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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수의 원도심 살리기(3) 운주유악(運籌帷幄) ... 좋은 인재 찾아 함께 가자

 

이순신 장군의 집무실이자 회의실이던 운주당(運籌堂)은 한산도에 복원되어 있다. 운주는 '사기(史記)' 의 운주유악(運籌帷幄)에서 나온 말로 군막 속에서 전략을 짠다는 뜻이다. 운주당을 지켜본 유성룡은 항상 열린 소통의 공간이었다고 썼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건물을 세웠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밤낮으로 장수들과 함께 전투를 연구했는데, 아무리 지위가 낮은 병사라고 하여도 군대에 관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모든 병사들이 군대에 관련된 일을 잘 알게 됐다. 또한 이순신이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장수들과 의논하여 계책을 결정했으므로 전투에서 패하는 적이 없었다."

 

이순신이 관직을 박탈당하자 원균이 이 운주당을 꿰어차 앉았다. 같은 장소라도 누가 운용하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유성룡이 회고한다.

 

"원균은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이중 울타리로 운주당의 안팎을 막아버렸다.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먹고서 날마다 술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을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자기들끼리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일에 왜놈들을 만나면 이 상황에서 .우리는 달아날 수밖에 없다라 했다. 여러 장수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또한 원균이 두려워서 군사 일을 제대로 아뢰지 않게 되어 고로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

 

제주에도 운주당이 있었다. 제주읍성 안팎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었다. 제주에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1568년(선조1년) 봄 동성에 세웠으니,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년) 이순신이 한산도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 세운 운주당보다 무려 24년 전이었다. 제주의 군사들은 목사가 겸했던 총사령관의 깃발과 북소리로 명령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 후 몇번의 중창 중수가 있었고, 화재로 소실된 운주당을 1892년(고종 29년) 여름에 다시 건립하였다고 한다.

 

근대에 비교적 새 건물로 거듭난 이 운주당을 사용한 사람은 구한말의 정치거물이던 김윤식(1835-1922)이 5년의 유배중 적거지로 썼다. 외무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그는 을미사변 뒤 1897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1901년 5월 이재수의 난을 지켜 본 후 전라남도의 어느 섬으로 이배되었다. 이 격동기의 기록을 '속음청사'라는 일기로 남겼다.

 

그 후 30년 넘게 이 건물이 어떻게 쓰였는지 알 길이 없다가 이일선 (1895-1950)이 백양사 포교당으로 썼다고 한다. 1930년대에 농촌계몽 운동을 하다 성철, 서암, 서옹 같은 고승을 배출해낸 만암의 지시로 1937년 제주에 내려와 불교정화 운동을 펼쳤다. 1947년 남북분단을 반대하는 단체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제주 사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쟁 중인 1950년 예비검속으로 잡혀 산지포구에 수장 당했다.

 

이일선 이후에는 운주당이 해체되거나 타버린 것 같다. 의사 출신 고수선(1898-1989)이 교육과 보육기관을 새로 지어 썼다. '최초'란 수식어를 달고 살다 간 여걸 고수선은 3.1운동 참가를 시작으로 항일운동, 정치활동, 각종 사회사업을 벌였는데, 운주당터에서는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강습소, 제주모자원, 제주국악원, 인당무용학원, 인당민속무용예술단, 홍익보육원을 운영했다. 고수선은 제1회 만덕봉사상을 받았고, 사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지금은 옛 운주당 일대가 쓰레기로 뒤범벅이 된 채 버려져 있다. 이곳이 조선시대 제주방어를 책임지던 곳인지 여러 선각자의 활동 근거지였는지 알 수 있는 푯말도 세워져 있지 않다. 수많은 이야기와 사연이 있었을 것이나 격동의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군막 속의 전략은 이순신의 정신에서만 빛이 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진정한 소통이 나를 비우고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제주의 운주당에서도 상당한 소통이 시도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소통을 빙자한 고관대작들의 술판으로 유지됐을 가능성도 높은데, 운주유악의 유래를 보면 그 소통이 어떠해야 하는지 자명하다.

 

연전연패에 도망만 다니던 촌놈 건달 유방이 항우를 넘어뜨리고 마침내 천하를 손에 거머쥔 후 주연을 베풀며 자기가 이긴 이유를 묻자 졸개들로부터 이런 답이 돌아온다.

 

"폐하께서는 성을 공격하고 항복시킨 자에게 그것을 주어 천하의 사람들과 이익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항우는 현명한 자를 질투하고 유능한 자를 미워합니다. 공이 있는 자에게 해를 주고 어진 이를 의심했습니다. 항우는 땅을 점령해도 이익을 나눠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폐하께서 천하를 얻고 항우가 천하를 잃은 이유인 줄 아옵니다."

 

그러자 유방이 대꾸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구나. 본진의 군막 가운데에서 작전을 세워(運籌帷幄) 천리 밖의 전투에서 승리를 얻게 하는 데에는 자방(子房; 장량)만 못하고, 국가를 진정시키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군량을 공급하고 양도가 끊기지 않도록 하는 데엔 소하(蕭河)만 못하며, 100만 군사를 이끌어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것은 한신(韓信)만 못하다. 이 세 인물은 모두가 걸출하다. 이 세 인물을 잘 쓸 수가 있었으니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게 된 이유일 것이다. 항우는 단 하나의 걸출한 인물인 범증(范增)이 있었으나 이 한 사람도 잘 부리지 못했다. 그것이 항우가 나에게 패한 이유인 것!"

 

유방, 이순신, 고수선의 정신이 2015년 한국과 제주의 화두가 되었으면 좋겠다. 움직일 운(運), 셈놓을 주(籌), 휘장 유(帷), 장막 악(幄) 하여 이들이 보여준 운주유악의 뜻은 저 혼자 잘난 척 말고 좋은 인재 찾고 길러 같이 가잔 말 아니겠나?
 

 

☞강민수는?
=어느 대기업 회장실과 특급호텔 홍보실장을 거쳐 어느 영어교재 전문출판사의 초대 편집장과 총괄임원으로 3백여 권의 교재를 만들어 1억불 수출탑을 받는데 기여했다. 어린이를 위한 영어 스토리 Rainbow Readers 42편을 썼고, 제주도와 중앙일보가 공동 주관한 제주문화 콘텐츠 전국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대안 중심의 환경운동가로 제주 최초의 마을 만들기 사례인 예래생태마을의 입안자이며 펭귄수영대회 등의 이벤트 개발자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의 한 고등학교 초빙으로 영어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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