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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0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백거이(白居易 : 772-846),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다. 산서(山西) 태원(太原)이 본적이고 낙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 사람이다.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다.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5세 때부터 시 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되자 뛰어난 시재를 보였다. 29세(800)에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했으며 그 무렵 『장한가(長恨歌)』를 지었다.

 

36세(807)에 한림학사가 됐고 이듬해에 좌습유(左拾遺)가 됐다.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사회의 결함을 비판하는 일군의 작품을 썼다. 『신악부(新樂府) 50수』(805)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됐고 불교에 관심을 뒀다.

 

 

 

 

충주자사(忠州刺史), 항주자사(杭州刺史}, 소주자사(蘇州刺史)를 역임하고 827년에 중앙에서 비서감(秘書監)이 됐다. 58세(829) 이후 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직책에 자족하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나날을 보냈다. 원진 등 옛 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831)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용문(龍門)의 여러 절을 찾아다녔다. 향산사(香山寺)를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운다. 문학에 대한 충동도 번뇌로 보여 참회하는 마음에서 ‘광언기어(狂言綺語)’ 문집인 『유백창화집(劉白唱和集)』, 『백씨문집(白氏文集)』을 사찰에 봉납했다.

 

중국 시가 발전사에 있어 당나라 때가 가장 흥성한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당시(唐詩)’, ‘송사(宋詞)’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백, 두보, 백거이는 당나라 때의 3대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백거이는 시의 풍격이 독특하다. 문사가 평이하여 쉽게 전달되며 통속적이다. 낭송하면 낭랑하고 또랑또랑하여 모든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 민간 거리마다 그의 시가 낭송됐고 광범위하게 전파됐다. 당시 백거이는 가장 대중화됐던 시인이었다. 그의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율절(律絶)의 격조를 벗어나 시를 가지고 장편의 이야기를 서술식으로 읊었다. 이는 당시 사회 작시 풍조를 벗어난 혁신이었다. 세상에 알려진 『장한가』, 『비파행』등이 그것이다. 후대에 그 시풍을 모방해 창작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른바 ‘원화체(元和體)’가 그것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중국 고대의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백거이의 시는 대부분 사람들이 잘 알고 있고 대중적인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일치된 설이 없다. ‘한인(漢人)’일까 아니면 ‘호인(胡人)’일까? 의견이 분분하다. 백거이의 가계에 대해 고증하고 연구한 사람들이 많으나 자신의 주장을 원만히 설명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백거이는 한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거이집』46권 「고공현령백부군사장(故鞏縣令白府君事狀)」과 「당고률수령태원백부군(계강)묘지명(唐故溧水令太原白府君(季康)墓誌銘)」에서 백거이 가족의 배경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사장」에는 백 씨는 중원 성씨로 그 조상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이라고 했다. 초나라가 멸망하자 초나라 태자 건(建)이 정(鄭)나라에 몸을 의탁했다. 그 건의 아들 자승(子承)은 오(吳)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그 호가 백공(白公)으로 바로 백 씨의 원류라는 것이다. 나중에 초나라 군주가 백공을 주살하자 그의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진(秦)나라에 의탁했는데 그가 바로 상시 일대의 명장 백을병(白乙丙)이다. 백을병의 적손이 백기(白起)이다. 백기는 진나라에 지대한 공을 세워 무안군(武安君)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나중에 역모에 연루돼 두우(杜郵)에서 사사 당했다. 진시황(秦始皇) 때에 이르러 백기의 공로가 대단히 크다는 것을 인정받아 그의 둘째 아들을 태원(太原)에 봉했다. 이런 연고로 백 씨의 자손이 태원 사람이 됐다.

 

백 씨 가문은 대대로 관직을 하였다. 관리의 집안이라 할 수 있다. 무안군 백기에서 시작하여 27대 백거이의 고조 백건(白建)이 북제(北齊)의 병상서(兵尙書)라는 관직에 올랐고 사공(司空)을 증해졌다. 증조부 백사통(白士通)은 당나라 이주(利州) 도독(都督)을 역임했다. 조부 백지선(白志善)의 관직은 조산대부(朝散大夫), 부친 백온(白溫)은 조청대부(朝淸大夫)에 올랐다. 백온의 8번째 아들이 백당(白鏜)인데 자는 상종(上鐘)으로 하남(河南) 남공현령(南鞏縣令)을 역임했다. 백상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자 백계경(白季庚)은 양주별가(襄州別駕)를, 둘째 백계반(白季般)은 서주(徐州) 패현령(沛縣令)을, 셋째 백계진(白季軫)은 허주(許州) 허창현령(許昌縣令)을, 넷째 백계령(白季寧)은 하남(河南) 부참군(府參軍)을 각각 지냈고, 막내 백계호(白季乎)는 향공(鄕貢) 진사(進仕)다. 백거이는 바로 양주별가 백계경의 아들이다.

 

백거이가 친히 쓴 원고나 현재 낙양 백서재(白書齋)에 보존돼 있는 『백씨보계서』 초고에는 백거이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형의 세 아들 중 경수(景受)를 양자로 들였다. 이때부터 낙양의 백 씨 일족은 백경수의 후대이고 백거이는 그 일족의 시조가 됐다. 현재까지 50여 대를 이어왔다. 이게 사실이라면 백거이는 ‘한인’이라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다. 그래서 『고금중외명인색인』에 백거이를 한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바로 태원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백거이가 ‘호인’ 즉 오랑캐의 후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거이의 직계 신속의 족보를 근거로 판단하는 것이다. 당나라 말기 재상 백민중(白敏中)은 백거이의 종제(從弟, 사촌 아우)다. 백민중에 대한 기록은 송(宋)초 손광헌(孫光獻)이 저술한 『북몽쇄언(北夢瑣言)』5권 「중서번인사(中書蕃人事)」에 보인다. 당나라 대중(大中)에서 함통(咸通) 연간에 중서령이었던 백민중은 재상이 됐다. 그 이후 재상은 필성(畢誠), 조확(曹確), 나소권(羅邵權)이 순차로 역임한다. 후에 재상이 된 최신유(崔愼猷)는 “백민중 이래로 여러 재상이 모두 호인(胡人)이 차지했었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필’, ‘조’, ‘나’와 ‘백’ 씨 모두 호인, 즉 오랑캐의 성씨라는 말이 된다. 백거이의 종제 백민중이 호인이면 백거이도 호인이 돼야 한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백거이가 그의 종질(從姪, 사촌 형제의 아들)인 승려 백적연(白寂然)을 위해 써준 『기옥주산선원(記沃州山禪院)』(『백거이집』에 수록) 중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백거이는 그 문장에서 최초 천축인 나한승 백도유(白道猷)가 옥주산선원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대화(大和) 2년 봄에 행각승 백적연이 옥주에 놀러 왔다. 대화 6년 여름에 백적연이 편지와 함께 문도 승려를 종숙(從叔) 백거이에게 파견해 옥주산선원을 위해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서신에는 일찍이 백도유가 옥주산선원에 정주했는데 백적연 자신이 선원을 관리하게 됐으니 좋은 글을 써달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렇다면 옥주산과 백 씨는 여러 대에 걸친 인연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백거이의 문장을 보면 중요한 문제를 스스럼없이 밝히고 있다. 백도유는 천축(서역) 사람이고 백거이는 그의 본가라고 자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거이도 당연히 ‘호인’이 돼야 한다. 이 문장은 백거이가 백적연의 부탁을 받고 써준 교제 성격의 문자다. 당연히 「사장」이나 「백씨보계서」 초고와 비교할 때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백거이 스스로 서로 모순된 사실을 기록해 후세에게 의혹을 남겼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어떤 사람은 백거이가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고 심지어는 탑장(塔葬) 형식으로 자신을 용문(龍門)에 매장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으니 천축 승려와 같은 가문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자신의 가족과 불교의 인연이 깊다는 것을 남기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송초 손광헌의 『북몽쇄언』에서 백 씨는 호인의 성씨라는 기록에 대해서는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백거이가 호인이라는 기록은 정사에도 보인다. 고학힐(顧學頡)은 『후한서․반고전』과 『신당서』231권 『서역열전』을 근거로 「백거이세계․가계고」(1982)을 발표하면서 백거이의 조상은 한족이 아니고 서역 귀자국(龜玆國, kucīna)의 왕족이라고 명시했다. 서돌궐(西突厥)에 예속됐는데 서돌궐 통치 하의 10부락 중 하나였던 수니스(鼠尼施, 바인부루커[Bayinbuluke, 巴音布鲁克] 초원에 있던 옛 부족)였다. 귀자국 경내에 백산(白山)이 있어 그 후손들이 ‘백’이라는 성씨를 가지게 됐다고 했다. 이는 한 왕조에서 하사한 성씨로 당나라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고학힐은 백거이도 분명 자신이 한족이 아니라 서역인의 후손임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았다.

 

당나라는 문화나 문명에 있어 최고로 번영을 누린 왕조였다. 사상에 있어서나 종교에 있어서나 차별을 두지 않았다. 민족에 대해서도 그리 따지지 않았다. 동서와 남북이 종횡으로 만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조상이 흉노든 돌궐이든 서역 인이든 한족이든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우리네의 분별심 때문에 위대한 시인 백거이를 한족이냐 아니냐를 따지게 된 것은 아닐까? 백거이가 한인이면 어떻고 호인이면 어떠랴. 민족주의가 발호하여 동양사회를 획분 하는 지금,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분별심일 따름일 터. 부처가 천축인이면 뭐가 다르랴? 부처는 부처일 따름인데. 

 

 

 

 

 

 

 

 

 

 

 

 

 

 

 

  

 

「부득고원초송별(賦得高原草送別)」은 「초(草)」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백거이는 15세 때에 명성이 자자한 고황(顧況)을 찾아갔다. 고황은 어린 소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의 이름 ‘거이(居易)’를 빗대어 “장안의 쌀값이 비싸니 살아가기 어려울 것(長安米貴,居住不易)”이라며 비꼬았다. 백거이가 이 시를 보여주자 “이런 재주가 있다면 살아가기가 쉬울 것(有才如此,居亦容易)”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離離原上草(리리원상초), 언덕 위에 우거진 풀들,
一歲一枯榮(일세일고영). 해마다 한 번 시들었다 무성해지는 구나.
野火燒不盡(야화소불진), 들불이 일어도 다 타지 않고,
春風吹又生(춘풍취우생).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나나니.
遠芳侵古道(원방침고도), 방초는 멀리 뻗어 옛길을 덮고,
晴翠接荒城(청취접황성). 맑은 푸른빛은 황폐한 성까지 닿을지니.
又送王孫去(우송왕손거), 또 그대를 떠나보내니
萋萋滿別情(처처만별정). 이별의 정 가득하구나.

 

‘萋萋(처처)’는 풀이 우거져 무성한 모양을 나타낸다. 이별은 하지만 맑은 푸른빛이 황폐한 성까지 닿아 있는 것처럼, 내 마음도 무성한 풀이 이어진 것처럼 너와 연이어져 있을 것이라는 말은 아닐까? 슬픔이 아니라, 만남을 기약하는 말은 아닐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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