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수산코스는 성산읍 노인복지회관에서 출발하여 고성 성안길과 성곽을 거쳐 옛 길을 따라 수산진성을 둘러보는 길로서 제주 옛 길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코스입니다.(약 9km)"
■고성리(古城里)(성산읍)
고성리(古城里)는 이름 그대로 옛 성이 있었다는데서 유래한다. 애월읍에 있는 고성리도 마찬가지인데 항파두리성이 위치하고 있어서이다. 마을 노인분들은 묵은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주시내의 무근성과 같은 이치이다.
고성리는 성산읍사무소가 위치한 제주동부의 중심지이다. 그만큼 관공서와 관광관련시설, 교육,산업시설등이 밀집되어있다. 법정리인 신양리도 행정리인 고성리에 속해있다.
■고성(옛 정의현성)
고성은 옛 정의현성 즉 고정의현성(古旌義縣城)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초 1416년(태종 16년)에 제주에 1목, 2현(제주목,정의현,대정현)을 둘 때 정의현청을 두면서 축조한 성이다. 고려말 때 삼별초가 방어를 위해 쌓은 성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본거지인 항파두리성도 토성인데 굳이 이 먼 곳에 석성을 쌓을 이유도 여력도 없었을 것이다.
축조된지 7년만에 (1423년,세종5년) 지금의 성읍(당시 진사리)에 정의현성을 옮기면서 폐성이 된 서글픈 사연을 갖고있다.
이유는 관청의 지리적 접근성 때문이라고 한다.
탐라순력도에는 구수산 고성(舊首山 古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표기의 오류라는 주장이 맞다고 본다. 예전의 수산진성이 아니고 정의현성 자리이기 때문이다.
"고성(옛 정의현성)은 잊혀진 성이 아니었다!"
필자도 제주사람이긴 하지만 고성리는 막연히 옛날에 성이 있어서 이름지어졌겠거니 생각했다. 제주원도심의 무근성처럼 구전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성은 존재했다.
사람들의 무관심속에 훼손되고 폄훼되는 속에서 600년의 세월을 버티고 있었다.
답사준비 중 혹시나 옛 정의현성(이하 고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1914년 고성리 일대 지적원도를 살펴보다 지적도상 필지의 경계가 원형으로 되어있는 곳을 찾게 되었다.(윗 그림-보기쉽게 파란선으로 덧칠함)
지적원도의 원형으로 이어진 경계를 이어보니 성곽자리가 맞는 듯 하였고 옛 길을 표기하니 성문으로 추측되는 위치가 나왔다.
이를 토대로 자료를 찾다보니 선행연구와 제주도에서 발주한 관련 용역보고서가 있었다.
(선행연구는 2004년 문화예술재단에서 수행한 '비지정문화재 조사보고서' 이고, 용역보고서는 2017년 '고 정의현성 복원 및 활용 방안 수립연구 용역'이다.) 이미 제주도와 관련단체에서 고성에 대한 실태조사와 활용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60년대만해도 고성 안팍으로 나무가 거의 없어 잔존 성곽과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이제 길을 떠나보자.
■묵은장터거리
예전에 장이 섰던 곳이다. 원지적도에 기록된대로 지금도 꽤 넓고 긴 광장이다. 제주에선 경작지 말고 저자거리에 이 만큼 큰 광장이 있던 곳은 관덕정 앞 밖에 없다. 필자가 다녀본 바로는 관덕정, 이아, 향교정문 앞 등지에서 이런 사다리꼴 형태의 광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광장들이 이런 사다리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을듯 하다.
이곳은 묵은 장터거리이지만 자료를 찾아보니 주변에 향사가 있었다고 한다. 광장이 사다리꼴 형태를 띄고 있어 의아했는데 여기도 역시 향사라는 공공시설이 있었던거다.
지금은 향사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성산읍 노인복지회관이 있어 혹시나 그 자리가 향사터가 아닐까 조심히 추측해 본다.
이 장터거리에선 제주 동쪽 지역의 온갖 산물이 거래됐을거다. 적어도 일제 때 일주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일주도로가 생기면서 그 주변으로 시장이 옮겨 갔고, 지역의 생활 중심지가 되면서 성안동네와 그 주변은 마치 구도심처럼 한적해졌음을 짐작케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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