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처럼 '우린 헤어지지 않는다'

  • 등록 2024.10.14 16:5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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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먹어도 먹어도 배 고프신 어머니 ... 4·3 시절 허기 달랬던 기억?

 

왜 그러실까? 최근 들어 어머니께서 자주 밥을 달라신다. ‘어떠난산디(왜 그런지) 배고프다게!, 무사 영(왜 이렇게) 배고픈고 이? 얼언 박박 털어점져(추워서 덜덜 떨린다). 아무거라도 또똣헌 물에 홑썰 몰앙 도라게(따뜻한 물에 조금 말아서 달라)’라는 어머니가 내 가슴 속을 휘적이며 저민다. 요즘 세상에 배고프다니.... 삶에 허기가 스민다는 건, 그만큼 외롭다는 뜻이 아닐까?

 

오늘 아침에도 ‘배가 고프다’시는 어머니에게 밥을 두 번 차려드렸다. 먹고 나서 돌아서면 다시 허기가 지는 건 치매의 일종이다. 우리 할머니도 왕할머니도 ‘밥을 안 준다’, ‘배가 고프다’며 아버지의 울분을 자극하신 적이 있다. 배고픔은 일제시대와 4·3, 6·25, 보릿고개 등을 겪은 세대에겐 설움이고 슬픔이며 고통이고 아픔이 아닌가.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하시던 아버지도 나중에는 치매임을 알게 되셨지만, ‘배가 고프다’는 치매는 그만큼 슬프고도 가슴아픈 말이리라.

 

지난 주말에는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온 나라를 기쁨으로 들뜨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대표작인 ‘작별하지 않는다’가 제주도의 4·3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더 기쁘고 감사했다. 일전에 한 번 읽고서 다시 보려고 그랬을까? 책장에서 시선이 가는 곳에 얌전히 꽂혀 있다. 오, 노벨상의 위대함이여! 반가운 마음에 다시 책장을 펼쳐본다. 몇 군데에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다.

 

‘이렇게 많이 드셔? 입맛을 쉽게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대. 엄만 오래 사실 거야’(p.101). 아마도 이 부분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표시를 해놓았던가 보다. ‘우리 어머니도 밥은 삼시 세끼 잘 드시니까, 오래 사실 게 틀림없다’라고 안심하면서. (아, 어머니는 다시 식탁으로 가셨다. 아침 식사를 하신 지 1시간쯤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요즘은 식탁 위에 몇 가지 드실만한 것들을 그대로 놓아두고 있다.)

 

그 다음 포스트잇은 ‘나의 동생 정심에게’라는 구절에 붙어 있다. ‘나는 건강하니 걱정 말라’고 그(주인공 인선의 아버지)는 썼다. 정숙이와 외할머니, 다른 외가 어른들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당부하면서. 형기가 아직 육 년 남았지만 십오 년, 십칠 년 징역을 받은 제주도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운이 좋은 거라고 썼다. 네가 편지를 보내줘서 기뻤다고, 다시 답장을 해주면 좋겠다고 썼다. 깨알 같은 글씨로 추신을 달아, 앞서 받은 편지에서 마음에 걸린 듯한 부분에 대해 말했다. 네 편지 읽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내가 나가면 너는 스물한 살 정숙이는 스물다섯 나는 스물여덟 아니냐 보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지마는 눈물 흘릴 것이 무어 있나 쇠털같이 많은 날을 만나 옛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정숙이한테 그리 일러주어라(p.260).... 비좁은 방에 나란히 누운 어른들이 잠들고 나면 이모가 엄마한테 귓속말로 말했대. 오빠는 살았을 거라고. 달음박질이 날래니까 안 잡혔을 거라고. 중학교 마치기 전부터 아버지 따라 산으로 도시락을 싸 들고 가 말몰이를 했으니 누구보다 숨을 데를 잘 알지 않겠느냐고. 빈 도시락에 산열매를 담아와서 정옥이랑 너한테 주곤하지 않았느냐고. 굶어죽을 일도 없다고(p.261).

 

이 부분에는 묘하게도 정심·정숙·정옥, 현재의 우리 어머니 3인방이 등장한다. 2남 7녀 중 위로 세 언니와 오빠는 제주시로 유학을 보내고, 더 이상 그러한 뒷바라지가 어려워지자, 우리 셋을 당신 곁에 불들어 놓고, ‘글 반 일 반(아침에 일어나서 밭에 가서 일하다가 학교종이 칠 때쯤 학교로 달려가고, 학교가 끝나면 밭으로 직행해서 어머니와 함께 밭고랑을 헤매다가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는 일과)’의 간판용 학교를 다니게 하셨다.

 

요컨대 공부는 뒷전이고, 농번기에는 결석을 해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학교에서도 농번기 방학을 실시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시로 ‘가사조력’이라는 결석계를 제출하고 밭으로 달려갔다. 그때는 우리 집뿐 아니라 환경이 비슷한 동네 아이들이 그렇게 중학교·고등학교를 마쳤는데,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였다. 초등학교를 나와서 집안일을 거들거나 육지로 물질을 떠난 친구들도 있었으니.... 더욱이 우리들 세 자매는 ‘작별하지 않는다’는 운명을 타고났거나 그렇게 굳게 결심이나 한 것처럼 어머니와 헤어지지 않고, 더불어 노인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한편, 아버지는 1950년 봄에 부산으로 이감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씨를 말릴 빨갱이 새키들 깨끗이 청소하갔어. 죽여서 박멸하갔어. 한 방울이라도 빨간 물 든 쥐새키들은. 수건이 덮인 아버지 얼굴에 그 사람이 끝없이 물을 부었다고 했어. 젖은 가슴을 야전 전화선으로 묶고 전기를 흘려넣었다고 했어. 산사람과 내통한 친구들의 이름을 대라고 그 사람이 속삭일 때마다 아버지는 대답했어. 모루쿠다. 죄 어수다. 나 죄 어수다(p.296-297).

 

이 부분을 읽으면서 현기영 선생의 순이 삼춘을 생각했다. ‘고모의 울음소리로 시작되는 제사는 우리 집만이 아니었다. 한날한시에 마을 이집 저집에서 제사가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청승맞은 곡성이 터졌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곤 했다. 철부지였던 나는 그 곡소리가 지긋지긋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어른들이 들려주던 마을 소각 당시의 비참한 이야기도 끔찍하게 싫었다.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位)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1949년 산에 있는 무장공비를 잡겠다고 들이닥친 순경들과 군인들은 마을을 불태웠다. 그리고 그날 노인이고 어린애들이고 남자고 여자고 가릴 것 없이 오백 명이 넘는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총알 앞에서 하염없이 죽어야 했다. 이것이 나의 고향 마을 제삿날이 모두 같은 이유이다.’

 

그리고 현기영 선생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라는, 지상에서 가장 슬픈 제주도 이야기도 다시 소환해 본다. ‘허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 그 시절의 굶주림은 업구렁이가 그 4.3사태의 재앙불에 타 죽은 때문이었다. 가난한 농부들의 양식을 지켜주던 그 숱한 업신들이 불에 타 죽었는데, 어찌 풍년이 들겠는가. 그리고, 평생 먹을 양식 반도 못 먹고 사태 때 눈을 감은 그 숱한 요절의 영령들이 있는데, 산 자로서 어찌 배불리 먹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흉년의 연속이었던가. 수만 떼죽음의 달랠 길 없는 한이 곡식밭을 마르게 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한두 해도 아니고 육 년 간이나 계속된 그 모진 흉년의 세월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지상에 숟가락 하나, p. 119)

 

어머니가 다시 식탁으로 가서 무엇인가를 뒤적이시는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신 게, 어쩌면 4·3과 보릿고개 시절에 허리를 졸라매며 허기를 달랬던 기억 때문은 아니신지. 쉬는 날이라고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들고 찾아 온 언니가 어머니를 보고 큰 소리로 선언한다. “우리 어멍은 오래오래 사실 거여.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지만, 먹는데 죽는 법은 어시난 이!”라고. 언니는 사회복지사 자격을 갖춘 요양보호사다.

 

그래야지. 아직도 아버지와 작별하지 않으시는 어머니. ‘니네 아방은 어디 가시니?’라며 아버지를 찾는 건, 외로우신 거다. “우리 어멍은 도순리서 큰 밭 호나 물려 온 부재집 똘이여!”라는 건, 당신 존재의 당당함을 표현하고 싶으신 게다.

 

소설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스웨덴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신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됐다’고 부연한다.

 

문득 우리가 제주도에 산다는 것, 우리 조상들이 목숨 걸고 망망대해를 건너서 이 한 점 섬에 정을 붙여 살아온 역사에 대해 동박새의 시선으로 서정을 읊었던 김광협 시인의 ‘보름코지 빌레왓디’를 나누고 싶어진다. ‘우리아방 우리어멍, 살아생전 고생고생, 보름코지 빌레왓디 정을들연 살아왔네. 이고단이 살터라고 모음정헨 살암시녜. 고맙수다 고맙수다. 진정촘말 고맙수다. 아방어멍 어멍아방 진정촘말 고맙수다’.

 

우리 어머니, 오늘은 무거운 육신을 내려놓고 새처럼 제주 하늘을 마음껏 날으소서. 오래오래 사시길....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허정옥 논설위원 jhhospit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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