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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훈의 시평세평] 살구꽃이 핀 곳이 '행화촌'

 

경사(慶事)가 났다.

 

아기손바닥만한 내 정원에 살구꽃이 피었다. 그것도 한두 송이가 아니라 무려 스물대여섯 송이나 말이다. 이로써 비로소 나에게도 봄이 완성됐다.

 

내게 살구꽃은 망향(望鄕)의 꽃이다.

 

내 고향은 시방 내가 사는 곳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듯 그리 멀지 않은 동네지만 그 품을 떠난 지 어언 30여년, 이제나 저제나 늘 꿈에서도 그립기만한 것은 매한가지다.

 

그래서 몸뚱어리는 회색빛 찬 도시에 박고 있을망정 고향을 못잊어, 고향을 그리며 주로 그녘 풀이며 나무를 돌보는 게 취미이자 중요한 일과(*차라리 의무라는 게 맞다!) 가 돼버린지 오래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바로 저놈 살구나무인데 이름부터 익숙하게 정겨운데다 인연도 남다르기 때문이다.

 

20년도 더 전 어느 여름날, 하릴없이 동네를 어정거리다 아파트 옆 아스팔트 길가에 싹이 튼지 달포나 됐을까, 반뼘이 될듯말듯한 살구나무가 자라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여느 눈엔 아예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테고, 설사 보였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그냥 지나쳤겠지만 눈밝은 촌놈에겐 정말 어쩔 수없을 정도로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흙이라곤 쥐눈꼽만큼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린 탓에 한여름 땡볕으로 달궈진 아스팔트의 열기로 축 늘어진 모습이라니...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보고있노라니 이 세상 넓디 넓은 땅을 놔두고 하필 그곳에 태어난 운명의 기구함,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 남고야말겠다는 듯 몸부림치는 생명의 처연(悽然)함에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누군가 먹고 버린 씨앗에서 비롯된 생명인지 모르지만 내가 거두리라!'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이 먼저 뿌리 밑을 후비니 단박에 뽑혀졌고, 그 길로 집으로 달려와 화분에 옮겨 심었다. 그리고 강산이 두번 바뀌고 나서야 처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몇년간은 고작 한두 송이씩, 그것도 해걸이를 하며 피었다.

 

그런데 올핸 무려 스무나믄 송이나 피었으니 경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럴싸 그러한지 해마다 이맘때면 고향동네에 흐드러지던 살구꽃 향기마저 제법 느껴질 정도다.

 

살구꽃이 '망향의 꽃'인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한민족이면 누구한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짐작컨대 그건 아마도 동요 '고향의 봄'때문이 아닐까싶다. 굳이 장르로 치자면 어린이가 부르는 동요라고는 하지만 가사와 곡조가 워낙 우리네 정서를 잘 그려낸 까닭에 고향하면 절로 읊조려지는 게 바로 이 노래다. 어린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어른이 되고나서도 한두 번 이 노래를 안 불러본 사람이 없을 정도다. 해외교포·군대위문공연 때마다 아리랑과 함께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노래가 바로 '고향의 봄'이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그런데 이 노래의 방점은 아무래도 살구꽃에 찍힐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가사에 복숭이꽃, 아기진달래와 함께 살구꽃이 등장하지만 진달래가 산에 피어 먼 느낌을 주고, 복숭아꽃이 뭔가 요염(妖艶)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 비해 살구꽃은 뒤뜰이나 마당가 등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화려하되 튀지 않아 더 살가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향=고향의 봄=살구꽃'의 등식이 성립되고, 결국 고향을 등진 이들한텐 살구꽃이 고향을 상징하는 '망향의 꽃'이 되고 마는 거다.

 

살구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로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보다 훨씬 전으로 알려졌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고승 명랑(明朗)의 시에 있는 '산에 있는 복숭아나무와 개울가 살구나무에 꽃이 피어 울타리를 물들이고 있구나(山桃溪杏映籬斜)'란 귀절로 미루어 당시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살구나무와 매화나무가 친형제나 마찬가지로 비슷해 잘 구분을 못하는 '쑥맥'이 많지만, 매화가 이른 봄에 피어 그 고결함으로 '있는 것들'의 사랑을 받았다면 살구나무는 매화가 진 뒤 꽃피고 열매를 맺어 '없는 것들' , 즉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해온 나무다.

 

살구꽃은 고향 말고도 '행화춘우(杏花春雨)'와 같이 연칭(連稱)될 정도로 예부터 '봄비', '강남(江南)'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특히 꽃이 피는 시기가 청명(淸明)·한식(寒食)과 맞물려 나들이하기에 딱이라 이때쯤 되면 너도나도 행락(行樂)에 나섰고, 글깨나 한다는 선비들은 살구꽃이 만발한 동네(杏花村)의 술집을 찾아 풍류를 즐기곤 했다.

 

지금도 술집을 '행화촌'이라고 부르는 연유(緣由)인데, 이는 당(唐)의 시인 두목(杜牧ᆞ803~852)이 지은 '청명(淸明)'이란 시로부터 비롯됐다고 했다.

 

'청명이라 부슬부슬 비가 내리니(淸明時節雨紛紛)/길가는 나그네 맘을 어지럽히네(路上行人欲斷魂)/ 묻노니 술집이 어디 있느뇨(借問酒家何處有)/ 목동이 멀리 가리키는 곳 행화촌이라네(牧童遙指杏花村)'

 

이같은 살구꽃의 서민적 이미지는 민요 '나무노래'의 첫머리가 살구나무로 시작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너하고 나하고 살구나무/ 바람 솔솔 소나무...'

 

하지만 살구꽃은 이와는 반대로 관문(官門)에 등용(登龍)하는 '급제화(及第花)'로도 불렸는데 당나라 때 과거에 붙은 진사(進士)들을 수도 장안(長安)의 명승지 곡강(曲江)가에 있는 살구꽃 정원(杏園)에 데리고 가 축하잔치를 베풀어준 데서 생겼다.

 

책거리 그림(冊架圖)에 삼경(三經)중 하나인 《상서(上書)》와 함께 살구꽃을 그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급제해 지금의 행정부격인 상서성(上書省)에서 일하라는 뜻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그려진 《평생도(平生圖)》의 한 부분인 '삼일유가(三日遊街)'의 한 장면(사진 아래)에도 선비가 과거에 급제한 뒤 시관들과 함께 거리를 노니는 배경에 살구꽃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전시(殿試)가 치러지는 게 매년 음력 2월로 얼추 살구꽃이 피는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살구나무는 사실 꽃말고도 열매며 목재며 뭐하나 버릴 게 없는 보물덩이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배고픔이 한창인 초여름에 노랗게 익어 먹음직스런 열매를 잔뜩 안겨주던 고마운 존재였다.

 

살구의 또다른 한자이름은 '첨매(甛梅ᆞ달콤한 매실)'로 특히 열매 때깔이 진하게 누렇고 둥글면서 실한 종(種)을 '금행(金杏)' 또는 '한제행(漢帝杏ᆞ한나라 황제의 살구)'라고 불렀다.

 

살구열매를 맛있게 먹고난 뒤 남는 씨앗 또한 행인(杏仁)이라고 귀중한 약으로 쓰였는데 오장의 잡물을 씻어내고, 육부의 풍기를 몰아낼 뿐만 아니라 눈을 밝게하는 등 실로 만병통치약이었다. 오죽하면 살구나무가 많은 고을엔 그 무시무시한 염병도 얼씬거리지 못한다는 믿음까지 있었겠는가?

 

살구가 풍년이면 보리도 풍년이란 속설도 따지고 보면 꽃피는 시기와 비오는 게 얼마나 겹치지 않느냐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살구의 뛰어난 '효력'덕분으로 믿고픈 유감주술(類感呪術)이 아니었을까?

 

살구나무는 목재로도 훌륭해 스님들의 필수품인 목탁(木鐸)을 만드는데 이보다 나은 게 없을 정도다.

 

맑고 매끄러운 흰 속살에 너무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재질때문으로 특히 살구나무 고목(古木)으로 만든 목탁이라야 제대로 된 소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 '개살구가 지레 터진다'등의 속담에 나오는 개살구는 살구나무와 닮았지만 다른 종이라고 한다.

 

토종임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작고 떫은 맛이 강한 탓에 지금의 '수입 살구나무'에 자리를 내준 채 '개'자를 뒤집어 쓰고 있으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전형(典型)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쨋거나 살구꽃도 피었으니 우리집이 바로 행화촌-, 어찌 한잔 안 할 수있으리오!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  [제이누리=이만훈 전 중앙일보 라이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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