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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현장에서] 열린의사회 고병수 단장의 필리핀 통신(1)

 

 

  지난달 8일 필리핀 중부를 강타, 셀 수 없는 사상자와 이재민을 만들어낸 태풍 하이옌. 

 

  <제이누리>의 필진 고병수 원장이 현장 의료봉사를 위해 필리핀으로 투입됐다. 초기 긴급 구호팀이 들어가고 지금은 부서진 도로와 전신주 등을 고치는 일과 필요한 의료를 제공하는 등 비교적 현장여건이 순탄한 상황으로 반전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고 원장은 태풍 발생 20여일만에 힘겹게 태풍피해 지역에 의료지원단장 자격으로 6명의 의사 등 의료진 및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열린의사회의 일원들을 인솔, 현장에서 활동중이다.

 

  중서부의 섬에서 칼리보(Kalibo) 인근의 바탄(Batan), 알타바스(Altavas), 발레떼(Balete), 리바카오(Libacao), 방(Banga) 5개 재난 지역을 돌면서 긴급 구호 및 일상 진료를 하고 있다. 필리핀 재난현장의 소식을 고 원장이 <제이누리> 통신원 역할을 맡아 전한다. / 편집자 주

 

 

 


낮 12시를 넘기고 점심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도 대기 환자가 70여명이 남았단다. 이러다가 오늘은 10분 밥 먹고 진료해야 하는 것 아닌지 걱정이다. 나야 다이어트 한다고 안 먹어도 되지만 다른 어린 친구들은 어떨까 모르겠다.

 

아파도 병원 가기 두려운 이 곳

 

재빨리 점심밥을 먹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내가 소아 환자들을 맡았는데 아기들이 오래 기다리는게 안쓰럽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보다 먼저 진료를 시작하게 된다. 이 지역은 유난히 소아 진료가 많아서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물 마실 틈도 없고 의자에서 일어날 여유도 없이 일을 하다보니 엉덩이에 벌써 땀띠가 났다.

 

"기침을 계속 해요."
"얼마나 됐어요?"
"한 달이요."
"한 달? 그러면 병원 갔었어요?"
"아니요."

 

두 돌이 채 안 되는 남자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와 대화를 하고 여기저기 살피고 나서 청진기를 댄다. 가슴 양쪽에서 분명하게 폐렴을 의심하게 하는 염발음(crackle)이 들렸다.

 

"그럼 한 달이나 심하게 기침 하는데 왜 병원 안 갔어요?"
"I have no money."

 

심각한 내 말투에 비해 대답은 간결했다. 이런 곳을 여러 번 다녔던 경험으로 이제는 나도 대수롭지 않게 응하고 처방을 한다. 수 년 전 처음 개발도상국 진료를 갈 때만 해도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병원도 안 가고 가만 있었냐, 돈이 없어도 죽느냐 사느냐인데 왜 방치했느냐 따졌을 것이다. 이제는 안다. 가족 한 사람의 병을 고친다는 게 자기 가족 전체의 생계를 위협한다는 것을.....

 

해외 진료를 하다보면 아직도 이런 폐렴이나 지역 풍토병들이 생명 위협의 제1요인이다. 그래서 나는 열린의사회 사무국에서 준비하는 것 외에 아이들에게 쓸 약들을 따로 더 준비하게 된다.

 

"폐렴은 위험한 병이니까 절대 약 끊지 말고 끝까지 복용시키세요."

 

신신당부하면서 아이를 안은 엄마를 보낸다. 왜냐하면 증상이 좋아지면 아껴서 나중에 먹이려고 중단해버리기 때문이다.

 

 

 

봉사, 그것은 내가 필요로 하는 곳에 내가 가는 것뿐.....

 

대단한 의료 인력이 온 것도 아닌데, 멀리서 찾아오고는 몇 시간씩 기다리다가 진료 받고 가면서 너무 고마워 한다. 그 이유가 병원 가서 진료 받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다. 사람들은 연고 하나, 영양제 하나 주는 것만도 너무 좋아한다. 피부병이 많은데 긁다가 고름집이 잡혀도 약을 못 쓴다. 우리나라 같으면 작은 뾰루지만 생겨도 당장 병원 가서 싼 값에 진료 받고 약을 얻었을 텐데.....

 

죽을 병이 있어도 병원 가기 두려운 사람들이 널렸다는 것이 현재 필리핀뿐만 아니라 지구의 절반 넘는 인구가 겪는 고통이다. 의료 수혜의 형평성을 이루자고 선언(알마아타 선언)한 것이 35년이 지났는데 말이다.

 

여기는 태풍 하이옌이 휩쓸고 간 지역 섬 중 하나이다. 이제야 전기 복구니, 도로 보수니 움직이고 있지만 부서진 집들은 모두 개인이 복원해야 한다. 밥도 자신 가족들이 해결해야 한다.

 

특히 우리가 간 지역인 중서부 섬은 언론에 많이 알려져서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해외 지원이 많이 되고 있는 타클로반과 달라 지원도 없고, 의료진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피해를 입었는데....

 

그래서 필리핀 정부에서도 한국 공병대 500여 명이 파견될 때 우리가 온 지역으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우리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도 아클란(Aklan) 주 같은 지역에 오게 됐고.

 

태풍이 급습한 지 한 달이 지나면서는 긴급한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결되고 있는 듯 하나 많은 주민들이 파괴된 집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돌아올 지, 안 돌아올 지는 모르겠으나 이동하며 눈에 들어오는 상황들을 보면 복구 자체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한 것 같다.

 

 

 

여기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을 지라도 온 힘을 다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가고 싶다. 진료를 마치고 짐을 정리하면서 자원 봉사자로 온 대학생이 물었다.

 

"단장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데를 오세요? 진료봉사를 자주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글쎄. 국내건 국외건 정말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일을 하고 싶은 거겠지. 사실 봉사라는 것은 별거 아냐. 내가 잘 나서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원하고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내 마음이 참지 못 하는 것 뿐. 그럴 땐 참지 말고 질러야 하는데 용기가 없어서 그래. 한 번 하면 마약 같아서 계속 가게 돼. 환청처럼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

 

정말이다. 난 아직도 몽골, 스리랑카, 캄보디아 아이들의 눈망울과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필리핀으로 긴급 의료지원을 오게 돼서 이번에는 내 마음에 불을 당기는 나라가 하나 늘었다.

 

고병수는?

 

= 제주제일고를 나와 무작정 서울로 상경, 돈벌이를 하다 다시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를 거쳐 서울 구로동에서 개원, 7년여 진료실을 꾸리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도왔다. 2008년 고향 제주에 안착, 지금껏 탑동365의원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캄보디아와 필리핀, 스리랑카 등 오지를 찾아 의료봉사도 한다. 『온국민 주치의제도』란 책을 펴내는 등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과 우리나라의 1차 의료 발전방안을 다룬 다수의 논문을 낸 보건정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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