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향교
정의향교는 안내문에 따르면 1408년에 홍로현(현재 서귀포시 서흥동)에 처음 세워졌다가 1420년 고성리로 옮겨졌다. 1423년 정의현이 이 곳 성읍리(진사리)로 옮겨 오면서 서문 밖에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849년에 지금의 장소에 다시 옮겨 세워졌고 1967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성전의 현판은 제주향교, 대정향교와 더불어 한석봉의 글씨체다. 전에 소개했던바와 같이 전국의 대부분의 대성전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체로 되어 있다.
'대성전에는 모두 5성(五聖) 22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데 공자를 주향으로 좌우에는 4성위(四聖位)[안자·증자·자사·맹자]가, 동·서벽에는 송조4현[宋朝四賢, 주돈이·정호·정이·주희]과 동국(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주돈이와 정이 양위(兩位)는 1982년에 봉안한 것이며, 대정향교와 마찬가지로 소설위(小設位)이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제를 봉행하고 있는데 주로 표선·성산·남원의 유림들이 참여하고 있다.' 출처-고영철의 역사교실
명륜당은 향교내의 교육시설로서 유학을 강연하고 인재 교육을 담당하는 일종의 공립교육기관이다. 반면에 서원은 일종의 사립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향교의 교육기능은 198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그 기능이 상실되었고,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급격히 쇠락하게 된다.
정의향교의 명륜당은 영조14년(1738) 재실과 함께 창건되었고, 순조 9년에 화원동으로 옮겨졌다가 1849년에 향교가 이곳에 자리하면서 같이 옮겨졌다.
'《제주의 문화재》에는 정의향교가 태종8년(1408) 홍로현에 건립되었던 것을 1416년 정의현청 소재지였던 성산읍 고성리에 옮겨 세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 지금도 서귀포시 서홍동 마을 중심 지역 남쪽에 ‘향교가름’이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출처- 고영철의 역사교실
■ 서문
서문 밖에서 바라본 해자터엔 잔디와 잡초가 무성하다. 해자가 있던 자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성의 원형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 제주읍의 해자는 해자길만 간간히 남아 있을 뿐 건물로 가득차 버렸다.
정의현성내 성읍민속마을에는 실제로 주민이 거주하는 가옥들이 많다. 전통가옥 구조와 관광객들의 방문에 의한 소음 등 여러 불편함이 많음에도 아직도 여기서 삶을 이어가시는 주민분들께 감사를 느낀다. 정원을 가꾸고 주거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빈집은 급격히 낡고 폐허가 되어간다. 반면에 제주목관아와 같이 관리는 잘 되고 있으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은 생기가 없다. 박제에 불과하다.
성읍민속마을에 주민들이 살고 있어서 옛 마을의 정취와 더불어 살아있는 민속마을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근민헌
근민헌은 정의현감이 사무를 보던 청사다.
원래 근민헌이 있던 자리에는 일관헌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근민헌이 있던 자리에 일관헌이 들어섰었고, 일관헌을 철거하고 다시 2014년에 근민헌으로 복원이 된것이다.
일관헌(日觀軒)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형과 다르게 개조되어 면사무소로 이용되다가 리사무소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에 골함석 지붕으로 개조되어 사용해 오던 건물을 토대로 1975년에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남동향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윗 사진)
2012년에 일관헌을 철거하고 근처 관아지의 유적 발굴과 고증을 거쳐 2014년에 동향의 건물인 지금의 근민헌을 복원하였다. 탐라순력도에도 아(衙)로 표기된 건물이 동향으로 위치한다. 추후 관아터 일대의 옛 관아 건물들을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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