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의 투탕카멘 무덤. 이집트의 투탕카멘 무덤이 유명한 이유는 거기서 나온 황금마스크보다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일 것이다. 영생을 믿었던 이집트 왕들은 다시 태어날 걸 생각해 무덤을 또 다른 삶의 공간처럼 화려하게 꾸몄다. 그런 영적 공간을 침범한 사람에게 무덤 주인이 재앙으로 복수한다는 것이다. 지난달 28일 이집트 정부는 투탕카멘왕 묘실 뒤에 또다른 묘실이 있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3개월 전 한 고고학자가 기원전 14세기의 미녀 왕비 네페르티티의 묘실이라고 주장한 곳이다. 그녀는 투탕카멘 아버지의 부인이었지만 친모는 아니었다. 이집트 측은 레이더 탐사 등의 간접적 방법으로 그녀의 묘실 존재를 확인했다. 그렇지만 더 정확한 확인을 위해선 투탕카멘 묘실의 벽을 허물고 발굴을 해야만 한다. 고고학자들도 투탕카멘의 저주를 우스개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오싹하지 않을 수 없다.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을 발굴하고 몇 달 후 발굴을 후원한 카나본경(卿)이 면도 중에 생긴 상처를 모기에 물려 폐혈증으로 사망했다. 투탕카멘 미라 얼굴에 난 상처와 똑같은 부위였다고 한다. 어떻든 10년간 발굴 관련자 20여 명이 사고
1979년 개봉된 미국 영화 ‘디어헌터’의 무대는 펜실베이니아의 조그만 한 도시였다. 마이클과 닉, 스티븐은 러시아계 이민가정출신 절친으로 제철소에 다니면서 사슴사냥을 즐겼다. 60년대 말의 거대한 제철소 배경이 인상적이었다. 아마 번성했던 제철도시의 마지막 모습이었던 듯 하다. 지난 16일 천안시와 LH가 공동으로 개최한 도시재생 국제심포지엄에서 펜실베이니아주 철강도시 피츠버그의 톰 머피(Tom Murphy) 전 시장이 특강을 했다. 그는 1994년부터 2005년까지 12년간 세 번 시장을 역임하면서 피츠버그의 도시 재생을 적극적으로 이끈 사람이다. 사실 피츠버그 도시살리기 사업은 70년대부터 시작됐다. 피츠버그시는 제철산업으로 강·대기 모두 심하게 오염됐던 공해도시였다. 제철소 옆으로 앨러게니강이 흐른다. 70대 초반인 톰 머피 전 시장이 어렸을 때 어머니는 항상 “악취 나는 강에 가지마라”고 말했다. 이런 강가의 제철소를 허물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컨벤션센터를 2003년 완공시켰다. 그가 시장으로 있을 때다. ‘데이비드 로렌스 컨벤션센터’는 세계 최초의 완벽한 녹색 빌딩이다.
홍준표 경남지사의 지난주 골프 원맨쇼를 보면서 10년 전 ‘천안 골프 괴담’이 떠올랐다. 천안의 정부 관계기관이 운영하는 골프장을 무대로 벌어진 일이다. 이 골프장은 서울과 가깝고 라운딩 비용이 비교적 저렴해 주말 부킹 경쟁이 극심하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만 해도 이곳에선 천안의 권력기관들 주말 부킹이 끗발 순으로 이뤄졌다. 권력기관이 어디 어디인지는 독자 상상에 맡기겠다. 모두 공무원이 근무하는 공적기관이다. 그런데 주말 부킹권(權)을 싸고 사건이 일어났다. 골프장 측에서 주말 부킹 팀수를 불가피하게 줄여야 하는데 가장 힘이 약한 기관의 라운딩 팀수만 줄인 게 화근이었다. 이 기관이 발끈해 골프장 혼내주기에 나섰다. 골프장 폐수 문제를 들추기 시작했다. 이 지저분한 다툼 소식이 귀에 들어왔다. 골프장 취재를 시작했다. 권력기관들 각각의 주말 부킹 팀수를 캤다. 이런 혜택이 어떻게 가능하지 추근했다. 골프를 못 배운 덕에 용감하게 몰아붙였다. 골프장 측이 사색이 됐다. 혹여 주말 부킹 잡음으로 권력기관들에 누를 끼치면 골프장은 어찌 될까. 심적 부담이 컸다. 그 여파가 고스란히 골프장에 쏟아질 게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권력기관들
광복 70돌을 맞아 독립기념관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암살’이 관객 1000만명 돌파를 앞둔 시점이다. 1987년 개관한 독립기념관은 그동안 독립운동의 실상 전달과 편한 관람을 위해 많은 노력을 펴왔다. 전시방법의 진화를 통해 관람객 눈높이에 다가서려는 성의가 돋보인다. 행사도 연중 열고 있다. 어린이학교, ‘독도야! 놀자’ 캠프 , 독립군체험캠프, 찾아가는 독립기념관 등 셀 수 없이 많다. 정문 앞엔 종합안내소와 식당·패스트푸드점을 열고 그 한가운데 바닥 분수도 만들어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부들의 여름철 나들이 명소가 됐다. 우리 부부는 독립기념관 뒤편의 단풍나무길을 사랑한다. 산책길로 그만한 데가 없어 월 1회 이상 독립기념관을 찾는다. 이렇게 볼 것 많고, 즐길거리 많아진 독립기념관에 몇 가지 요청할 게 있다. 지난 토요일 광복 70돌도 기념할 겸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전시실을 관람했다. 전시방법이 업그레이드돼 재미있고 편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아내가 ‘암살’에 나오는 실존인물 백범 김구(1876~1949) 등 네 명이 찍은
지난 토요일 충남 청주시 대청호변의 청남대(靑南臺) 나들이에 나섰다. 둘러보는 2시간 반 내내 주위 풍광엔 감탄했으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처음 왔었던 10년 전보다 눈에 띄게 볼거리가 많아졌고 시설도 크게 정비됐지만 기분은 울적했다. 순전히 개인적 이유에서였다. 1970, 80년대 정치격변기를 경험한 50대로서 그 장본인들 모습을 자주 만나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충북도는 2003년 대통령 전용 휴양지인 청남대의 소유권을 넘겨받아 ‘대통령 테마파크’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역대 대통령을 회상할 수 있는 장소로 조성하고 있다. 곳곳에서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 등 9명의 재직 때 사진과 치적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지난달 4일 대통령마다 대형 초상화 2장씩을 전시하고, 대통령처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대통령기념관도 개관했다. 총 184만㎡(약 55만평) 야산에 83년 청남대를 만든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해 이후 5명의 대통령 이름을 붙인 산책로·등산로를 만들었다. 동상도 각각 세웠다. 이렇듯 잘 꾸민 청남대가 기분을 망치게 한 이유는 뭐일까. 청남대에
1858년 10월 18세의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조슈번(長州藩) 하급무사로 규슈의 나가사키에 간 일이 있었다. 스승 요시다 쇼인(1830~59 )이 지인에게 소개장을 써줬다. “제 아래 있는 사람 중 가장 낮은 자입니다. 다른 이보다 재능이 떨어지며 학문도 미흡합니다. 성격은 좋지만 화려하진 못합니다.” ▲ 요시다쇼인(1830~59 ) 초상화 이토는 16세 때 요시다 쇼인의 사설학당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들어가 수학했다. 당시 스승으로부터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후일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요시다 쇼인은 쇼카손주쿠에서 조슈(야마구치현) 출신의 메이지유신 주역을 다수 배출했다. 막부 타도의 선봉 다카스기 신사쿠(1839~67), 유신 3걸로 불리는 기도 다카요시(1833~77), 군부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가 그의 제자다. 공교롭게도 모두 조슈번의 중심지 하기(萩)시에서 태어나 사무라이로 자랐다. 그곳엔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가 있었다. 요시다 쇼인은 막부 말기의 급진 사상가이자 교육자다. 존왕양이(왕을 받들어 오랑캐를 물리침)를 위해 극단적인 행동도 서슴지
▲ 일본의 고대사 왜곡 동향을 알리는 KBS 방송보도 지난주 한국 언론은 일본 문화청 홈페이지의 ‘임나(任那)시대’문구로 떠들썩했다. 일본 교과서가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적어, 한국 언론을 분노케 한 후 그 연장선상에서 터져 나왔다. 도쿄국립박물관 한국 유물의 시대명(名) 표기에 발끈, 우리 스스로 임나일본부설(說)까지 거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급기야 이완구 국무총리도 나서 “일본의 고대사 왜곡”을 들먹였다. 곧바로 ‘한일고대사 전쟁’이라도 벌일 조짐처럼 보인다. 쉽게 달아오르는 언론 탓으로 돌려버리기엔 사안이 중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1960~80년 사이 많은 한일 역사학자들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에 대해 각기 다른 주장을 내놨다. 일본에 있었던 기관설, 가야 거주 왜인의 자치기관설, 가야지역의 백제 군사령부설, 가야에 파견된 외교사절설 등 다양하다. 아직 대다수 학자를 납득시키는 학설은 없다. 확실한 고고학적·문헌적 증거가 나오지 않는 상황으로 소모적 논쟁은 중지된 상태다. 그런데 일본으로 넘어간 창녕 출토품에서 사단이 벌어졌다. 한국 언론들은 ‘
▲ 현재 방송중인 KBS TV드라마 '징비록'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술잔을 잡거니 밀어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 다소나마 풀린다…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려라. 창공에 뜬 학이 이 골의 신선이라. 달 아래 행여 그 신선을 만나지 않으셨는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536~1593)이 20대에 지은 성산별곡 일부다. 젊은 시절부터 풍류를 알고 술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다. TV드라마 ‘징비록’에 정철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 유성룡(1542~1607)보다 더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통상 인식하고 있는 다정다감한 시인이 알고 보니 ‘표독한’ 정치인이었다. 지난 1일 방송분에선 정철이 주색잡기에 빠졌다는 상소가 올라와 선조(1552~1608,1567년 즉위)가 좌의정직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의 일이다. 정철의 나이 56세. ▲ 송강 정철(1536~1593) 정철이 눈치 없이 40세의 젊은 선조에게 빨리 세자를 세우라는 진언을 했다가 밉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정철은 광해군(157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1597년 음력 4월 1일 충무공 이순신은 한 달여 간 심문을 받던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경남 초계(합천군)에 있던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8월 2일까지 네달 간 백의종군했다. 백의종군은 군인이 계급 없는 백의(白衣) 신분으로, 군대 일에 종사(從軍)하는 걸 말한다. 권율의 군사자문 역할을 한 걸로 보면 된다. 석방 첫날부터 술을 들고 인사 오는 지인이 많았다. 이순신은 연일 취했다. 난중일기에 “정(情)으로 권하며 위로하기에 사양할 수 없어 몹시 취했다…술병째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줬다”고 적었다. 낮술도 했다. “일찍 길을 떠나 오산에 이르니 술을 준비해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취하도록 마시고 길을 떠났다.” 원수 같은 왜적이 다시 쳐들어왔는데 제 역할 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웠을 것이다. 백의종군길(路)이 지난달 말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에 의해 고증됐다. 한양을 떠나 충남·전남북·경남에 이르는 640㎞, 긴 여정이다. 경남(161㎞), 전남(123㎞) 구간은 3~6년
▲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78호 우리나라 국보(國寶) 및 보물 등의 일련번호가 폐지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국보를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총 317개의 국보가 있다. 1호가 숭례문이다. 국보 번호 폐지 논의는 국보 1호에 숭례문이 적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에서 비롯됐다. 일제는 1934년 8월 우리나라 보물(국보) 153건을 지정할 때 숭례문을 1호로 했다. 당시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서울 입성에 사용한 문을 기념하기 위한 속셈이 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 때문에 1996년 이후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국보 1호 교체가 논의됐지만 “혼란을 부른다”는 문화재위원회 반대로 무산됐다. 2008년 숭례문이 불타자 다시 1호 교체 주장이 대두했다. 지난해 숭례문 부실 복구 사태까지 겹치면서 번호 교체나 폐지 등 개선 작업은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83호 “일제가 자신들의 승리를 기념해 1호로 정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나라에선 이에 맞서 ‘1호 숭례문’을 지킬 논리도 명분도 없
▲ 조선 말기 의병. 1907년 일본군이 병력을 증강하고 의병부대에 대한 무력진압에 나선 가운데 영국 언론인 멕켄지는 의병활동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는 러.일 전쟁 때도 [Daily Mail]지 특파원으로 종군취재를 해 세계의 찬사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남긴 사진이다. 갑오년에 이은 을미년도 역사상 간지(干支)로 기억되는 해다. 120년 전인 1895년 민비(후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되고(을미사변), 친일정권에 의해 단발령이 내려지고(을미개혁), 이 두 사건 때문에 의병이 일어났다(을미의병). 바로 전해인 갑오년과 연장선에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갑오년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고 이어 한반도가 청일전쟁터가 됐고 갑오경장이 행해졌다. 이후 간지로 기억되는 을사늑약(1905), 경술국치(1910), 기미독립운동(1919) 등이 일어났지만 120년 전 을미년처럼 3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 ‘을미’ 이름이 붙어 불린 적은 없다. 1895년 초 일본은 독(毒)이 올라 있었다. 청일전쟁 승리에 따른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랴오둥 반도를 차지했으나 러시아 주동으로 독일·프랑스가 소위 ‘3국 간섭&
▲ 조한필/ 충청타임스 부국장, 제이누리 논설위원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3ㆍ1절이면 항상 떠오르는 노래다. 유관순 열사(1902~1920)는 3ㆍ1만세운동의 상징이다. 그런 유 열사의 키를 놓고 요즘 작냐, 크냐로 ‘작지만 큰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26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월례발표회장. 한 천안의 향토사학자에 의해 지난해 11월 발표된 ‘단신(당시 표준 키)설’에 대해 반론이 제기됐다. 이 자리에 단신설 주장 학자도 토론자로 참석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유 열사 수형기록표의 명확하지 않은 신장 표기 숫자와 사진이 주요 쟁점이었다. 단신설, 장신설 측이 각자의 주장을 펴기 위해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수감된 다른 애국지사들의 수형기록표를 제시됐다. 그 중 종묘 앞 시위를 벌였던 유 열사 동갑내기 간호사들이 있었다. 노순경(애국지사 노백린의 딸), 이신도도 1902년생으로 당시 18세였다. ‘낭랑 18세’노래에 나오듯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이 서대문감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