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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의 제주해녀와 삶(2)] 원정물질에 나서다

 제주해녀가 세계를 품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당당히 ‘제주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주와 대한민국의 쾌거다. 하지만 해녀는 아직도 우리의 시선에선 그저 물질이나 하며 생계를 꾸린 제주의 독특한 전통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엄연히 삶이 있고, 애환이 깃든 가족·가정사가 있으며 저승길 문턱을 오가며 가슴에 파묻은 눈물이 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심연의 바다에서 제주사(史)를 일궈온 해녀의 삶, 그리고 그 인생사 이야기들을 연속기획연재 형식으로 허정옥 교수가 풀어낸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서귀포 법환해녀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의 어머니가 해왔던 해녀의 삶을 오롯이 되살리고자 스스로도 물에 뛰어들고 있다. / 편집자 주

 

17세가 되자 부산 근처 밀포(미포)로 초용(첫 번째 육지물질)을 떠났다. 전주가 어리다며 데려가지 않으려 해서 해녀들의 아기업개로 따라붙었다. 현장에 도착해서는 아기를 보지 않고 물에 들어 미역과 우미(우뭇가사리)를 채취했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욕심 있고 부지런하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육지 바다는 제주 바당보다 파도가 덜하고 수심도 얕았다. 하지만 2∼3월경 바다에 신마(차가운 조류)가 지면 물이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웠다. 그것도 아침 일찍 식전에 물에 드니, 얼마나 차가운지 몸이 ‘콰지직’ 하게 찢어지는 것 같았다.

 

순간 어리둥절해서 머리가 싸∼아 하니 아프기도 하였다. 1시간쯤 작업하고 나오면 손톱 발톱이 새까맣게 죽는다. 온 몸이 벌겋게 얼어서 감각도 사라진다. 불턱으로 올라와서 불을 좀 쬐면 온 몸에 울긋불긋한 물꾸럭(문어) 무늬가 퍼진다. 그 몸으로 미역을 돌 위에다 널어서 말렸다. 요즘처럼 고무옷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돈 벌 생각으로 열심을 내다보니, 상군 못지않게 ‘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먼 바다로 배를 타고 난바르를 나갈 때는 노를 저으며 노래를 불렀다.

 

“돈아 돈아, 말 모른 돈아, 부르거든 돌아오라.
때 묻은 돈 아니면은 부모형제 이별을 하고
낯설고 물설은 여기, 이 산천을 왔겠느냐.

여끝 돌끝에 내 눈물이여,
한숨을 쉬면 동남풍 되고, 눈물을 흘리면 한강수여
내 임자는 어딜 가고 아직까지 아니나오나.
천년이 가도 원수로구나, 만년이 가도 원수로구나
우리 어멍 날 베영 날 때,
손에 궹이 벡이라고 날 납데강(손에 굳은살이 박이라고 날 나셨습니까)”

 

대부분 남편을 잃고 물질로 자식을 키우는 해녀들이라, 노랫소리가 몹시도 구슬펐다. 그 당시 해녀들은 남편이 죽으면 장례절차가 거의 끝나고 봉분이 다져질 즈음, 조문 온 동네 여자들과 장구 치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망자에 대한 슬픔에서 속히 벗어나 어서 빨리 삶으로 귀환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아, 제주 여인들에게는 슬픔을 삭일 눈물의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나도 왠지 슬퍼져서 함께 훌쩍이며 설움을 삼켰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그 마음속의 고무신이 그렇게도 슬펐다. 생각하면 애통함과 서러움으로 점철된 어머니의 인생 또한 애간장을 녹였다. ‘사는 게 뭣산디’ 하는 고단함에 고개를 들어서 고향 하늘을 바라보면 오라방(오빠)의 다정한 얼굴이 둥그렇게 떠올랐다.

 

‘우리 막둥이는 어디가나 몸조심하고 건강해야 한다. 아버지가 내게 잘 돌보라고 맡겨주신 유산이다’라면서. 오라방은 어디서 빚을 얻었을까? 그 귀한 고무신을 속수 사다가 무릎 꿇고 신겨주던 다정한 손길. 당시는 고무신 한 켤레가 쌀 한 가마니 값이었다. 제주 여자는 시집갈 때까지 살 1됫박을 먹어보지 못하던 시절의 얘기다. 아버지 장례식 날 쌀밥을 얻어 먹여 주던 오라방은 평생 동안 내게 아버지처럼 굴었다. 고아 같은 마음을 푸근하게 기댈 수 있는 언덕 같은 존재였다.

 

숨비소리에 귀에 닿은 '제주가시나'

 

그런데 육지 사람들은 제주해녀를 천하게 여기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질을 흉내 내거나 숨비소리를 내지르면서 ‘제줏가시나’라고 놀려댔다. 한라산에서 공을 차면 바다로 떨어지느냐, ‘오죽하면 바다 속을 뒤져서 먹을 것을 구하러 왔느냐’면서 하대하였다. 하지만 인솔자는 달랐다.

 

오히려 그곳 남자들이 괴롭히기라도 할까봐 엄하게 굴면서 우리 편이 돼주었다. 가끔은 총각들이 우리가 머무는 집 근처에 와서 휘파람을 불기도 하였다. 제일 어린 내게 보내는 수작이 심상치 않아서 혼자서는 절대로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물때가 아니거나 바다에 놀이 일면, 주인네 집안일을 거들어 주거나 밭일을 해주었다. 그러면 된장과 간장을 주기도 하고 방값을 깎아주기도 하였다. 해녀들 서 너 명이 한 방을 같이 썼다. 우리가 있던 방은 해가 잘 들지 않고 난방도 잘 안되었다.

 

순례 삼춘이 아기를 낳아서 생가지 나무를 해다가 불을 뗐는데, 좀처럼 방이 맨도롱 또똣(따뜻)해지지가 않았다. 얼음같이 찬물에다 언 손으로 기저귀를 빨았다. 삼춘은 사흘만에 일어나서 주인집에다 아기를 맡겨놓고 물질을 나갔다. 주인은 봄에 태어났으니 ‘성춘’이가 좋겠다면서 아기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내 이름과 같은 아기를 보니 특별한 인연이 느껴졌다. 밤에는 순례 삼춘 대신에 우는 아기를 업고서 마당을 서성이며 아기를 재웠다. 3월 보름 밝은 달이 써늘하게 비쳐들면, 찬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든다. 아기도 서럽고 나도 서러웠다. 지금쯤은 동백꽃이 붉게 피어 있을 고향집의 푸근한 마당이 눈물겹게 그리웠다. 어머니의 체온이 남아 있을 마당가의 물허벅과 우녕밭(텃밭)의 초마기(열무)도 생각났다. 봄볕이 따뜻해지면 보랏빛 꽃을 피워 올리는 그네들을 어머니는 무척이나 예뻐하였다.

 

같이 간 해녀들 중에서 나보다 두 살 위인 효심이 성님은 물질도 잘 하고 성품도 씩씩했다. 열 살 때부터 물질을 잘 해서 성산포에서 소문난 애기좀수가 되었다. 그 덕분에 열다섯 살부터 동네 상군좀수들과 함께 육지물질을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간 육지는 부산 남천동이었는데, 지금은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주로 우미·청각·소라·전복을 잡았다. 얼마나 억척스레 물건을 잘 했던지 사람들이 모두 ‘상군처녀’라 불렀다. 물질은 욕심 있고 다그져야(다부져야) 하는 일인데, 그녀는 천상 제주해녀였다. 파도치며 거친 바다나 검푸르게 깊은 바다나 어떠한 바다도 결코 무서워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3년 동안 물질로 이름을 날리다 보니 고향에서 혼처가 생겼다. 부잣집 아들에다 인물도 좋다고 하였다. 당시는 물질 잘 하는 처녀가 최고의 신부감이었다. 집에 와보니 벌써 잔치 도새기(돼지)를 잡아놓고 있었다. 결혼식 3일 전이었다. 대부분의 처녀들이 초신(짚신)에다 노란물을 들여서 시집갈 때 신었는데, 그녀는 어머니가 일본에서 가져온 고무신을 신었다. 열여덟 살, 꽃보다 고운 나이였다. 그런데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한 신랑은 한량에다 보름쟁이(바람둥이)였다. 술 먹고 화투 치고 노는 게 일이었다.

 

그나마도 얼마 없어 부산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도 부산 근처로 원정물질을 떠난다는 동네 해녀들과 함께 육지로 올라 온 거였다. 청진에 살던 친정아버지가 제주로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돌아가셨다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렇게도 씩씩하고 명랑하게 구는 효심이 성님이, 왠지 나는 쓸쓸하게 느껴졌다. 간혹 먼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어서 내가 지나가는 것도 모르는 그녀가, 가슴 절이게 아팠다. 그의 외로움이 ‘싸∼아 하니 내 가슴속으로 밀물져 들어와서는 나의 서러움과 섞여서 파도치며 울었다.

 

우리는 가끔 해 저무는 밀포 바닷가에 앉아서 고향하늘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밀포 강산 뭣이 좋아 부모형제 이별하고
이 산천을 어디라고 이팔청춘 오랐던고.
언제이면 어둑 칠월, 동동 팔월 돌아오나.
고향산천 돌아가서, 부모형제 얼굴 보나.”

팔월 명절이 다가오면 바닷물이 차가워진다. 곧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거다. 가는 길에 부산을 경유해서 추석 선물을 사고 갈 짬이었다. ‘부산진 시장에 들려서 오라방 선물을 사야지’ 싶으니,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반년을 고생했지만 생각보다 돈은 얼마 벌지를 못하였다. 선주는 ‘이 다음에 꼭 정식 해녀로 들어와서 남들처럼 큰돈을 만져보라’며 달랬다.

 

효심이 성님은 ‘십 만원을 벌었다’며, 자기 이름으로 돌랭이를 산다고 하였다. 모두들 돈 계산으로 얼굴마다 희색이 만연했다. 오랜만에 배부르게 느껴지는 훈훈함이었다.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는 게 목숨 걸고 물질해서 벌어온 금전의 의미였다. 나도 동네 할망들에게 바늘과 실을 선물할까, 사과를 한 상자 사고 갈까 고민하며 돈주머니를 쓰다듬었다. 돈이 무엇이기에 사람 마음을 이다지도 설레게 하는 걸까? 또 아버지 생각이 났다. 이 돈을 벌려고 저승길로 가시다니.... 집 떠나기 전날 밤에 우리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 다시 시작하는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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