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36년간 제주도내에 설립된 법인회사 수는 52개 이다. 1920년대에는 8개 회사에 불과하였으나 1930년대에는 18개 회사, 1940년대 23개 회사로 회사설립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법인회사 설립주체의 국적별로 한국인 30개 회사, 일본인 18개 회사, 한일합자 4개 회사이며 그 중에 34개 법인회사는 제주도민이 직접 설립하거나 경영에 참여했던 회사들이다. 이를 회사형태별로 보면 주식회사 43개, 합자회사 4개, 합명회사 4개, 유한회사 1개로 주식회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30년 초 7개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는데 이 중 일본인 회사는 3개 사, 한국인 회사는 4개 사가 설립되었다. 한국인이 기업경영에 참가한 제주미유조합(1919년)은 자본금이 1만5천3백원으로 다른 법인기업에 비해 자본금액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매출액은 6만원으로 제주전기주식회사(3만원), 제주주조주식회사(3만원)에 비해 2배 정도 많다. 1930년 말에 이르러 제주지역에 13개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중 일본인 회사는 1개 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3개의 한일합자회사가 존재하였고 나머지 9개의 회사는 오로지 제주자본에 의해
강할머니 가족이 연적골에 살기 시작한 것은 강할머니의 증조할아버지의 자식 중 막내인 강할머니 친할아버지가 애월 장전에서 연적골로 이주하면서 부터이다. 강할머니가 태여 날 당시 그의 부모는 화전마을인 서귀포시 동홍동 연적골에서 거주하였으나 어머니가 친정인 서귀포시 서홍동 굴천동에서 그를 출산했다. 출생 이후 1942년(14세)까지 연적골에 거주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동홍동으로 내려왔다. 이후 연적골에는 상시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다. 연적골에 사람이 가장 많았을 때는 18가구 정도 살았다. 주로 보리, 조(맛시리), 피, 메밀, 감자, 토란 등을 경작했으며 무우, 배추, 참깨 등은 다른 마을보다 수확량이 많았다. 살던 집은 초가 삼칸집으로 큰방(안쪽에 고팡), 마루(마루에 봉석), 작은방(작은방 안쪽에 부엌)으로 이루어 졌다. 방을 만들려면 우선 돌(평판석)로 밑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다음, 감을 으깨어 바르고 그 위에 초석이나 부드러운 풀을 깔았다. 벽은 돌로 벽을 쌓고(한단 쌓고 흙으로 덮고 다시 한단 올리는 식으로) 부드러운 흙으로 마무리하였다. 주로 마당에서 수확물들을 작업했기 때문에 마당은 200~300평 정도로 넓은 편이었다. 작은방 옆쪽에
일본인들의 한반도 연안 출어(出漁)는 1883년에 7월 25일에 조인된 ‘조선국(朝鮮國)에 있어서의 일본인민무역규칙(日本人民貿易規則)’ 제42조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밀어(密漁)가 행해졌으며 특히 제주도 주변에는 일본 잠수기업자(潛水器業者)들이 일찍부터 침범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제주지역에 출어하면서 제주도민과 충돌하게 되었고 급기야 일본 정부는 1884년 9월부터 1891년 11월까지 제주도에 출어 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 금어(禁漁)기간 중에도 밀어는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제주 근해의 어장은 급속히 황폐해 졌다. 이 때 일본인 잠수기업자가 채취한 것은 주로 전복과 해삼이다. 「한국수산지」 3권(1910)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복은 연해안에 생산되지 않은 곳이 없고 거의 무진장이라고 할 만큼 풍부하였으나 일찍 일본 잠수기업자의 도래로 남획이 된 결과 지금은 크게 감소하였다. 예전에 토착잠수부들이 이를 채취해왔으나 지금에는 종일 조업을 하여도 1~2개를 얻는 데 불과하다. 잠수기업자는 약간 깊은 곳에서 조업하기 때문에 다소의 어획이 가능하지만 예전
일본 계시계근정(堺市戒筋町) 안화뎡 방적공장(岸和町紡績工場)에 잇는 조선 제주도(濟州島) 출생 여자직공 륙십명은 이십륙일 아츰부터 갑자기 그 공장에 출근치 아니하고 긔숙사에서 울고 잇슴으로 공장칙에서는 그 까닭을 몰라 무슨 일로 공장에 출근치 아니하느냐고 물엇다는 바 이에 대하야 그들은『우리 고향인 제주도가 갑작히 바다 가운데 함몰되엿슴으로 이와 가치 울고 잇다』고 대답을 하엿다는데 이 엉터리 업는 풍설은 최근 그 회사를 그만두고 자긔 고향으로 도라간 제주도 출신 박유인(朴有仁)이가 지어낸듯하다 하야 소관 안회뎐서에서는 범인을 수색중이라더라(동아일보, 1926년 1월 29일). 제주도민의 본격적 도일(渡日)이 시작된 것은 1919년 한신(阪神)공업지대로의 모집에 응하며 시작되었다. 1922년에 대판 직항로의 개설로 본격화되어 1924년부터 도항자가 매년 전년 대비 3배 증가했다. 1922년 남자 3,198명, 여자 305명 총 3,503명이 도일하였고 1925년 1596명, 1927년 19,204명, 1933년 29,208명, 급기야 1939년에는 5만명으로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 즉, 1가구에 1명꼴로 도일했다. 제주도민들의 도일은 보다 나은 경제생활에
오현학원(五賢學園)을 설립한 우공(牛公) 황순하(黃舜河)의 본관은 상주(尙州), 호는 우공(牛公)이다. 1896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나 1978년 별세했다. 그는 제주상선주식회사(1922), 제주주조주식회사(1928), 제주도산소주판매주식회사(1935), 제주도해조주식회사(1938) 등에서 취체역(取締役)을 역임하였다. 지금의 대표이사다. 이후 1939년 제주도어업조합 감사, 1942년 조선해면기업(주) 취체역, 동년 제주도물산(주) 취체역, 1943년 영화 연극 및 부대사업을 취급하는 조일구락부(주)를 설립하여 감사역을 역임하였다. 그는 여러 사업을 경영하는 한편 전라남도평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다. 황순하는 1925년 제주면에 대성통조림공장을 설립하여 공장대표로서 제주도 제조업 발전에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공장은 자본금 4,000원으로 시작하여 전복, 소라 등을 제조하였다. 연간 노동력은 6명으로 연간 470상자를 생산하여 판매한 매출액은 5,520원으로 제주도에서는 소규모의 공장이었다. 이후 제주도에서 조직형태를 가진 회사들이 연이어 설립되면서 그는 근대기업가로 변신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1922년
감태(甘苔)는 제주도 청정바다 일대 수심 5~10m 내외의 깊은 곳에 서식하는 다년생 해조류로 소라, 전복의 먹이다. 감태는 요오드, 칼슘, 비타민 B1, B2가 풍부하고, 인체에 해로운 산(酸)을 없애주고 니코틴을 해독, 중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또한 후코이단과 폴리페놀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항산화, 항암, 항염, 노화억제 및 고혈압 억제, 자외선 차단 및 미백효과가 있어 요즘 새롭게 각광 받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감태는 화약의 원료로 사용되는 중요한 군수물자였으며 간식인 양갱을 만드는 데도 필요한 해조류여서 감태 구입과 가공을 위해 많은 일본인들이 제주에 진출했다. 감태(甘苔)는 수심 2미터에서 10미터 사이의 암초에서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갈조류로 남해안과 제주도, 일본의 규슈북부와 혼슈 중부의 태평양 연안에 분포한다. 특히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역에서 잘 자라며 전복의 최고 먹이로 치는 해초이다. 감태는 전도 연안 어디에나 자라는데 동해안에 특히 많고, 그 생산량이 많은 것은 우도(牛島)이며 품질이 양호한 것은 가파도(加波島)이다. 본디 도민들은 이를 채취하지 않았지만 일본인들이 건너와서 사들이면서부터 이를 다소 캐게 되었고 그 뒤에 성산포(
1930년대 일본은 소화(昭和) 대공황으로 경제 전반이 송두리 째 휘청거리고 있었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 역시 ‘블랙 먼데이’를 시작으로 경제 대공황(大恐慌)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시기에 제주도의 어느 한 마을에서는 멸치 풍년으로 인해 호경기를 누리고 있다는 기사(記事)가 있다. 경제공황으로 방방곡곡에서 별별 참극이 연출되는 이때에 구좌면 월정리(舊左面 月汀里)에는 멸치(鰯)이 풍산(豐産)으로 외지로부터 약 삼만원의 돈이 드러와서 전무후무한 호경긔를 이루m다고 한다(동아일보, 1932년 11월 11일). 예전부터 멸치어업은 제주지역 수산업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19세기 이전 제주에서는 연안에 석제(石堤, 원담)을 쌓아 밀물 때 바닷물과 함께 들어왔다가 썰물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원담 안에 남아 있던 멸치를 당망(攩網)으로 건져 올리는 방식으로 멸치를 어획했다. 원담은 고기가 올라 올만한 곳에 높이 5~6척(尺), 너비 2~3척(尺), 직경(直徑) 1척(尺) 가량의 돌을 올려 쌓아 담으로 둘러싼 것이다. 원담 안에 멸치가 들었을 때 마을 남녀노소 모두 구
예로부터 제주지역은 지형적 특성상 논(水畓)이 농지면적의 1〜2%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밭에 물을 대어 논으로 만드는 개답(開畓)을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기록을 보면, 18세기 말 부터 수전(水田)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조선중기부터 계속하여 개답 공사가 행해졌음을 말해준다. 1900년 이후 제주지역에서 대표적인 개답사례는 화순 창고내 하류 지역, 중문 광베기와 대포 너베기 일대, 종달리와 하도리 경계의 갯벌, 토평 칼당원 지경, 광령 너븐들 지경 등이다. 예전부터 중문 마을 사람들은 중문천의 풍부한 물을 이용하여 논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여 왔다. 천제연의 양쪽 가에는 3개의 물골이 있다. 동쪽에는 웃골과 알골, 서쪽에는 섯골로 세 개의 물골 중에 섯골을 먼저 만들었는데 섯골은 지형이 험하고 군데군데 암반으로 되어 있는 곳이다. 원래 1893년 색달리 김천총씨가 착공하였으나 자본이 부족하여 추진 못하다가 대정군수를 지낸 송경연씨가 이를 인계받아 완성시켜 개여물케에 논을 만들었다. 그 당시는 단단한 암반위에 장작을 쌓아 불을 붙여 뜨겁게 달구거나, 독한 소주를 붓고 불을 붙여 암반이 뜨겁게 가열된 상태에서 찬물로 암반을 급
일본은 한반도 통치 기반 마련을 위해 토지조사사업과 민적법(民籍法)을 근거로 하여 민적조사(民籍調査)를 실시하였다. 민적조사는 호구의 정확한 파악을 위한 것으로 원래 직업조사와는 무관했지만, 1909년 8월 총독부 경무국장은 민적조사를 이용하여 ‘민적부(民籍簿)’에 호주(戶主)의 직업을 표기해 두는 훈령(訓令)을 내렸다. “민적조사(民籍調査)가 다 완료된 이후에는 경찰관서에 민적부를 갖추어 지방에서는 면장(面長)이 신분상의 이동(異動)에 관한 인민의 신고를 관리하여 매달 그것을 관할 경찰서에 보고토록 함으로써 그 추보정정(追補訂定)을 하고 5개년 마다 다시 민적부를 정리하기로 하였다” 민적부(民籍簿)는 민적법(民籍法)에 따라 작성된 문서로 인구의 조사와 파악, 신분의 공시, 직업형성 등을 기록한 문서이다. 1910년 9월 경무국은 민적사무에 관한 자료와 해설을 담은『민적사무개요(民籍事務槪要)』, 민적조사의 통계를 담은『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를 동시에 발간하였다.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근거한『직업통계표』는 보다 진전된 호구파악 성과를 담았으며 면별 통계까지 수록하였다.『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는 11종으로
▲ 강성익 지사와 1920년대 제주시 모습 합성 제주도에는 ‘산북에는 박종실, 산남에는 강성익’ 라는 말이 있다. 강성익은 박종실과 함께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특히 산남지역 토지자본을 기반으로 해 제주경제의 큰 역할을 해오던 인물이다. 박종실은 근검절약과 신용 등을 상도의(商道義)로 자수성가해 모은 상업자본을 바탕으로 도소매업에 주력했는데 비해, 강성익은 토지자본에 기초해 운수업 분야에 주력했다. 또한 박종실은 상인단체 외에 정계진출에 관심이 없었지만 강성익은 상인단체는 물론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초대 제주도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원래 자본의 여유가 업는 도민이라 어떠한 사업을 경영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유리만 한 것이라면 외지의 대자본가가 출현하야 자본의 힘으로 독점하야 버리게 되니 도민은 호상단결하야 대자본의 침입을 금하는 동시에 모든 이권을 민중화(民衆化)하지 아니하면 생산보다 소비가 늘 초과하는 도민의 경제생활이 대단비참(大端悲慘)하게 될 날이 잇슬 것입니다(강성익, 동아일보, 1931년 1월 28일). 강성익은 개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던 1882년 9월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제주지역에 어업의 산업혁명이라
개항 이후 제주지역과 외부를 연결했던 최초의 해상교통은 1894년 이종문(李鍾文)이 인천 굴력상회(堀力商會)와 교섭하여 연안기선(沿岸汽船)을 한 달에 한번 씩 제주에 부정기 취항하도록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취항은 하물동량이 부족하고 승선 인원도 소수여서 수지가 맞지 않아 개설 3년 만에 폐지되었다. 이후 1908년 부산기선회사에서 부산-제주 간 월 1회 제주노선을 운항하였으며, 목포에서 복전회조점(福田回漕店) 소유 소기선(小汽船)이 제주-목포 간을 월 6회 왕복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의 명령에 의거한 정기 항로가 개설되었는데 명령 항로인 목포-제주 간 항해(都丸, 3,387톤급)의 운항코스는 목포-추자-제주(산지항)-조천항-제주(산지항)-추자-목포였다. 1913년에는 총독부 이토 해사 과장이 제주도를 시찰하던 중 ‘도 일주 항로를 개설한다면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목포를 기점으로 한 2척, 부산을 거점으로 제주도를 일주하는 2척을 매월 8회 정기적으로 운항하도록 하였다. 이 운영을 맡은 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는 목포-제주 간 월 9회, 부산-제주 간 월 5회 운항하였고, 일본 대판을 기점
▲ 제충국(除蟲菊) ‘제충국’이라고 하면 얼른 떠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실물을 보면 십중팔구는 ‘아~ 이게 제충국이었구나’라며 옛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집에 가면 여름밤 모기를 쫒기 위해 마당에 피웠던 풀이 제충국이던 것 같다. 이 제충국이 사실은 일제가 군수목적을 가지고 제주 농촌에 대량 보급하였던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환금(還金)작물이다. 제충국은 아시는 바와 같이 국과(菊科)식물에 속하고 페루시아종과 다루마채종과의 이 종류가 있다... 제충국의 유효성분은 피레트론이라 칭하는 갈색의 산성유상(酸性油狀)물질로 곤충류에는 극히 유해한 것이다. 이것은 미소(微少)한 특유의 향기를 유(有)하고 비상히 분해하기 쉽고 주정(酒精)에 쿠로로호름, 휘발치(揮發治)에 잘 용해되는데 아루카리 우(又)는 산(酸)에는 불용해이다(1940. 02. 03. 동아일보). 제충국(除蟲菊)은 아미리가(亞米利加) 과수원 등에서 절호(絶好)한 구제제(驅除劑)로 환영되는 것인바 일본시장에서는 매년 수출이 백만근에 달한다. 이것은 조선에도 재배에 적당할 뿐 아니라 농가의 항구부업으로 가장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