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과 산을 다니노라면 제법 그윽한 향기에 정신이 번쩍합니다. 밭머리에 퉁그러지듯 버림받은 돌무지나 산비냥 서덜 끝자락에 멋대로 엉킨 채 소복하니 무리지어 핀 찔레꽃 때문이죠. 매화(梅花)가 아니더라도 암향(暗香)이 부동(浮動)하는 게 장난이 아닙니다. 사는 곳이 외진 탓에 사람이 그리워서인가, 향기로라도 부르려는 듯 합니다. 바람기라곤 전혀 없음에도 지나는 이마다 고개를 돌리게 해 붙잡는 품이 눈물겹습니다. 찔레꽃은 곱지만 화려하진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예나 지금이나 '화초'로는 축에도 끼지 못하는 신세죠. 찔레에서 나온 장미가 '꽃의 여왕'으로 대접받는 걸 생각하면 짠할 정도입니다. 장미가 신라 때부터 등장해 시가(詩歌) 등 예술적 탐미(貪美)의 대상이었던 데 비해 찔레는 거의 찾아볼 수없으니까요. 그나마 시에 등장할 때도 세시풍속에 따른 농사의 지표로 쓰일 뿐이었습니다. '해마다 밭머리에 흰 눈이 날린 듯하고(每年塍塹雪粉粉)/짙고도 맑은 향기 여기저기서 풍겨오네(馥郁淸香遠近聞)/절로 피고 짐을 뉘라서 다시 즐기랴(自落自開誰復賞)/농삿꾼에게 땅 갈고 김매는 철 알게 할 뿐(田家只用候耕耘)' 조선 현종 때 문인으로 연행록(燕行錄)의 선구자
참 좋은 때입니다. 바람이 살랑만 대도 신록(新綠)의 맑은 향기가 한껏 느껴져옵니다. 언제부턴가 미세먼지 타령이 일상처럼 돼버렸지만 연록(軟綠)의 싱그러움 앞에는 별 것 아닌듯 싶습니다. 고사(高士)는 문향(聞香)하는 법-. 이즈음의 푸르름은 쥐어짜면 싯퍼런 물이 뚝뚝 들을 듯한 한여름의 그것과는 달라 땡볕에 쬐면 금세라도 바랠 것같은 연하디 연한 어린 자연의 살내음을 듣습니다. 수필가 이양하(李敭河ᆞ1904~63)선생께서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며 '그 중에서 봄과 여름이 혜택이 많고 그 가운데서도 봄, 봄 가운데에서도 만산(萬山)에 녹음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라고 예찬(禮讚)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다른 한 켠으론 섭섭함도 없지 않으니 벌써 입하(立夏)를 지나 어느덧 본격적인 여름으로 달려가는 계절의 속절없음을 어찌하리오? 봄바람에 취하는가 싶기 무섭게 주명(朱明)이라니... 시·거문고·술을 좋아해 '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라 불리는 고려 때 문호이자 풍류객 이규보(李奎報ᆞ1168~1241ᆞ白雲居士)선생도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봄한테 어디로 가느냐고
한국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맨처음 배우는 말이 '엄마'라고 합니다. 갓난애가 가장 쉽게 낼 수있는 모음이 'ㅏ'이고 자음은 'ㅁ'인데 이를 한꺼번에 내는 '아마'가 그 원형(原型)이라네요.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옹알이에서 비롯된 이 말이 여러 과정을 거쳐 유아어(幼兒語)론 '엄마', 성인어(成人語)론 '어머니'가 된 것이지요. 어머니란 이렇게 우리를 있게 한 생명의 원천으로, 존재의 근원이자 영원한 보호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자식으로서 나이가 적건 많건,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늘 "어머니"를 찾고 부르며 의지하는 것이죠. 그 분이 살아계시거나 돌아가셨거나 관계없이 말입니다. '어ᆞ머ᆞ니'란 세 마디만큼 편한 말이 없으려니와 동시에 그보다 더 가슴 '쎄한' 말도 없는 것도 이 때문이죠. 세상 모든 어머니들 치고 훌륭하지 않은 어머니가 있으리요마는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시대 한국의 어머니들은 차라리 위대하다못해 성스럽기조차 합니다. 그 분들은 한마디로 '드럽게 어려운 시절'을 오직 가족만을 알고, 자식만을 위해 살아온 '그림자같은 인생'들이셨으니까요. 빼앗긴 나라에 태어나 광복을 찾았나 싶기 무섭게 전쟁이 터지고
온 나라가 연일 시끌벅적한 게 정신이 하나도 없다. 대통령이 탄핵으로 파면돼 급작스레 후임을 뽑는 선거판이 벌어진 판에 북쪽 '석동(石童ᆞ돌아이)'은 미사일 장난을 계속하고, 이에 경쟁이라도 하듯 바다 건너 큰 석동 역시 느닷없이 돈타령으로 겁박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정이 이런 데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들은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서로 네 탓에 핏대를 올리느라 여념이 없으니 도대체 이게 나라인지, 나라라면 누구의 나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시절은 곡우(穀雨)가 지나 본격적인 농사철인데 전국이 유세밭으로 변해버린 마당에 농심(農心)마저 흩어놓고 있지나 않은 지 저으기 걱정된다. 하긴 대통령을 뽑는 일도 나라살림을 농사로 치면 농삿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도 큰 일이니 이해는 한다. 앞으로 5년 동안 먹고 살 농사의 씨앗을 고르고 뿌리는 일이니까. 국회의원 선거가 밭농사라면 모름지기 대선은 우리의 주식(主食)인 쌀을 마련하는 논농사라 할 수 있다. 논농사건 밭농사건 가장 먼저 하는 일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 좋은 종자(種子)를 고르는 것인 만큼 나라 농사에도 지도자를 뽑는 일이야말로 같은 맥락에서 엄청난 대사임에 틀림없다. 종자가 '후지면' 아
경사(慶事)가 났다. 아기손바닥만한 내 정원에 살구꽃이 피었다. 그것도 한두 송이가 아니라 무려 스물대여섯 송이나 말이다. 이로써 비로소 나에게도 봄이 완성됐다. 내게 살구꽃은 망향(望鄕)의 꽃이다. 내 고향은 시방 내가 사는 곳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듯 그리 멀지 않은 동네지만 그 품을 떠난 지 어언 30여년, 이제나 저제나 늘 꿈에서도 그립기만한 것은 매한가지다. 그래서 몸뚱어리는 회색빛 찬 도시에 박고 있을망정 고향을 못잊어, 고향을 그리며 주로 그녘 풀이며 나무를 돌보는 게 취미이자 중요한 일과(*차라리 의무라는 게 맞다!) 가 돼버린지 오래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바로 저놈 살구나무인데 이름부터 익숙하게 정겨운데다 인연도 남다르기 때문이다. 20년도 더 전 어느 여름날, 하릴없이 동네를 어정거리다 아파트 옆 아스팔트 길가에 싹이 튼지 달포나 됐을까, 반뼘이 될듯말듯한 살구나무가 자라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여느 눈엔 아예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테고, 설사 보였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그냥 지나쳤겠지만 눈밝은 촌놈에겐 정말 어쩔 수없을 정도로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흙이라곤 쥐눈꼽만큼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린 탓에 한여름 땡볕으로 달궈진
오늘 아침 무심히 달력을 보다 깜짝 놀랐다. 삼월삼짇날이 지난 지 어느덧 엿새째라는 사실 때문이다. 삼짇날하면 제비인데, 제비는커녕 텅 빈 하늘엔 비 머금은 희뿌연 먼지만 가득한 '슬픈 봄'이 거기 있었다. 지난 한 달 가까이 봄맞이 타령으로 들뜬 채 그렇게 맞은 봄이 사실은 반쪽짜리라는 슬픈 현실과 그것을 자각(自覺)조차 하지 못한 미욱함이 한없는 부끄럼으로 가슴을 때린다. 봄은 본디 빛으로 오고, 소리로 오는 법이다. 새로이 움트는 잎의 푸르름과 울긋불긋 피어나는 꽃들의 잔치는 봄의 화사한 얼굴이요, 겨우내 깊게 가라앉혔던 목청을 틔운 새들의 지저귐은 봄의 생동(生動)하는 리듬이다. 봄빛은 정태적(靜態的)이지만 연한 듯 강하게 마음을 물들이고, 봄의 소리는 기운을 솟구치게 해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게 한다. 굳이 한 편을 들라면 후자가 동적(動的)이라 더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듯하지만 실제론 함께라야 온전하고 그것이 바로 자연스러운 봄맞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봄이 그저 화선지에 물감 번지듯 다가와 소리 없이 휑한데도 그것이 당연한 일인 양 돼버린 게 이 땅의 현실이니 참담할 따름이다. 활기찬 비상(飛上), 상쾌한 지저귐으로 봄을 몰고 오는 제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