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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8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유욱(劉昱)은 유송(劉宋) 후폐제(後廢帝, 463-477년)로 중국 남북조 시대 유송의 제8대 황제(재위 472-477년)다. 자는 덕융(德融)이며 소자(小字)는 혜진(慧震)으로 명제의 맏아들이다. 폐위당하여 시호가 없는 대신 후폐제(後廢帝)로 불린다. 창오왕(蒼梧王)으로 강등당해 창오왕으로도 불린다. 포악한 황제여서 그를 폐위하려고 몇 번이나 반란이 일어났다. 제4대 황제 효무제의 28명의 아들 중에 아버지 명제가 황족 16명을 죽였고 남아 있던 황족 12명은 그가 모조리 죽였다. 15살 때 내시에게 피살당했다.

 

‘부복관태(剖腹觀胎)’는 칼로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관찰하는 행위를 말한다. 현대인들도 이런 방식으로 임신부를 위해 태아를 검사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중국 고대에 기록돼 있는 잔인무도한 혹형(酷刑)이다.

 

 

 

 

남송(南宋) 시기의 황제 유욱은 상(商)나라 주(紂)와 같은 폭군의 대명사이다. 그는 포악하기 그지없었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잔혹 무비했다. 살인을 좋아하고 매일같이 거리로 나와 흉기를 가지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살인을 하지 않았던 날은 괴로워했었다고 한다. 한 신하가 간언을 하자 옆에 있는 다른 장수에게 명해 간언한 신하를 세로로 두 토막 내게 했다고 하고. 마늘만을 먹고 있는 장군의 배는 마늘 냄새가 나는지 호기심으로 그의 배를 잘랐다고도 한다. 혹형을 행하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재미로 삼아 백성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했다.

 

그의 수행인들은 칼, 창, 집게, 끌, 톱 등을 지니고 다니면서 유욱의 명령에 따라 늘 살인을 집행할 준비가 돼 있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사람들의 배를 가르거나 심장을 도려내거나 혀를 자르는 등 혹형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햇빛이 찬란한 어느 하루, 유욱이 밖으로 유람을 나갔다. 어가가 교외에 다다랐을 때 마침 길을 가고 있던 임신부가 황제의 어가를 보고 급히 한쪽으로 비켜서려 했으나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은 몸이라 동작이 굼떠 유욱의 눈에 띄었다. 수레 위에 앉아 있던 유욱은 임신부를 수레 옆으로 불렀다. 임신부는 놀라 온몸을 떨며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유욱이 묘하게 웃으며 “왜? 애를 뱄다고 길을 막아도 된다는 말이지? 여봐라! 저 여자의 배를 갈라라. 어떤 요괴가 들어있어서 이렇게 대담한지 한 번 보자!”라고 명령했다. 시위들이 달려들어 임신부를 땅에 묶었다. 임신부는 번쩍이는 칼이 휙 허공을 가르자 피가 뿜어 나오는 것을 보며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고는 혼절해 버렸다. 유욱은 탐욕스럽게 피 냄새를 맡으며 득의양양하게 “짐은 저 년이 괴이하다는 것을 알아챘지. 결국 요괴를 품고 있었구먼.”이라고 했다. 그럼 태아는 어찌 됐을까? 의사 서문백(徐文伯)이 바늘로 임신부의 배를 봉합하여 무사히 출산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유욱은 죄책감이 없고, 잔혹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어느 날 소도성(萧道成)이란 장수가 진영에서 웃통을 벗고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배불뚝이인 모습을 보고 배에다 붓으로 과녁을 그린 뒤 활로 쏘려 했다. 그때 옆에 있는 신하가 재미있는 것을 한 번만 하고 그만둘 것이냐며 화살촉 없는 화살로 쏘게 했다. 그 화살이 배에 맞자 소도성이 깨어나서 살려달라고 하니 재미없다며 웃고 떠나갔다. 결국 소도성은 477년 어느 날 밤에 신하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한 측근이 황제는 잠잘 때마다 베게 옆에 애지중지하는 단검을 놓고 잔다고 말해주자 소도성은 그 단검을 이용해 목을 찔러 죽였다.

 

 

 

 

유욱이 잔인함과 함께 후세에 이름을 떨친 인물이 진(晉)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의 황후 가남풍(賈南風)이다. 가황후는 추녀였다. 마음도 음험하고 악독했으며 질투의 화신이었다. 사마충이 궁의 다른 빈비(嬪妃)들과 동침을 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더욱이 황제의 사랑을 받아 용종(龍種)을 품는 것을 참지 못했다.

 

어느 날 배 안에 용종이 들었다는 것을 안 후궁이 가황후의 미움을 살 것이 두려워 명주 끈으로 배를 감싸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후궁이 회임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가황후는 질풍같이 후궁의 방으로 쳐들어가 회임했느냐고 추궁했다. 후궁은 감히 예라고도 아니라고도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러자 가황후가 냉랭하게 웃으면서 “그래. 네가 용종을 품고 있지 않다면 분명 다른 놈과 사통한 것일 터. 뱃속에는 악종이 꿈틀 대고 있을 게고. 여봐라. 이 음탕한 년의 배를 갈라라!”라고 소리를 쳤다. 근위병들이 칼을 빼들고 후궁을 향해 번쩍 빛을 발했다. 예리한 칼날이 후궁의 배를 갈랐다. 태아가 핏물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렇게 후궁과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 태아가 함께 하늘나라로 갔다. 가황후는 섬뜩하게 웃으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유욱과 가황후의 이러한 야만적이며 잔인무도한 행동은 중국 역사에 치욕적인 한 장을 채우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만행을 그저 개인의 괴이한 성격에 의한 병적인 행위로만 취급해도 될까? 동양, 특히 중국에서 이천 년을 이어온 제국(帝國)의 폐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절대권력, 재력과 무력이 한 인물, 한 계층에 집중되면서 벌어진 잔학한 인간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이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동양은 전제군주주의 국가 형태를 변함없이 유지했으니…….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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