것(living well)이라고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건과 복지에 대한 시각을 보면, 노년층은 국가적 시혜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젊은층은 개인·정부·지역사회가 결합한 접근 방법을 강조한다.

 

교육과 고용 측면에서 노년층은 30세 이전까지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은 후 직장에서 일을 하고 60세 경에 은퇴 한 후에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는데 반해, 젊은층은 은퇴 이후에도 활동적으로 일하는 삶을 지향하므로 전 생애에 걸친 교육과 사회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100세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노년층은 스스로가 이 사회의 부담이나 민폐라는 부정적 시각을 버리고 적극적인 경제·사회 활동을 통해 노년기의 생산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이른바 노후생활에 대한 대책이요 준비일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허정옥 논설위원 jhhospit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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