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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현장에서] 열린의사회 고병수 단장의 필리핀 통신(2)

오늘은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야 했다.

 

이번에 갈 곳이 리바카오(Libacao)라는 곳으로, 산세가 험하고 먼 곳이기 때문이다. 외진 지역이라 의료 혜택이 제일 없는 곳이고 피해도 상당히 큰 지역이어서 어쩌면 우리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라고 생각되어 다른 때보다 더 물자를 꼼꼼히 챙겼다. 가는 길은 좁고 포장도 잘 안 되어 차는 계속 덜컹 거렸고, 쓰러진 전신주와 뽑히고 부러진 나무들이 가는 내내 보였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장면은 대나무나 야잣잎으로 지어진 집들이 하나도 성한 게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임시 거처를 옮겼거나 주변에서 움막을 지어 오늘내일 지내고 있을 것이다.

 

태풍 하이옌이 강력해진 이유

 

필리핀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그 섬들을 크게 3지역으로 나누는데, 수도 마닐라가 있는 북부는 루손(Luzon)섬 지역, 섬들이 많이 모여 있는 중부는 비자야(Visayas) 지역, 남부는 민다나오(Mindanao) 지역이라고 부른다. 이번 11월 8일 불어 닥친 태풍 하이옌은 바로 중부의 섬들을 강타하고 지나갔다. 필리핀은 1년에 20~30개의 태풍이 발생하지만, 거의가 북태평양을 건너며 강해지는데 발생지인 이곳에서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아서 처음 태풍이 생겨났을 때 모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발생하자마자 엄청난 세기로 돌변하게 되어 지금처럼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여행지로 잘 알려진 세부, 보라카이가 모두 중부 지역에 있다. 태풍이 휩쓸고 가자마자 세계 언론은 모두 태풍의 첫 도착지인 레이테(Leyte)섬의 피해 상황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 도시인 타클로반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곳이 되었고, 자연스레 많은 구호물자와 의료 지원도 그 곳을 중심으로 보내지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간 중부 지역의 섬들 중에 레이테 섬뿐만 아니라 제주도보다 훨씬 큰 4개의 섬들이 모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고, 그 중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곳은 레이테 섬이 있는 동부 비자야 지역과 우리가 의료지원팀으로 오게 된 서부 비자야 지역이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아이들과 산모들

 

다른 열대지역 진료를 할 때처럼 이곳도 감염병이 많지만, 피부질환도 너무 많다. 특히 아이들이 오염된 손톱으로 살을 긁다보니 세균 감염으로 고름집이 잡히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 아이들이 올 때마다 나는 우선 작게 살을 째서 배농시키고 단단히 드레싱 처치를 한 후 항생제와 소독약을 준다. 하루에도 5~6명 아이들의 고름을 짜내야 했다. 발에 생긴 찢어진 상처, 소독이 안 돼서 생긴 고름집, 피부 염증 등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율라(필리핀에서는 태풍을 이렇게 부름)’가 불어닥친 이후에 생긴 것들이라고 한다. 이후 20여일이 지나도록 치료받을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고.....

 

한 아이의 피부를 째서 고름을 짜내고 나서 허리를 펴 땀을 닦으려고 일어나 보면 저 멀리에서 환자들 수술로 고개 돌릴 시간도 없이 바쁜 정형외과 박영근 선생이 보인다. 오전에 수술 몇 번 했더니 인근 지역 사람들이 다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한 명 돌려보내지 않고 계속 봐주는 박 선생님이 이번 진료 기간 중에 가장 힘든 일정을 보내는 것 같다.

 

 

내과, 소아과, 정형외과, 한방 진료 쪽은 쉴 새 없이 몰려드는 환자들로 정신 없긴 하지만 그래도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쯤이면 어느 정도 일을 마치게 된다. 하지만 산부인과 진료는 우리가 짐을 다 꾸리고 나도 계속 진료를 봐야 한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진료과목이다. 초음파로 태아 상태를 봐야 하는 산전진단을 여기서는 꿈도 꾸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번 봐주면 이 곳 산모들이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가곤 한다. 부인과 질환도 마찬가지다. 산부인과 박정화 선생이 대기 중인 사람들 진료를 마치고 정리를 하려는 순간 한 여자가 찾아와서 자기도 봐달라고 사정을 한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배에 혹이 있어서 왔어요.”

 

내가 우선 그 여자의 배를 만지면서 간이나 다른 쪽의 문제는 없는지 살핀 후 천막이 처진 진찰실로 보냈다. 아랫배 쪽에 겉으로도 크게 만져지는 큰 혹이 있어서 산부인과 박선생은 다시 장비를 풀어서 초음파로 그 여자의 배를 훑었다. 우리가 추측한 것은 자궁근종이거나 부인과쪽 암이었지만, 대장에 생긴 혹이었다. 진찰은 하더라도 여기서 우리가 더 할 일은 없다.

 

“언제부터 혹이 만져졌어요?”

 

“1년쯤 돼요. 점점 커졌지만 병원에 가면 너무 비싸서 검사도 못해봤어요.”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I have no money’다. 초음파 결과를 말해주면서 힘들더라도 꼭 종합병원에 가서 CT 등 검사를 받아보시라고 신신당부하고는 마저 짐을 꾸렸다. 주섬주섬 의료장비를 챙기는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지만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한 때 우리나라에 장충체육관을 지어 주거나 여러 지원을 할 정도로 동아시아의 선진국이었던 필리핀의 현실을 눈앞에서 보고 있노라니 무엇이 문제인지 혼란스러웠다.

 

현지 책임자들과의 인터뷰

 

필리핀 현지 진료를 하는 것도 이제 이틀 후면 끝나게 된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가 가고 나면 이들은 또 어떻게 병을 이겨낼 것인가 걱정이 된다. 우리의 현지 진료를 도우면서 다니는 곳마다 진료 장소나 물품들을 잘 준비할 수 있게 총 지휘해준 이 곳 섬의 아클란(Aklan)주 보건의료국장을 만나 상황도 듣고, 이후 대책도 들어보기도 하였다.

 

필리핀은 행정 조직이 17개 지방(Region), 80개 주(Province), 117개의 시(City), 1,501개의 지방 자치체(Municipality, 한국의 군(郡) 수준), 41,982개의 마을(Barangay, 바랑가이)로 나뉘는데, 우리가 다니는 곳은 아클란 주에서 피해를 많이 본 지방자치체 5곳이라고 한다.

 

 

각 지방자치체마다 약 2만 5천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지고 있고, 전부는 아니지만 각각 보건소격인 병원이 있으며 4~5명의 의사와 여러 조산사들과 간호 인력들이 있다고 한다. 지방자치체는 또 5개 안팎의 보건지소와 같은 곳이 산재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의사가 없이 조산사와 간호사만 있다. 우리 같으면 제주도에 보건소 하나와 의사가 없는 보건지소 5개 정도 있는 셈이니 가뜩이나 길이 안 좋은 이들에게 의료 접근성이란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였다.

 

의료보장성도 20% 수준(선진국 85%, 한국 61%)이며, 의사 수도 현저히 부족한 상태로 넓게 퍼져 있는 섬나라 필리핀의 보건의료를 만족시키기는 커녕 필수 의료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대화를 나누던 말미에 보건국장은 필리핀이 계속 보건의료 발전을 위해 노력을 하겠지만 한국 등 여러 나라에서 지속적으로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부탁을 하였다.

 

나는 얘기를 나눈 후에 우리가 필리핀 전체를 담당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지역을 맡아 의료 지원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게 된다. 한국도 7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지원을 받았고, 더욱이 많은 의사들이 강화도나 거제도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지역 보건의료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도우지 않았던가?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의 의사 수 현황 (인구 1,000명당 의사 수)

 

국가

 

 

 

OECD 평균

 

오스트레일리아

 

한국

 

필리핀

 

캄보디아

 

의사 수

 

 

 

3.1

 

3.0

 

2.0

 

1.1

 

0.2

 

 

 자료 출처 : OECD Health Data 2012

 

재난 지역에 와서 보람도 있었지만 갈 시간이 얼마 안 남은 지금 느끼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더 남아서 일을 하고 싶지만 팀 관리 문제나 현지 치안 문제로 그럴 수가 없음이 안타깝다. 하루 종일 등에 땀을 흘리며 의료진을 도와준 자원봉사자들과 한국에서 병원 일을 중단하고 기꺼이 달려와서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동료 의사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남기며 필리핀 현지에서의 리포트를 마치려고 한다.

 

오늘 밤에는 산 미겔(San Miguel) 맥주라도 마시며 더위를 식혀야겠다.

 

 

 

고병수는?

 

= 제주제일고를 나와 무작정 서울로 상경, 돈벌이를 하다 다시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를 거쳐 서울 구로동에서 개원, 7년여 진료실을 꾸리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도왔다. 2008년 고향 제주에 안착, 지금껏 탑동365의원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캄보디아와 필리핀, 스리랑카 등 오지를 찾아 의료봉사도 한다. 『온국민 주치의제도』란 책을 펴내는 등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과 우리나라의 1차 의료 발전방안을 다룬 다수의 논문을 낸 보건정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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