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한필/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충청타임스 부국장 1995년 2월의 어느 날. 한국 신문사상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한 주요 일간지의 사회면 톱기사로 TV드라마가 올랐다. 최민수ㆍ고현정이 나오는 ‘모래시계’를 보려고 직장인들 귀가시간이 빨라졌다는 기사였다. 경쟁 언론기관이기도 한 방송사 관련 뉴스를 크게 보도하지 않던 신문의 관례를 깬 ‘사건’이었다. 남자들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밖에 나가선 “집사람(부인)들이나 보는 것”이라며 좀처럼 입에 담지 않던 때였다. 이후 TV드라마 혹은 연예오락프로의 유행어까지 신문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독자들 관심을 끌기에는 이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오래전 일이다. 모신문사 편집국장이 편집기자가 달아온 제목을 이해하지 못해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당시 유행어를 가미한 제목을 접한 그가 “무슨 제목이 이러냐?”며 핀잔을 줬다. 그러자 주위의 다른 기자들이 국장 얼굴을 한심한 듯 쳐다봤다. 그 국장은 저녁에 취재원을 만나는 게 기자의 주요 덕목으로만 알았지 TV 등을 통해 유행을 감지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던 것이다.
▲ 조한필/ 충청타임스 부국장,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종편(종합편성채널)이 살판났다. 대선을 계기로 시청자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사토크프로그램 시청률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 덕에 전체 시청률까지 조금 오른 상태다. 밤 8~10시 골든타임대 지상파 채널은 드라마ㆍ예능프로를 내보는데 종편 채널은 대부분 대선 이야기로 편성돼 있다. 국민의 선거 관심을 등에 업은 특화전략이다. 낮이나 밤이나 오로지 선거 특집방송이다. 보도전문 채널인지 종합편성 채널인지 헷갈릴 정도다. 시청자는 채널을 옮겨다니며 입맛에 맞는 앵커나 사회자, 패널을 찾는다. 출연자는 톡톡 튀는 사람이 많다. 가끔 방송에 어울릴까 염려되는 ‘과격한’ 단어가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이것이 시청자 눈과 귀를 잡아매니 종편 입장에선 “굿”이다. 모 교수는 박근혜 후보에 대해 심한 표현을 쓰다가 프로에서 하차했지만 해당 프로는 주가를 높인 셈이 됐다. 이들 종편의 대담 프로를 보고 있노라면 보수 성향이 농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조중동 보수신문이 모태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종편은 생동감을 주기 위해 대선 프로를 온종일 생방송(LIVE)으로 진행한다.
▲ 조한필/충청타임스 부국장,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지난 3일 대전·세종·충남지역 목사 여러 명이 대선에 나온 특정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러 천안시청 브리핑룸을 찾았다. 그들은 목회자 133인을 대신해 발표한 선언문에서 “이번 선거는 권위주의 시대로 역주행할 것인가, 국민과 함께 미래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매우 중차대한 선택”이라며 “우리 기독교인들은 000후보 당선을 위해 힘을 모을 것을 다짐한다”고 했다. 그들은 또 “000후보는 대통령 기본 덕목인 청렴과 도덕성을 겸비했다”며 “충청도는 대선 때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린 곳으로 이번 충청의 선택은 000후보”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활동할 거냐”는 기자 질문에 “이번 일요일 설교 때부터 신도들에게 000후보 지지를 당부할 것”이란 ‘위험천만한’ 발언도 했다. 1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온갖 단체들이 특정후보 지지선언을 하고 있다. 그런 행동의 목적은 뭘까? 자신의 정치적 선언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길 원할 것이다. 혹은
▲ 조한필/ 충청타임스 부국장,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살인범이 한 달 이상 잡히지 않자 피해자 유족들이 현상금 5억원을 걸었다. 제주 올레길 피해자의 남동생은 누나를 죽인 살인범이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형에 처해지면 법원 앞에서 분신자살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울산 자매살인사건 범인에 대해선 부모와 친구들이 지난달부터 전국을 돌며 사형촉구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남편ㆍ누나ㆍ자식을 무참히 살해한 자를 용서할 수 없다.” 살인범을 못 잡는 경찰, 살인범에게 응당한 죗값을 묻지 않는 사법부를 앉아서 볼 수만 없다.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피 끓는 분노가 느껴진다. 똑같은 심정일 순 없겠지만 깊은 공감을 느낀다. 이젠 흉악범 응징에 가족이 직접 나서는 시대다. 지난 8월 어느 날 오후 10시, 50대 부부가 용인 한 전원마을 자신의 집 앞에서 괴한 2명의 기습을 받았다. 남편은 둔기에 여러 차례 맞아 13일 만에 숨졌다. 외딴 곳이라 목격자도 없었고 비가 와서 부인은 범인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수사는 오리무중이다. 가족들은 계획적 범행으로 단정 지었다. 남편은 부동산업을 하면서 최근 여러 명과 다툼을 겪었다. 협박 전화가 걸려
▲ 조한필 객원논설위원/ 충청타임스 부국장 'MB 임기에 맞춰 왜색(倭色)으로 숭례문 도배.’ 한 국회의원이 지난 5일 국정감사 때 돌린 보도자료의 제목이다. 복원 막바지 공사가 한창인 숭례문의 단청(채색) 작업에서 “한가지 빼고 9가지 모두 일본산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2008년 소실된 숭례문 복원은 국민적 관심사다. 복원과 관련된 모든 게 이슈화됐다. 그래서인지 주무기관인 문화재청은 지난 6월 현장설명회에서 단청은 천연안료를 사용하기로 했는데 “석간주(산화철을 함유한 붉은 흙), 호분(고운 조개 가루), 먹을 제외한 안료와 아교는 일본 수입품을 사용한다”고 미리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결국 호분과 먹까지 일본산을 사용하게 됐다. 이런 ‘왜색 단청’은 예견된 일이었다. 우리 문화재 단청은 최근 40여 년간 천연안료 대신 화학안료를 사용해 왔다. 중국제를 많이 사용하던 조선시대에 일부 안료가 국내에서 생산됐지만 근래엔 어떤 천연안료도 국내에선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수요가 없으니 만드는 사람이 없다. 왜 천연안료를 안 썼을까? 1970년
▲ 조한필/ 충청타임스 부국장,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지난 24일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한 ‘과거사’사과가 계속 입방아에 오른다. 대표적 보수 논객인 조갑제씨는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박근혜씨는 아버지를 옹호하고 그 평가를 역사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어떻게 사람의 생각이 이 짧은 기간에 180도 바뀔 수가 있는가”라며 “표를 얻기 위한 정치쇼”로 평가절하했다.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조씨는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양심을 버리고 지지 세력을 배신하고 아버지와 조국을 깎아내림으로써 표를 구걸한 이가 당선된 예는 없다”는 ‘악담’도 서슴지 않았다. 고 장준하 선생 아들 등 유신정권 피해 유족들도 26일 “진정성이 없어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라는 입장을 밝혔다. 대통령 선거에 나선 사람이 모두 전직 대통령들에 대해 평가를 내놓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언론은 박 후보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들이 그가 대통령이 되려면 대통령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평가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비후보
▲ 조한필/ 충청타임스 부국장,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영화나 소설은 역사 서술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팩트(사실)와 픽션(허구)을 버무린 팩션영화는 더욱 그렇다. 19일 개봉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1575~1641)이 독살 위기로 한 천민을 자신을 대신해 왕 노릇 시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가 떠오른다. 이 영화는 조선왕조실록의 한 기록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광해군 8년(1616년) 2월 28일, 왕은 “숨겨야 될 일은 조보에 내지 말라”고 했다. 조보(朝報)란 조선시대 조정의 일을 전하는 소식지로 왕의 통제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영화는 이 ‘숨겨야 될 일(可諱之事)’에 무슨 큰 비밀이 있는 양 상상력을 동원해 뻥튀기했다. 숨겨야 될 일은 광해군이 다른 이로 하여금 왕 노릇 시키는 것이다. 영화는 실록에서 광해군의 15일간 행적이 사라진 것을 추적했다고 했으나 그건 광해군일기 정초본에 기록이 없을 뿐이지 중초본에는 광해군 행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초서로 휘갈겨 쓴 중초본을 정서한 정초본엔 무슨 연고인지 기록이 누
▲ 조한필/ 충청타임스 부국장,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천안의 독립기념관에서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베이징에 있는 중국항일전쟁기념관이 두 기관 교류전 형식으로 지난 15일부터 ‘중국의 항일전쟁; 1931~1945’특별전을 열고 있다. 난징(南京)대학살 전시물 중 오래된 한 일본신문 기사가 눈에 띈다. ‘100인 참살(斬殺) 신기록-무카이 106명 대 노다 105명’. 1937년 12월 13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에 두 일본인 장교가 일본도를 잡고 늠름하게 기념 촬영한 사진이 ‘100인 참살 경쟁하는 두 장교’란 제목과 함께 실렸다. ‘두 소위 다시 연장전’이란 기사 부제로 보건대 이들이 당초 중국인 100인을 일본도로 베어 죽이기로 했는데 당초 목표를 넘겨 다시 경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상적인 전쟁의 모습이 아니다. 살인은 전쟁 과정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행위다. 그런데 언론은 살인을 부추기듯 대서특필하고 있다. 당시 일본사회가 광적인 침략주의에 빠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난징대학살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당시 국민당 정부가 있던 난
▲ 조한필/ 충청타임스 부국장,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이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 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라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1597년 7월 23일,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내린 교지의 한 대목이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수군이 왜군에게 궤멸했다는 보고를 받고, 부랴부랴 이순신 장군을 다시 불러 들이고 있다. 이 교지(2011년 보물 지정, 현충사 전시)에서 선조는 “이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충무공의 파직을 후회하며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尙何言哉)”를 두 번 반복하며 사과의 뜻을 전하고 있다. 나라가 풍전등화, 위기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그대를 평복 입은 속에서 뛰어 올려 도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전라경상 등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그대는 도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다가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요해지를 지켜줄지어다.” 이 같이 염치없는
▲ 조한필/ 충청타임스 부국장,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1. 양녕대군(1394~1462)은 친동생 세종(1397~1450)보다 다섯 살 위다. 아버지 태종은 왕위 계승자로 충녕대군(세종)을 택했다. 양녕은 일찍이 세자로 책봉됐으나 자유분방한 생활로 궁중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폐위돼 전국을 누비며 풍류를 즐겼다. 시·서에 능한 그는 동생 세종보다 12년 더 살았다. 그가 죽자 조선왕조실록에 “성품이 어리석고 곧았으며, 살림을 돌보지 않고 활쏘기와 사냥을 즐겼다. 세종의 우애가 지극했고, 그 또한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아 능히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함을 얻었다”고 적었다. #2. 월산대군(1454~1489)은 친동생 성종(1457~1494)보다 세 살 위다. 성종의 즉위는 할머니 정희왕후(세조비)가 세조 유명을 받들어 시행한 것이라고 하지만 장인 한명회의 힘이 주효했다. 비정상적 왕위 계승에 낙담한 월산대군은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하여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만 했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성품이 화려함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시주(詩酒)만 좋아했다…아무리 즐거움이 지극하더라도 법도에 따르고 조금도 실
▲ 조한필/ 충청타임스 부국장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 지난주 방송된 TV드라마 ‘무신’에서 최우(정보석 분)가 김준(김주혁 분)이 노예출신이지만 최고 지위까지 오를 수 있음을 내비치면서 한 말이다. 그러나 실제는 당시 반란을 일으킨 노비 만적이 동료들을 선동하면서 한 말로 봉건적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폭탄 선언이었다. 고려 무신정권(1170~1270) 100년은 하극상(下剋上)의 시대였다. 아래 사람이 윗사람을 수시로 뒤엎었다.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왕을 죽이고, 25세 청년장수 경대승은 73세 상장군 정중부를 살해하고, 최충헌도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했다. 같은 시기 천민ㆍ노비들도 들고 일어났다. 망이ㆍ망소이의 난, 진주 노비들의 난, 최충헌의 노비 만적의 난 등. 하극상의 연속이었다. 당시 하극상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를 뒤흔드는 변혁의 역동성을 제공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최씨 집권자 등 무인들은 타락했다. 몽고 침략군의 말발굽 아래 백성을 내팽개치고 강화도로 도망쳐 바닷길로 온갖 물자를 공급받으면서 사치를 누렸다. 문신 귀족들 토지를 빼앗아 새로운 대토지
▲ 조한필/ 충청타임즈 부국장 이틀 후인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다. 30~40년 전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이 날을 큰 국경일로 알고 자랐다. 그래서 날짜를 기억한다. 당시 충청권 초등학교에서 5,6학년이 돼, 난생 처음 수학여행을 갈 때면 꼭 충남 아산의 현충사를 갔다. 그 후 성장하면서 4ㆍ28과 현충사의 주인공인 이순신 장군에 대해 더 알게 됐다. 알면 알 수록 존경스러웠다. 어려운 상황에서 일궈낸 승리와 그의 인간됨, 모든 게 놀라웠다. 20여 년 전 충무공 때문에 폄하됐다는 논리를 편 ‘원균은 억울하다’는 글을 봤을 때 어느 정도 수긍은 했으나 그렇다고 충무공에 대한 존경심은 흔들리진 않았다. 선조의 무모한 공격 명령을 따르지 않아 백의종군당한 자와 그 명령을 따라 전사한 자가 있을 뿐이었다. 이순신과 원균은 임진왜란 후 행주대첩의 권율과 함께 나란히 선무일등공신 3인에 올랐다. 충무공 탄신일엔 현충사에서 다례행사를 한다. 현충사를 성역화시켰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매년 참석했다. 18년 재임기간 14회 아산을 찾았다. 그후 노태우 태통령(4회)과 김영삼 대통령(3회)을 제외하곤 거의 오지 않았다. 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