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이화여대 교수와 학생들이 최경희 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집단행동에 나선다. 권력형 의혹이 있는 최순실씨의 딸을 입학시키고, 학점도 쉽게 받게 하는 등 특혜를 줬다는 이유에서다. 교수비상대책위는 지난 15일 “입학·학사관리 관련 의혹 보도가 연일 터져 나오고 있지만 학교 당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는 커녕 옹색하고 진실과 거리가 먼 변명으로 일관한다”고 비판했다. 또 “이화여대 추락의 핵심에는 최 총장의 독단과 불통, 재단의 무능과 무책임이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교수들은 19일 집회 이후 이달 말까지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이화여대는 지난 7월엔 결국 포기한 평생교육 단과대학인 ‘미래라이프’ 사업으로 학내 갈등을 겪기도 했다. 명문대학이 이처럼 불미스런 사태를 연속 겪고 있다. 아무리 일부 교수와 학생의 퇴진 요구라 할지라도 총장으로선 불명예가 아닐 수 없다. 총장의 불명예는 학교의 명예 추락으로 직결돼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김준엽 총장의 사퇴 철회를 요구하는 당시 고려대생의 집회다. 31년 전, 이와 반대로 학생들로부터 사퇴 철회 요구를 받은 총장
지난해 1200만 관객을 모았던 영화 ‘암살’에 김원봉(1898~1958)이 등장해 화제였다. 그런데 이달 초 개봉한 ‘밀정’에도 김원봉이 나왔다. 조승우·이병헌이 각각 김원봉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영화는 의열단 단장인 그가 은밀히 작전을 지휘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약산 김원봉은 1948년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고위직으로 지내다 김일성에게 숙청됐다. 이 때문에 남한에선 1990년대까지 좀처럼 거론되지 않던 인물이다. 이런 그가 일반 대중에게 관심을 받게 된 건 순전히 영화 때문이다. 그는 1920~40년대 적(敵)은 물론, 동포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젊은 독립운동가였다. “보기엔 우유부단한 것 같으나, 성질이 극히 사납고 또 치밀하여 오안부적(傲岸不敵: 거만하여 대적할 자가 없음)의 기백을 가졌고, 신출귀몰하는 특기도 가졌다.” (일제기록) 일제 경찰은 그에게 김구 주석(60만원) 보다 많은 현상금 100만원을 걸었다. 지금으로 치면 200억원대 거액이란다. 외모도 멋있었다. 님 웨일즈는 『아리랑』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고전적 유형의 테러리
아카시 모토지로는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에 악명을 떨쳤던 일제 헌병대장이다. 지난 12일 독립기념관이 광복 71돌을 맞아 그의 친필편지를 공개했다. 이틀 후엔 지리산 일대서 치열하게 의병활동을 펼쳤던 경남창의대 박동의 대장의 활약상이 상세하게 전해졌다. 당시 박 대장에게 아카시는 원수 같은 적(敵)이었다. 아카시는 두 번에 걸쳐 한국서 근무했다. 공개된 편지는 첫번째 임기(1907년 10월~1909년 8월)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후임자에게 남긴 당부의 글이다. 이 글에 “전남에서 적도들의 상황은 여전할 뿐”이란 내용이 있다. 아카시에게 우리 의병은 ‘적도’였다. 때는 남쪽 의병을 대대적으로 제거하는 ‘남한대토벌작전’이 벌어지기 직전이다. 1907년 7월 군대 해산과 함께 시작된 의병활동은 이듬해부터 험준한 지리산을 배경으로 영남, 호남 의병이 투쟁을 벌였다. 아카시가 말한 ‘전남의 적도’는 이들 지리산 의병을 말한 것이다. 경남창의대는 1908년 3월 12일 지리산 부근 산청에서 일본인 가옥을 불태웠으며 같은 달 26일 밤 산청주재소를 습격하고 건물을 불태웠다. 4월에는 산
진경준 검사장이 며칠 전 뇌물수수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 그는 11년 전 넥슨 창업주로부터 4억2500만원을 받아 이 회사 비상장주식을 샀고, 이를 잘 굴려 120억원대 주식으로 불렸다. 검사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 검찰 고위직으로 엄청난 힘을 갖는다. 넥슨이 그에게 뇌물을 준 데는 분명히 뭔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권력을 활용하려는 재력가가 있는 한, 공직자 부패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으로 재물 욕심이 없을 수 없고, 권력 주위엔 반드시 검은 유혹이 넘실댄다. 권력과 뇌물의 고리는 어렵지 않게 형성된다. 이러니 많은 국민이 부정부패를 막을 강력한 법 시행을 원한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오는 9월 28일 시행된다. 최근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52.4%가 “부패 척결에 영향을 줄 것”이라며 법 시행에 기대감을 보였다. 부패방지법이 탄력을 받고 있다. 이젠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성이 없더라도 100만원 이상의 금품이나 향응을 받으면 무조건 처벌된다. 종전과 달리 “돈을 받고 뭔가 특혜를 줬다”는 대가성이 확인되지 않아도 형사처벌을 받는다. 김영란법은 2013년 정부안이 국
▲ 5월의 악몽 [제이누리 그래픽] 지난주 한 잡지가 공개한 전두환 전 대통령 인터뷰가 36년 전 악몽 같은 5월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누가 발포 명령을 내렸다는 거냐?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전 전 대통령이 다음 달 나올 자서전 내용을 예고하는 말을 쏟아냈다. 정말 좋은 세상이다. 자신이 대통령일 때는 누구도 이 같은 ‘소신 발언’을 못했는데…. 많은 국민이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의 장본인으로 아는 상황에서 전면 부정하는 말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 1980년 봄은 끔찍했다. 5·18의 참상을 겪을 광주 시민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당시 국민 모두가 끔찍한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그해 초 소문으로 무성하던 신군부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가을엔 대통령까지 오르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신군부로 불리던 반(反)민주세력은 1979년 그들의 상관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하극상(12·12사태)을 벌이더니 역사 전면에 나타났다. 대학가는 박정희 대통령 죽음을 부른 10·26사태 이후 휴교령의 오랜 침묵을 깨고 활기를 찾았을 때였다. 학도호국단이 사
▲ SBS 사극드라마 ‘대박’, MBC 사극드라마 ‘옥중화’ 최근 시작한 두 TV사극의 인기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 원인이 뭘까 생각해 봤다. SBS ‘대박’(월·화)은 시청률이 8%대지만, MBC ‘옥중화’(토·일)는 처음부터 줄곧 10% 후반대를 달리더니 20%를 넘기도 했다. 대박은 16회, 옥중화는 6회를 마쳤다. 이렇게 큰 시청률 차이에는 배우의 연기력 등 많은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이번 경우는 스토리 전개상 차이점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대박은 숙종, 경종, 영조, 이인좌 등 실존인물이 극을 이끌어 간다. 옥중화는 옥(獄)에서 태어난 옥녀와 상단 장사꾼 윤태원 등의 가공인물이 주인공이다. 문정왕후, 윤형원, 정난정 등 실제인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극을 리드하는 건 가상의 인물들이다. 대박은 실존인물의 역사적 실체를 마음대로 바꿔가며 극을 전개하고 있다. 숙종과의 사이에서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의 출처도 허구 투성이다. 투전판에서 굴러먹던 몰락 양반의 부인이었다가 남편이 노름판에서 지는 바람에 숙종에게 넘겨진 여인이다. 왕이 도박판에 나선
사극은 팩션이다. 팩트만 갖고는 흥미가 없으니 픽션을 보탠다. 그렇지만 항상 픽션의 수위가 문제다. ▲ 현재 방송중인 SBS TV드라마 '대박' 붕당간 정쟁이 치열했던 숙종, 영조 때를 배경으로 한 TV사극 ‘대박’이 인기를 끌고 있다. 숙종(최민수)과 이인좌(전광렬)의 강렬한 연기가 드라마를 이끌고 있다. 그런데 35년 후 반란을 일으키는 이인좌가 일찌감치 등장한 게 아무래도 개운치 않다. 이인좌가 누구인가? 영조가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무신년(1728년) 경기·충청·경상·전라도를 무대로 일어난 반란의 주모자다. 난을 일으키기 전까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몰락한 남인 출신 양반이다. 이런 이인좌가 1693년 주인공으로 벌써 나타난 것이다. 숙종은 왕이 된 지 19년째로 나이 33세였다. 이인좌는 태어난 해를 모른다. 극 중에선 최소 30세는 된 듯하다. 그러면 난을 일으킬 땐 이미 65세 노인이 된다. 숙종과 함께 극중 인물로 나란히 서기엔 왠지 어색하다. 이 드라마는 영조(연잉군, 1694~1776)가 1724년 왕위 오르고, 4년 후 이인좌가 난을 일으킬 때까지 끌고 갈 모양이다. &ls
최근 인도영화 ‘런치박스’를 봤다. 이 영화를 통해 국민 대부분이 행복한 나라, 부탄을 처음 알았다. 며칠 후 TV에서 또 부탄을 만났다. 한국에 유학한 부탄 청년이 국민총행복(GNH, Gross National Happiness)이란 걸 얘기했다. 생소한 단어로 인도영화에도 등장했다. 여주인공은 매일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잘못 배달되는 런치박스(도시락)에 편지를 넣는다. 어느 날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남편이 외도를 해요. 따지려 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아요.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한군데 있긴 해요. 딸이 학교서 배웠다는데 부탄에선 총생산지수가 아니라 총행복지수로 따진데요. 여기(인도)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터넷에 부탄을 검색하니 많은 내용이 떴다. 히말라야 산맥 동쪽에 있는 나라, 티베트·인도와 접한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인구 75만명 밖에 안 되는 왕국이다. 1972년 당시 국왕이 국정 목표를 국민 행복으로 삼았다. 국민총생산(GNP)이 아닌 국민총행복(GNH) 추구를 천명한 것이다. 2008년 국민행복을 위한 국가 정책 4대 기본 틀을 정했다. 첫째, 평등한 사회경제
며칠 전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제한속도가 넘은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지난 1일부터 운행 중인 암행순찰차가 혹 주위에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아하! 바로 이게 암행단속 효과로구나”라고 생각했다. 암행(暗行)의 원조는 조선시대 암행어사다. 임금이 파견하는 관리란 뜻의 어사(御史)는 오래전부터 중국에도 있었으나 암행어사는 우리에게만 있었던 독특한 지방관리 감찰제도다. 암행어사 규찰 대상은 관리지만, 암행순찰차는 일반시민이다. 세조는 암행의 효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암행감찰관을 내려 보내면서 이렇게 훈시했다. “지금 그대들을 보내는 것은 남의 허물만 들춰 내려는 것이 아니다. 옛 사람 말에 ‘고양이 기르는 집에는 쥐가 함부로 다니지 못한다’고 했다. 암행어사가 한 번 나간다면 탐관오리가 저절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른바 ‘고양이론’이다. 고속도로에서 과속, 난폭, 보복 운전을 일삼는 ‘쥐’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면 ‘고양이’(암행순찰차)가 효과적일 수 있다. 옛날 암행어사 파견은 비밀이었다. 누가, 어느
김부용 시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잘 알던 사람을 만난 반가움이랄까. 최근 옛사람의 일기 속에서 반가운 여인을 만났다. 이름은 김부용(金芙蓉). 운초(雲楚)라는 호를 가진 기생으로 19세기 초 평양 인근의 성천에 살았다. 시를 잘 지어 그 명성이 한양까지 알려졌다. 350여 수의 시가 남아 있다. “다채롭고 발랄하다”는 평이 어울릴 정도로 시에 재치가 넘친다. 황진이·이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생 시인으로 통한다. 그는 천안출신 원로대신 김이양(1755~1845)의 첩이 되면서 천안과 인연을 맺었다. 나이 30대 전후인 때로 추측한다. 그는 죽어 천안 광덕산에 묻혔다. 1974년 소설가 정비석에 의해 묘 위치가 밝혀졌고, 천안문화예술계는 매년 4월 그곳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부용에 대해선 많은 연구가 진행됐지만 대부분 그의 작품과 창작정신에 관한 것이다. 그의 정확한 생몰연대, 양반가 딸로서 기생이 된 내력 등 궁금한 게 많다. 그런데 우연히 동시대를 살았던 한 암행어사의 일기(西繡日記)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그간의 부용 연구에선 언급되지 않은 자료다. 고전문학 쪽에서 진행되다 보니 암행어사 일기까진 살피지
지난주 난데없이 ‘이승만 국부론’이 튀어나왔다. 국부(國父)는 말 그대로 나라의 아버지를 말한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중국의 쑨원, 베트남의 호치민 등을 그들 나라에서 국부로 부른다. 한상진 국민의당 청당준비위원장이 서울 4·19 묘지를 참배하면서 그곳에 묻힌 희생자와 연관된 이승만 전 대통령(1875~1965)을 국부로 평가해야 한다는 ‘용감한’ 말을 했다. 비난이 쏟아졌다. 공인으로 자신의 심중을 밝힌 것이다. 서울대 교수를 지낸 저명한 사회학자인 그가 이 전 대통령을 국부로 평가하는 데는 분명한 학자적 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급했다. 국부는 전국민적 존경을 받는 인물에 대한 영예로운 호칭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초대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국부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에 많은 공로를 세웠지만 또 큰 과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건국대통령’이란 칭호도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그가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식민지 나라를 해방시켰거나 스스로 나라를 세워 대통령이 된 게 아니다. 국부·
알다시피 병신년이란 간지명을 가진 해는 60년에 한 번씩 돌아온다. 사람이 만 60세에 회갑(回甲)을 맞은 것과 같은 이치다. 조선시대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면 간지명을 붙여 그 해를 기억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처럼 말이다. ‘병신’ 접두어가 붙은 사건은 1716년 ‘병신처분(丙申處分)’이 유일하다. 당쟁이 한창이던 숙종 말년에 벌어진 사건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던 숙종이 윤증이 대표하던 소론 대신 송시열의 노론 손을 번쩍 들어준 일이다. 조선 후기 ‘노론 전제정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결정이었다. ▲ (좌)우암 송시열 (우)명재 윤증 숙종은 무려 47년간(재위 1674∼1720) 왕 노릇을 했다. 그의 아들 영조(재위 53년, 1724∼1776)에 이어 재위기간으로선 조선 27명의 왕 중 2위다. 숙종은 치세기간 노론, 소론, 남인의 손을 여러 번 바꿔 들어준 왕으로 유명하다. 노련한 숙종은 정치 국면을 자기에게 이롭도록 수시로 주력 당(黨)을 바꾸는 이른바 ‘환국(換局)정치를 구사했다. 이런 숙종이 병신년에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2년 전 소론의 영수 윤증이 죽자 그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