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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의 제주해녀와 삶(5)] 세계가 알아주는 직업, 해녀

 제주해녀가 세계를 품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당당히 ‘제주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주와 대한민국의 쾌거다. 하지만 해녀는 아직도 우리의 시선에선 그저 물질이나 하며 생계를 꾸린 제주의 독특한 전통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엄연히 삶이 있고, 애환이 깃든 가족·가정사가 있으며 저승길 문턱을 오가며 가슴에 파묻은 눈물이 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심연의 바다에서 제주사(史)를 일궈온 해녀의 삶, 그리고 그 인생사 이야기들을 연속기획연재 형식으로 허정옥 교수가 풀어낸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서귀포 법환해녀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의 어머니가 해왔던 해녀의 삶을 오롯이 되살리고자 스스로도 물에 뛰어들고 있다. / 편집자 주

 

제주를 대표하는 속담 중에는 ‘똘한 집이 부재(딸 많은 집이 부자)’란 말이 있다. ‘똘 다슷 나민 부재 된다(딸 다섯 낳으면 부자 된다)’는 속담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이 두 속담을 두고 보면, 제주에서 딸 부잣집은 적어도 딸이 다섯 이상은 되어야지 싶다. 딸이 셋만 되어도 한 해에 밭을 한 뙈기씩 살 수 있으니(똘 셋이민 혼해에 밭 혼파니썩 산다), 다섯이면 갑절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집은 딸이 일곱이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딸들을 ‘7공주’라 불렀다. 위로 하나를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8선녀’가 되었을 것이다. 이 딸들을 데리고 구명물 밭에서 검질(김)을 매다보면, 중문 오일장을 오가는 사람들이 꼭 한마디씩 거들었다. “정열이 어멍은 조크라. 똘들이 하난 놉 빌지 안해도 되곡(정열이 어머니는 좋겠다. 딸들이 많으니까 일꾼을 빌리지 않아도 되고)!”

 

 

맞는 말이다. 우리 집 딸들은 얼마나 착한지, 집안일이고 밭일이고 척척 손발을 맞추며 잘도 잘 해냈다. 새벽에 일어나서 여명이 트기 전에 내가 밭으로 가버리면, 자기들끼리 돌아가면서 식사, 청소, 빨래 당번을 정해서 집안일을 처리했다. 게다가 소와 돼지, 개에게 먹이를 주고, 내가 먹을 밥까지 챙겨다 주고서 학교로 갔다.

 

학교가 끝나면 뭐라 하지 않아도 밭으로 와서는 내가 하는 일을 말없이 도왔다. 농번기에는 식사 당번 한 명만 남겨두고 모두들 밭으로 와서 일하다가 시간이 되면 학교로 갔다. 공부가 끝나면 다시 밭으로 돌아와서는 내가 하는 일을 달려들어서 거들었다. 해가 기울어지면, 당번이 먼저 집으로 가서 저녁밥을 짓고, 나머지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김 매기, 보리 배기, 유채 털기, 벼 심기, 고구마 캐기, 조 타작, 콩 수확 등 무슨 일이나 같이 했다. 그러면서도 딸들은 내게 늘 미안해하였다. ‘우리가 너무 많이 태어나서 어머니는 밤낮으로 일만 하신다’고. ‘우리를 모두 공부시켜 주시느라고 어머니는 목숨 걸고 물질까지 하신다’며.

 

하지만, 실상은 나도 늘 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고망 터진 옷도 입엉 댕겨사 후제 잘 산다(구멍 터진 옷도 입고 다녀야 나중에 잘 산다)’면서 좋은 옷을 사주기는커녕 터진 옷도 각자가 기워서 입도록 하였다. 아침마다 학교에서 ‘이거 사오렌 해수다, 저거 가졍오렌 곱디다(이거 사오라 했어요, 저거 가져오라 말했어요)’ 해도 못들은 척 밭으로 내달려 버린 날이 부지기수다.

 

‘딸들이 셋만 되어도 발바닥에 먼지 하나 안 뭍치고 서울대학이라도 보내줄 수 있을텐데....’ 하는 것이 내 본심이건만, 학교는 간판이고 일만 부리며 살았다. 아이들은 봄·가을 소풍이나 원보훈련, 수학여행처럼 공부가 없는 행사에는 ‘가사조력’이라 쓰고서 결석을 하였다.

 

방과 후에 영화구경을 하거나 체육대회를 할 때도 슬그머니 밭으로 와서는 내가 하는 일을 도왔다. 동네에는 초등학교만 마치거나 중학교까지만 하고서 집안일을 돕는 계집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 딸들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어머니가 해녀인 집 아이들은 대체로 물질도 함께 했다.

 

사실, 딸들이 많아서 부자일 수 있는 것은 물질을 시켜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제주에서도 물질만한 벌이가 없지만, 육지물질을 다녀오면 소도 사고 밭도 살 수 있었다. 보통 3월에 가서 8월에 돌아오는 일정이므로, 6개월 벌이 치고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셈이다. 실제로 바당 속에서 금을 주운 일도 있었다.

 

한경면 신창에서는 해녀들이 물질을 하다가 모래 속에 숨어 있는 금을 보았다. 젓가락처럼 길쭉한 게 삐죽 삐죽 나와 있어서 주웠는데, 그것들이 머정(운) 좋게도 10돈짜리 금궤였다. 신창해저유물이 발견된 것이었다. 결국은 나라에서 모두 회수해 갔지만, 그 값을 받아서 냉장고도 사고 시계도 샀단다. 우스개 같은 사건이지만, 실제로 물질은 보물을 캐는 거나 마찬가지다. 깊은 바다에서 몇 년씩 묵은 전복을 따게 되면 금값이나 마찬가지로 비싸게 팔 수 있다.

 

나는 육지물질을 시늉밖에 못해봐서 돈을 제대로 벌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옆집에 사는 옥수는 흑산도 물질을 다녀와서 바로 암소 한 마리를 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완도에서 벌어온 돈으로 돌랭이(작은 밭)를 사들였다. 밭이 너무 작아서 남편이 ‘농약을 사러 가는 게 창피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서산, 감포, 포항 등으로 나가 7년을 물질하는 동안 주변 밭들을 계속 사서 붙였다.

 

마침내 4천 평이나 되는 큰 과수원이 되었다. 물질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빨리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다. 옥수가 시집 올 때는 집 한 칸도 없어서 작은 초가집을 빌려서 살았다. 지금은 동네 1등가는 큰 집을 지어서 ‘부자’ 소리 들으며 호기롭게 살아간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집이다.

 

가끔 옥수를 보면서 우리 집 큰 딸을 생각한다. 정열이도 물질을 시켰으면 옥수만큼은 했을 것이다. 욕심 있고 부지런한 게 영락없이 나를 닮았다. 하지만 정열이는 물질 대신에 제주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보냈다. 우리 마을 최초의 여고생이 되었다. 정열이가 까만 교복에 하얀 칼라를 나부끼면서 학교로 떠나던 날, 아방은 대문가에 서서 오래토록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집 아방은 초등학교 2년까지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다. 동네에서 나이가 같은 갑장들이 ‘동창회’로 모이는 것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다. 그러니 정열이 뒤를 이어서 정복, 정희, 정숙, 정심, 정옥, 정례를 차례차례 학교에 보내면서 아방은 일만 일만 하였다. 친구들처럼 술도 담배도 안했다. 그래도 우리는 늘 돈이 부족하였다. 하루라도 빚을 얻으러 다니지 않은 적이 없었다.

 

딸들도 고생스럽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딸들이 농사나 물질이 아닌 일을 하며 살아가길 바랐다. 특히 목숨 걸고 하는 물질만큼은 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은 사람이 할 게 못 된다 싶었다. 어느 어미가 자식에게 ‘칠성판을 등에 지고 명정포를 머리에 이고서 목숨 걸고 하는 일’을 물려주고 싶겠는가?

 

그런데 요즘 들어 우리 딸 하나가 그렇게도 물질을 하고 싶어 한다. 해녀가 되고 싶다며 그야말로 안달이다. 물질도 타고 나는 법이니, 정녕 나를 닮은 게 분명하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하루 종일 행복하단다. ‘우리 어멍의 바당’이란 글을 써서 상을 받아 온 적도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기상군 말을 들었던 정열이, 정심이, 정옥이는 ‘물질을 시킬 껄’ 하는 생각도 든다.

 

중학교 때까지는 바당에 데리고 다니면서 물질도 시켰지만, 일단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물질을 금하였다. 물질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험하고 고달픈 직업이다. 그런데도 존대를 받기는커녕, 대체로 여자가 물질하면 남자는 놀고먹는다.

 

하지만 요즘은 해녀도 세계가 알아주는 귀한 직업이 되었단다. ‘인류유산’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해녀를 보려고 제주도로 몰려온다니. 세상은 참말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박사’ 공부를 한 우리 딸도 해녀가 되고 싶어 하니 말이다. 그래, 일곱 딸 중에 세 명만 물질을 시켰더라면, 딸 셋이서 한 해에 밭 하나씩만 샀더라도, 우리 집은 대포 1등가는 부자가 됐을 텐데..... 지금은 초가집 한 칸, 돌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 딸을 일곱이나 낳은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귀한 해녀가 한 명도 없는 것을, 해녀가 아니면 특별하지 않은 것을!

 

그래, 내 딸이 이제라도 물질을 할 수 있으면, ‘새서리 섯구석이나 숨빌 똘(깊숙한 바다에서도 숨비질 할 딸)’처럼 훌륭한 해녀가 되었으면 좋겠다(주: 새서리 섯구석은 동김녕마을 앞 깊숙한 바다의 지명을 뜻한다). 내 멀찍이서 가만히 지켜보면, 공부는 못 가르쳐도 물질은 훈수할 수 있으리라. 어멍처럼 삼시 굶으멍·욕심부리멍·목숨내걸엉 숨비질 말고, 잘 먹으멍·놀아가멍·웃으밸탁허멍 허라고!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 다시 시작하는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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