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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수의 원도심 만들기(2) ... 이야기 속의 탱자성 전투

본지 강민수 논설위원이 그동안 연재해온 ‘강민수의 영어진단’을 당분간 쉰다. 새로운 연재에 천착하기 위해서다. 20여회 예정으로 원도심 활성화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해법을 모색한다. 애독을 권한다./ 편집자 주

충청남도 홍성에 전해오는 이야기야. 마침내 최영 장군이 탐라국을 정벌하게 됐어. 당시 탐라국의 왕은 중국여자로 키가 팔 척이요, 힘이 장사인데다 탱자성을 갖고 있어서 누구도 그 곳에 쳐들어가기가 곤란했대. 최영 장군이 도착해보니 과연 듣던 바와 같이 탱자나무 숲이 성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뚫고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가 없더래.

 

어떻게 해야 이 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고심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내일부터 억새풀의 씨를 따다가 연에 매달아서 탱자성에 뿌리도록 하여라. 그리하면 내년에는 그 곳에 억새풀이 무성할 것이니 가을에 억새풀이 말라 불이 붙기 쉽게 될 때에 불을 지르고 성을 공격하라.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몸에 구리판을 두르고 쳐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명심하도록 하라”라고 말하고는 최영 장군이 말할 새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대.

 

최영 장군은 산신령이 일러준 대로 했고, 이듬해 가을에 탱자나무 숲을 모두 불태운 뒤 군사들과 함께 공략에 나섰어. 최영 장군은 탐라국의 여왕과 맞붙었는데 무시무시한 괴력을 갖춘 여자라서 아무리 능한 무술도 통하지 않더라는 거지. 여왕은 최영 장군을 단숨에 꺾어버리려고 덤벼들었는데 목까지 두껍게 둘둘 말아 추켜세운 구리갑옷 덕분에 꺾이지 않았어. 마침내 여왕이 지쳐서 나가떨어지자 최영 장군은 단숨에 여왕의 목을 베고 탐라국을 정복해 고려의 땅으로 복속시켰다는 거야.

 

* * *

 

그런데 이 이야기가 부산 영도로 내려가면 탐라국 여왕이 최영 장군을 사모하다 혼령이 되었다고 해. 영도는 제주에서 건너간 말을 명마로 키워내던 곳이고 해녀촌이 있을 만큼 제주와 밀접한 섬이야. 영도 봉래산 기슭에 아씨당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 탐라여왕이 좌정하게 된다는 이야기야.

 

홍성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최영 장군은 대대적인 정벌에 나섰지만 수백 년 동안 여왕이 탱자나무를 심어 만든 견고한 성을 쉽게 무너뜨리지 못했어. 이때 최영 장군은 지략을 썼어. 갈대를 재배한 뒤 불을 붙여 큰 화재를 일으킨 것이지. 성이 소멸하자 탐라국 여왕은 무릎을 꿇었어.

 

그런데 여왕은 전쟁에 졌을 뿐만 아니라 사랑 앞에도 무릎을 꿇었어. 비록 적이었지만 최영 장군의 용맹한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져버렸던 거야. 그녀는 신돈의 음해에 빠져 유배를 간 장군을 찾아 천신만고 끝에 영도까지 찾아갔지. 하지만 영도로 귀양살이를 갔다는 것은 풍문이었어. 그녀는 최영 장군을 만나지 못하고 적막한 땅에서 홀로 지내다가 죽어서 혼령이 됐어. 사무친 한을 풀지 못한 그녀는 영도 목마장의 말을 죽이기 시작했어. 멀쩡하던 말이 영도를 떠날 때면 나자빠져 죽는 거야.

 

조선 때 정발 장군이 부산 첨사로 왔을 때 탐라국 여왕은 꿈에 나타나 해법을 줬어. "나의 사당을 지어서 모시면 군마가 무병할 것이며, 나를 모신 백성은 소원 성취할 것이다."  조정에서 그 꿈 이야기를 듣고 아씨당을 지어준 뒤부터 군마가 죽는 일이 없어졌다는 거야. 제당을 지어 그녀를 신으로 모시자 이루지 못한 사랑의 원한이 봄눈 녹듯이 풀렸다는 거지.

 

* * *

 

전혀 다른 두 지역에서 전래되는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역사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인식에 대해 알 수 있다.

 

우선 육지부의 민간 사람들은 탐라를 독립된 왕국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고려와 탐라의 싸움을 ‘목호의 난’ 정도로 단순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1374년의 이 전쟁에 전함 314척에 전국을 통틀어 차출한 정예군 2만5605명이 출정했다는 것은 국가 간의 전쟁에서나 있을 수 있는 전면전이었다.

 

이 두 이야기에는 여왕이 탐라를 다스리고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과연 누구일까? 원나라가 망할 시기에 여왕이라고 불릴 만하고 ‘중국’ 여자로서 탐라와의 친연성이 있는 인물은 고려 출신 기황후 밖에 없다. 명나라에 의해 원나라의 수도가 함락되자 기황후도 응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가 1368년. 그 후 그녀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만약 이 무렵에 기왕후가 탐라로 건너와서 친히 여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면 입도 5-6년 후 최영과 결전을 벌였다는 이야기다.

 

 

육지 사람들은 이처럼 탐라의 도성을 공략하기 매우 힘든 탱자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는 역사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역사에는 탐라정벌이 1개월 정도 걸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야기 속에서는 1년이나 걸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비변사등록 1749년 기사에 보면 강화유수 원경하가 영조에게 강화도에 탱자나무를 심게 해달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고려의 최영이 탐라국을 격파하지 못한 것은 그 가려진 지책(枳柵) 때문이었다”고 아뢴다. 지책은 탱자나무 목책이다.

 

홍윤애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제주목사 조정철은 1812년 선조에게 “본도(本島)의 성지(城池)에 해자(垓子)를 파고 탱자나무로 둘러쌌으므로 고려 때부터 탱자성(枳城)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감수(監守)하는 일을 혁파(革罷)하여 성곽이 붕괴되고 탱자나무를 구경할 수도 없이 되었습니다”라고 보고한다.

 

이 보고에 대해 영의정이 왕에게 설명하기를, “탐라(耽羅)의 내성(內城)과 바깥 지성(枳城)은 예로부터 없었던 성의 체제이나 천험(天險)의 요지로 만들었습니다. 근래에는 성이 모두 무너지고 탱자나무 역시 베어져 기성의 체제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곧 전후 수령들의 죄입니다”라고 한다. 이에 조정철은 성곽을 개축하고 성 둘레에 12개의 감귤농장을 만든다.

 

여기서 성 밖의 내성과 지성은 탐라에만 있던 성의 양식이라 밝히고 있다. 성곽이라 함은 내성(內城), 즉 우리가 보통 성이라고 부르는 곳과 외성(外城) 또는 외곽(外廓)의 합성어인데, 탐라성의 경우 외성을 곧 지성(탱자성)이라 일컫고 있는 것이다.

 

탐라성은 해자-탱자-석축으로 된 삼중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해자(垓子)라 함은 성벽 밖을 돌아가며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 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성곽시설의 하나다. 탐라성은 높은 성벽을 만들고 그 바깥에다는 탱자나무를 촘촘히 심어 가시 울타리를 만들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해자를 팠다. 제주 땅은 해자를 파도 물을 채우면 다 빠져 버리므로 해자 안에도 탱자를 심었을 것이다. 탐라성에는 병문천과 산지천 같은 자연해자를 중시했으나 조선에 와서는 동쪽으로 성을 확장하면서 인공해자를 강화했다.

 

1512년 제주목사 김석철은 "제주성 주위에 긴 참호를 아주 깊게 파서 성문보다 낮게 하여 모두 널판으로 다리를 놓아 밤에는 들어 올리고 낮에는 깔아놓아 걱정 없이 방비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탐라의 탱자성을 사이에 두고 최영과 기왕후가 격전을 벌인 게 역사의 기록에 없더라도 이야기 속에 개연성은 충분히 남아 있다. 드라마 ‘기황후’의 원저자 조정우는 “기황후의 묘가 경기도 연천에 있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원나라를 호령하던 그녀가 이곳에 안치되었다는 점이 무언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이것이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

 

혹시 기왕후가 사모했던 사람이 연천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최영의 고향이 바로 그 이웃 철원이었기 때문이다. (최영의 출생지는 강원 철원, 경기 고양, 충남 홍성 간에 의견이 갈린다. 기황후의 출생지도 경기 고양과 경기 연천으로 갈린다. 현재 포천, 연천, 철원은 통합이 추진될 정도로 이웃 간이다.)

 

기황후와 최영은 동시대인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일 수도 있다. 기왕후의 생몰연대는 불분명하지만 1301-1315년경에 나서 1369년경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기황후는 죽기 전 고국에서 장례를 치르기를 원한다 하여 시신은 고려로 운구 되어 경기도 연천군에 묻혔다고 한다. 한편 최영은 1316년에 나서 1388년에 죽었다. 이 두 사람이 탐라 탱자성에서 만났다면 기왕후가 1315년생이라 칠 때 50대 후반이었다. 그 나이에 기왕후가 최영을 그토록 사모했다면 불같은 정열의 소유자가 틀림없다.

 

어쨌든 이야기 속의 탱자성 전투에서 죽은 줄 알았던 탐라여왕은 영도에 나타나 살다 갔다. 최영과는 짝사랑에 끝나고 말았는지, 아니면 최영이 그녀의 시신을 거두어 자기 고향 근처에 묻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제주성은 전 세계에서 흔치 않은 탱자성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원도심 350미터 구간에 조성되고 있는 소위 ‘명품거리’는 탱자 숲이던 해자 터를 지나고 있다. 제주 원도심을 ‘제주 탱자성’이라 칭하고 원도심의 나무, 꽃, 열매를 탱자로 정하여 위리안치(圍籬安置) 등의 스토리를 발굴하고 상품으로 구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기 위해서는 해자 발굴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관계 당국은 어떻게 하든 덮어버리고 가겠다는 생각뿐인 것 같아서 아쉽다.

 

☞강민수는?
=어느 대기업 회장실과 특급호텔 홍보실장을 거쳐 어느 영어교재 전문출판사의 초대 편집장과 총괄임원으로 3백여 권의 교재를 만들어 1억불 수출탑을 받는데 기여했다. 어린이를 위한 영어 스토리 Rainbow Readers 42편을 썼고, 제주도와 중앙일보가 공동 주관한 제주문화 콘텐츠 전국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대안 중심의 환경운동가로 제주 최초의 마을 만들기 사례인 예래생태마을의 입안자이며 펭귄수영대회 등의 이벤트 개발자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의 한 고등학교 초빙으로 영어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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