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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의 제주해녀와 삶(7)] 해녀 딸들이 꿈꾸는 바다

 제주해녀가 세계를 품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당당히 ‘제주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주와 대한민국의 쾌거다. 하지만 해녀는 아직도 우리의 시선에선 그저 물질이나 하며 생계를 꾸린 제주의 독특한 전통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엄연히 삶이 있고, 애환이 깃든 가족·가정사가 있으며 저승길 문턱을 오가며 가슴에 파묻은 눈물이 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심연의 바다에서 제주사(史)를 일궈온 해녀의 삶, 그리고 그 인생사 이야기들을 연속기획연재 형식으로 허정옥 교수가 풀어낸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서귀포 법환해녀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의 어머니가 해왔던 해녀의 삶을 오롯이 되살리고자 스스로도 물에 뛰어들고 있다. / 편집자 주

 

과거에는 물질이 대를 이으며 전수되었다. 어머니가 딸에게, 그 딸이 다시 딸에게. 해녀의 딸들은 이 세상에 나올 적부터 해녀로 태어났다. 배속에 있는 열 달 동안 태교는 거의 해녀의 심신을 완성시켰다. 태어난 후에는 골체(삼태기)에 누워서 파도의 자장가를 들으며 자랐다. 바다는 해녀의 딸들에게 요람이요, 놀이터였다. 그리고 해녀가 되어서는 일터요 쉼터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해녀들은 물질을 딸들에게 물려주지 않는다. 물질은 목숨을 걸고서 물속으로 몸을 내던져 돈을 줍는 직업이다. 먼 바다로 나갈 때마다 칠성판을 등에 지고, 명정포를 머리에 이고서 ‘이어도 사나’를 부르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 물질이 하고 싶어서 바다로 달려가는 딸들이 있다.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들어온 숨비소리, 숨이 다 끊어져서 ‘아이고, 어머니’를 부르는 그 소리가 못내 그리워서. 그렇게 목숨 걸고 물질해서 나를 키워준 어머니처럼 이 험한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 내고자. 그리고 해녀 어머니의 삶과 정신-수평선처럼 끝 간 데 없는 노동과 바다 속처럼 깊고도 깊은 사랑을 영원히 이어가고 싶어서 말이다.

 

다음은 바로 그 해녀의 딸들이 꿈꾸는 바다, 제주 바다의 다음 세대를 경험적으로 묘사한 글이다.

 

1. 해녀, 내 어머니의 초상

해녀가 되고 싶었다. 여느 똘(딸)들처럼 어머니가 상군인 나에게 해녀는 어머니를 뜻한다. 제주에서는 ‘해녀’라 쓰고 ‘어머니’라 읽는다.

 

어머니는 10명의 자녀를 낳아서 2남7여를 물질로 키웠다. 아니, 물질만이 아니다. 여느 제주도 어머니처럼 동 트기 전에 일어나서 물구덕을 짊어지고 큰갯물(대포바다)로 달려갔다. 허벅에 물을 긷고 아직도 어두운 바닥을 길눈으로 걸었다. 물항아리에 ‘쏴∼아’ 하니 물을 채우는 소리에 소가 ‘메∼에’ 하며 아는 체를 한다. 그래, 소야, 네가 나보다 팔자가 좋구나. 서둘러서 보리밥 한 솥 삶아 놓고, 말치(커다란 무쇠 솥)에 쇠죽도 끓여 놓는다. 밥 한 덩이를 구덕에 짊어지고 갈중이(갈옷으로 된 노동복) 걸치며 빌레왓(자갈밭)으로 내달리면, 어느새 희끄무레 동이 터오는 새벽이다.

 

그렇게 밭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해시계가 10시를 넘어설 즈음이면 김매던 호미를 내던져 놓고 부리나케 바다로 내달렸다. 물때에 맞춰서 물에 들어가야 망실이가 고득게(가득하게) 구제기(소라)를 잡을 수 있다. 구제기도 팔아야 하는 상품이라 어중간하게 잡으면 상인에게 미안하다. 허기진 배가 등에 붙어서 꼬르륵대지만, 물질구덕에 담긴 태왁이 ‘와랑 와랑’ 흔들면서 ‘제게 도르라게(빨리 달려라)’며 재촉한다.

 

‘물로야 뱅뱅 돌아진 섬에 삼 시 굶엉 이 물질 해영, 혼푼 두푼 모여 논 금전, 부랑자 술잔에 다 들어간다’란 노래는, 사실상 해녀들 삶의 고백이다. 여기서 부랑자는 남편을 뜻한다. 어떤 이들은 ‘정든 님’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예 ‘아이들 공부’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해녀들의 생애사를 보면 대부분의 해녀들이 가장의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남편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집을 나가버리거나, 소득이 별반 없는 게 대세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제주도의 아버지들은 어머니들에 비해 생존과 생계 측면에서 운신의 폭이 더 좁았던 것으로 보인다. 돌과 바람으로 둘러싸인 섬에서 밭은 돌짝밭이요, 바당은 풍랑길이었다. 돌짝밭은 쪼그리고 앉아서 골갱이(호미)로 땅을 파야 하는 노동을 요구한다. 전형적인 여자의 일이다. 쟁기질을 하거나 밭담을 쌓는 일 정도가 남자의 몫이다. 바당은 보재기(어부)로 나갔다가 바람을 만나면 풍선이 뒤집히는 위험천만의 일터였다.

 

 

해녀들은 보통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점심을 거의 거르고서 작업을 한다. 물질이란 게 바다 속으로 전신을 낙하시켜 위장이 역류되는 노동이 아닌가. 여름해가 오후 네 다섯 시쯤에 이르면 어머니는 물에서 나와 다시 밭으로 돌아온다. 아침에 매다 만 김매기를 마저 끝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 해가 떨어져 사위가 어두워지면, 다시 새벽의 그 걸음으로 집을 향해 내달린다. 저녁만큼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낭푼이(커다란 알루미늄 밥그릇) 밥을 퍼먹는 게 어머니의 낙이다.

 

자식들 입에 쑥쑥 들어가는 밥을 보노라면 어느새 허기졌던 하루가 뿌듯하게 불러 온다. ‘밤도 모르곡, 낮도 모르곡’, 그저 밤낮으로 일속에 파묻혀서 사는 게 제주도 어머니의 일생이다. 오죽하면 내 어릴 적 기억에는, ‘어른들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다’라고 저장되어 있을까? 그러니, ‘'쉐(牛)로 못 나난 제주여자로 나신예’라는 속담은 그야말로 제주도 어머니들의 일상이요 인생인 셈이다.

 

게다가 제주도 어머니들에게는 식사, 빨래, 육아와 같은 가사가 덤으로 주어진다. 가사노동을 전업으로 하는 육지 어머니들과는 매우 대조적인 환경이다. 지금의 어버이날이 어머니날이던 시절, 전국의 명사들이 어머니를 주제로 해서 ‘영원한 고향, 어머니’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다. 수필집이라서 그런지 첫 번째에는 피천득 선생님의 ‘엄마’란 작품이 실렸다. 우아하고 청초할 뿐만 아니라 서화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했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잔잔하게 그려져 있다.

 

마치 난초와 같은 여인상이 떠오르는 글이다. 이에 반해 책의 말미에 등장한 오성찬 선생님의 ‘제주도 어머니들’은 잡초보다 더 억센 생활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1950∼60년대, 제주 여인들이 얼마나 가혹하게 모성을 이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얘기다.

 

‘어느 젊고 가난한 아낙이 아이를 가져서 입덧을 하게 되었다. 얼마나 돼지고기가 먹고 싶었던지, 도통(변소)에 가서 디딤널을 타고 앉아 돼지 목덜미의 털을 몇 가닥 뽑았다. 그것을 부엌으로 가지고 와서 아궁이에 태우면서 단백질 냄새로 입덧을 달랬다. 시부모의 눈치를 봐가며 아무도 몰래 입덧을 삭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여인이 어디 이 주인공뿐이었으랴. 그때의 제주 여인들, 우리네 어머니들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이 광경을 떠올리면, 괜스레 서러움이 밀려오면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비어져 나온다.

 

제주의 일반적인 전통음식을 들라면 기껏해야 삶은 돼지고기나 자리 물회, 빙떡(메밀전병), 몸국 등속을 꼽는다. 다소 고급으로 치자면 성게국이나 옥돔구이, 전복죽 정도다. 음식문화는 팔도에서 가장 빈약한 게 제주도다. ‘어스름 할 때 일어나서 물 항아리 가득 물 길어 놓고, 삶아낸 보리밥 한 술 뜨는 둥 마는 둥, 갈옷을 걸치면서 돌짝밭으로 내달려 가는 어머니’에게 무엇을 더 바라랴. 어머니로서 음식에 신경을 쓰기에는 산기슭의 자갈밭, 물굽이 심한 바당밭, 사철 거친 비바람이 너무도 버거운 일터가 아니었을까?

 

그 속에서 한 식솔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역할이 밭가는 소보다 더 무거운 멍에였을 것이다. 소보다 더 많은 노동의 짐을 짊어진 제주도 어머니들, 우리 어멍의 구부러진 등 위에 놓여 있는 삶의 무게여!

 

 

 

이토록 억척스런 어머니의 삶은 딸들에게 대물림되어 삶의 기준이 된다. 육지로 나가 대학을 다니고 도시생활을 30년 넘게 하면서도 아파트 내 주부들과 한가하게 노닥거리지 못하는 건, 그 시간에도 땀 흘리며 일하실 어머니 때문이다. 뉴욕타임스가 조명했듯이, 워낙에 제주 해녀는 ‘한국의 첫 워킹맘(working mom)으로서 여성의 독립성과 강인함을 상징하는 전문직’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게다가 제주도 어머니들은 오몽(움직임)을 할 수 있는 한 죽기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풍습이 있다. 그래서 제주도 딸들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일평생을 근로의식으로 살아간다. 지구상 어디에서나 여자의 일생이란 모전여전(母傳女傳)의 숙명을 따라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아니던가.

 

인생은 바다와도 같아서 사흘간 잔잔하면, 나흘은 출렁인다. 때로는 태산처럼 높은 파도가 삼킬 듯이 달려든다. 그 앞에서 주저앉고 싶을 때, 우리, 제주의 딸들은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라면 어떻게 하실까? 파도를 아랑곳하지 않고 ‘호오∼이, 호잇!’ 하면서 바다 속으로 가열차게 들어가시리라. 그리고 전장의 병사처럼 파도를 밀어제치며 용감하게 솟구쳐 나오실 게다.

 

그래서 물질이 하고 싶은 거다. 어머니처럼, 아니, 그 절반만큼만 살아낸대도 이 버거운 삶의 무게를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차라리 무릎을 꿇어버리고 싶고, 이제는 두 손을 들어버리고 싶은 인생의 고난과 절망 앞에서, 다시금 일어서기 위해서 말이다. 해녀의 딸들에게 물질은 어머니요, 어머니는 삶의 앵커가 아닌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 다시 시작하는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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