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문천 하류에서의 멸치잡이. [사진=제주도] 제주에서는 멸치잡이를 ‘후린다’고 한다. 멸치 후리는 노래는 멸치 그물 후리는 작업을 하며 부르던 어업 노동요다. 멜 후림 소리라고도 한다. 요즘 제주에서 가장 핫 하다는 월정, 행원, 함덕, 곽지, 협재, 화순, 표선, 신양, 이호, 삼양 멸치잡이가 유명했다. 멜 그물질 소리는 먼 바다에서 그물로 멸치 떼를 에워 쌓은 후 모래 깔린 해안가로 마을사람들이 일제히 끌어당기는 작업할 때 여럿이 호흡 맞추며 부르는 노래다. 한사람이 선소리를 하면 그물 당기는 사람들이 동작을 맞추며 후렴구를 부른다. 멸치라고 다 같은 멸치가 아니다.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멸치는 정어리, 샛줄멸, 눈통멸 등이다. 고맙게도 멸치는 매년 무리 지어 제주도 동쪽으로 들어온다. 이때 고등어도 같이 들어온다. 여기서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북쪽 해안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남쪽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간다. 샛줄멸은 4, 5월에 눈통멸은 6, 7, 8월에 정어리는 8, 9, 10월경에 잡힌다. 제주에서는 보리 수확기에 잡히는 보리멜 즉, 샛줄멸이 가장 유명하다.
▲ '밭 밟는 소리' [사진=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밭 밟는 소리’는 보리나 조의 씨앗을 뿌린 후 그 씨가 바람에 날라 가지 않도록 땅을 밟는 작업을 할 때, 소나 말을 밭에 몰아 놓고 그 땅을 밟도록 채찍질하며 부르는 밭일 노래다. 제주지역 토양은 대부분 현무암질 풍화물과 화산회토로 이루어진 화산토다. 화산토는 형성 시기에 따라 고화산토와 이보다 2~3배 이상 척박한 화산회토로 구분한다. 화산회토는 일단 물을 머금으면 재(灰)처럼 큰 공극률로 인해 쉽게 투수되어 함수량이 낮아진다. 화산회토는 낮은 보수력을 가지므로 타 지역과 비교했을 때 훨씬 낮은 약 10% 정도의 낮은 함수량을 가진다. 남동부를 중심으로 제주도 면적의 83%를 차지하는 화산회토 지대는 산성(酸性)이며 잡초가 무성해 기장과 조 같은 서속류(黍粟類)를 주로 재배한다. 특히 입경(入境) 크기에서 미사식양통(微砂埴壤土)로 분류되는 화산회토로 ‘뜬 땅’은 투수성과 관련된 공극률이 70% 넘는다. 빗방울 충격이 있을 경우 표면 공극을 메워 많은 수량,
▲ 갓을 만들고 있는 모습. [사진=갓전시관] ‘빛과 바람이 통과하는 신기한 모자’, 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갓’을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某감독님은 오마이 갓이라 했다). 양태(凉太)는 갓의 둘레로 둥글고 넙적한 부분을 말한다. 죽사(竹絲)를 사용하여 만들며 갓의 종류와 시대에 따라 양태 크기가 다르다. ‘입첨’이라고도 한다. 양태노래는 대나무를 이용하여 갓 테두리인 양태를 결으며 부르던 노래다. 관망 수공예 작업하며 부르는 관망요(冠網謠)로 분류된다. “식구가 많아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눈이 빠지게 해봐도 살 길은 막막하고, 빨리 양태 결어서 우리 집 식구들과 술 먹는 서방 술값 줘야 할 텐데. 아이들아 저기 가만히 앉아 있어라 모자를 결어야 생활할 수 있단다. 어서 어서 결어야 우리 집 살 길이 생겨난다. 어느 때면 우리도 부자 되어 요놈이 모자 안 결어도 살아갈 수 있으려나. 언제면 이 모자 결어 우리 집 생활이 넉넉해질까” 일반적으로 가내수공업은 대부분 여성의 계절노동을 중심으로 생산되었으며 농업과 어업
▲ 고구마 썰어 말리기 [사진=제주도] 연유는 이렇다. 옛날 뒷날 궁핍했던 시절, 달리는 ‘족박’에 별 보이는 집에 겨우 겨우 보리쌀 한 됫박 얻어다가 고래에 박박 갈아 밥을 했다. 밥이 너무 적었다. 아버지 한 숟갈, 어머니 한 숟갈, 아들 한 숟갈, 며느리 한 숟갈 먹다보니 아버지가 화가 났다. 밥이 너무 적었던 탓이다. 요즘말로 ‘가폭’ 즉 가정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이 가폭은 권력 서열대로 동거하는 반려동물에게 까지 연달아 이어졌다. 결과는 참혹했지만 그 과정은 단순 명료했다. 먼저 화가 난 이 집안 가장 아방이 안주인인 어멍을 때렸다. 어느 정도로, 어떻게 때렸는지 모르지만 맞은 어머니는 화가 나 옆에 있는 장가 간 아들을 때렸다. 맞은 아들 역시 자기 각시인 며느리를 때렸다. 이때부터 더 큰 사단이 발생했다. 화가 난 며느리가 반려견을 때렸고 며느리에게 맞아 ‘용심(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심술궂은 마음)’난 개는 고양이를 때렸다. 고양이가 이를 참을 리 없다. 참지 못한 고양이가 쥐를 물었고, 궁지에 몰리면 호랑이에게도 대든
▲ 검질 매는 할머니. 잡초는 뽑고 또 뽑아도 금세 다시 생겨난다. 다 뽑고 나서 뿌듯한 마음으로 뒤 돌아 보면 이내 파릇파릇한 잡초 새싹들이 와글와글 고개를 내민다. 오죽했으면 ‘다 매영 돌아사 보민 또시 북삭헌 검질’이라며 한탄했을까. 이는 한번이라도 잡초를 뽑아 본 사람이면 다 뼈저리게 경험했던 사실로 농학적 근거가 있다. 잡초 씨는 햇빛을 받으면 발아가 시작되는 ‘광발아성(光發芽性)’ 성질이 있다. 때문에 사람들이 잡초를 뽑아내면 아래에 있던 잡초 씨에 광(光)이 닿아 잠자던 잡초 씨의 발아가 유도된다. 제초작업 덕분으로 경쟁식물들이 사라져 다음 차례가 된 잡초 씨는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신호로 일제히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농사도 마찬가지다. 밭에 김을 매면 지표면 김이 없어져 땅속으로 햇빛이 잘 든다. 게다가 뿌리 끝까지 뽑아 흙을 뒤집어 놓으면 흙 속까지 햇빛이 들어간다. 그러면 그때까지 때를 기다려왔던 김 씨앗들이 이를 신호로 일제히 발아를 시작한다. 검질 매게 굴 너른 밧듸(밭에) 임을 돌앙 메여 가게 실픈 일랑 그만두게 요 농국(農穀)을 지여다근 늬영 나영 고찌 먹게
오래전 일이다. 제주바다에 살던 우럭조카가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 꿈이 하도 요상하여 이웃집 볼락삼춘에게 기억나는 내용을 상세히 얘기했다. 이를 다 듣고 난 볼락삼춘은 ‘조심해라. 특히 내일 사, 오시에는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라며 우럭조카에게 충고했다. 어차피 그리될 운명이었나. ‘어따 무신 일 싯수강’이라며 설렁 설렁 대답하고, 다음날 시간 맞춰 마실 나간 우럭조카의 시야에 들어온 죽음의 유혹은 ‘혼들혼들’ 새우였다. 볼락삼춘의 신신당부를 까맣게 잊은 우럭조카는 ‘에따’ 새우를 먹었고 그 순간 ‘그만’ 이었다. 제주민요 ‘생선노래’의 줄거리이다. 이어 말미에 맛이 좋은 옥돔, 맛이 좋은 미역, 잘 잡히는 생전복, 거름에 좋은 듬북, 비늘 없는 갈치 등 당시 제주바다를 주름잡았던 해산물들의 무용담을 우화(寓話)하였다. 볼락 삼촌 들어 봅서 우럭 조캐 무승것고? 간밤의 꿈을 보난 홍낚시에 걸려져 베곡 대구덕에 앚아 베곡 더운 불로 초아 베곡 단 불로 초아 베곡 용상도 타 베곡 굽은 절로 마타 벱디다 우럭삼춘 들어 보
“제주도에서는 주로 여자가 일하고 여자에 의해 민요가 불리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들이 언제 어떤 일을 할 때 노래를 부르느냐면 그것은 주로 집안의 일, 즉 멧돌, 절구를 찧는다던가 말총으로 망건(網巾), 탕건(宕巾) 등을 짜는 이른바 힘이 든다든가 그렇잖으면 심심해서 일할 때 하는 노래이다. 이 밖에 야외에 나가 농업을 한다든지 바다에서 전복을 딸 때도 물론 부르지만 농가(農歌)란 것은 육지부와 마찬가지로 별로 그 수가 많지 않고 해녀의 노래로 바다 속에서 작업하면서 부를 수도 없으므로, 있어도 난바다에 나갈 때까지 배를 저으면서 노래하는 정도의 것이다”(조윤제 趙潤濟, 1942.). 다리송당(松堂) 큰 아기덜은 되방이 짓기로 다 나간다 함덕(咸德)근방 큰 아기덜은 신짝부비기로 다 나간다 조천(朝天)근방 큰 아기덜은 망건(網巾)틀기로 다 나간다 신촌(新村)근방 큰 아기덜은 양태(凉太)틀기로 다 나간다 별도(別刀)근방 큰 아기덜은 탕건(宕巾)틀기로 다 나간다 도두(道頭)근방 큰 아기덜은 모자(帽子)틀기로 다 나간다 고내(高內), 애월(涯月) 큰 아기덜은 기름장사로 다 나간다 대정(大靜)근방 큰 아기덜은 자리짜기로 다 나
제주에 대한 외부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감칠맛 나는 제주민요들이 신문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1938년 6월 7일자 조선일보에는 “제주도야 말로 참으로 민요의 나라이다. 고랫노래라고 하여 방애 찧을 때에 부르는 노래도 있고 바다 위에 배를 띄워 놓고 저어가며 노에 맞춰 부르는 뱃노래도 있으며 들에서 김을 맬 때에 그 힘들고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 볼까 하여 이 고랑에서 멕이고 저 고랑에서 받는 엄부가(嚴父歌)도 있다.”라고 나와 있다. 민요는 민중의 생활을 노래한 단순 노래 차원을 넘어 민중들의 사상, 생활, 감정을 담고 있다. 또한 노동이나 생산 활동과 불가분 관계이며 생산적 노래이다. 제주민요에는 농사짓기 소리(農謠), 고기잡이 소리(漁謠), 일할 때 부르는 소리(勞動謠) 의식에서 부르는 소리(儀式謠), 부녀요(婦女謠)와 동요(童謠), 통속화된 잡요(雜謠) 등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이어도 호라 이어도 호라 이어 이어 이어도 호라 이어 홈민 나 눈물 난다 어어 말난 말아근 가라 이어도 하라 이어도 하라 이어 이어 이어도 호라 강남(江南)가건 해남을 보라 이어도가 반이라 혼다(이어도 노래) 이 섬의 노래 가운데서
제주사회의 ‘근대’ 학계의 일치된 견해는 아니지만 한국사회에서 근대는 1876년 개항으로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는 시기를 말한다(허수열, 1984). 이 견해를 따르자면, 제주사회의 근대는 개항 이후 1945년 해방까지를 포함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근대 제주의 시점은 이와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근대의 기점으로 삼고 있는 개항의 의미와 실제가 제주사회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사회의 실질적 개항은 1870년대 일본 잠수기업자들의 제주어장 침탈 때부터라고 보는 것이 맞다. 제주도민들은 중앙에서의 정치적 의미의 개항보다 일본 잠수기업자들의 ‘제주어장 침탈’이 개항을 피부로 느낀 실질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870년대 일본 잠수기업자들의 제주어장 침탈사건을 제주사회 ‘근대(近代)’의 기점(起點)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울러 1945년 해방을 현대의 기점으로 삼는 것 역시 제주사(濟州史) 서술에 적합하지 않다. ‘제주 4․3’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일본과 완벽히 단절되었던
1911년 6월 29일, ‘광주농공은행(光州農工銀行) 제주도지점(濟州島支店)’이 제주성내에 설치되었다. 제주지역 금융의 시초다. 이후 1918년, 제령(制令)에 의해 분리되어 있던 농공은행을 합병(合倂)하고 그 권리와 의무를 승계(承繼)하여 같은 해 10월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으로 새롭게 금융 업무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선식산은행 제주지점(濟州支店)이 광주농공은행 제주도지점으로부터 기존 일체의 영업 업무를 인수받고 제주지역의 일반금융 및 농업금융 업무를 개시하였다. ▲ 조선식산은행 제주지점 모슬포지소 건물, 대정읍 하모리, 고영철 사진 제주금융조합(濟州金融組合) 감사 급 평의원 중 김시진(金時晋) 문창숙(文昌淑) 강해진(姜海晋) 삼씨(三氏)의게 오월 중 전남 광주에서 개최된 전선금융조합연합회(全鮮金融組合聯合會)에서 포상금(褒賞金) 육십원 식(式)과 포상장(褒賞狀)을 수여(授與)하얏슴으로 본월 삼일 하오 일시에 제주금융조합(濟州金融組合)에서 동 수여식(授與式)을 개최(開催)하얏다더라(동아일보, 1922.07.13). 1912년 6월 29일에는 ‘제주금융조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설립된 지 20년이 됐다. 제주지역은 대기업이 드물고 제조업이 빈약한 반면 농수산업과 서비스업 비중이 절대적이라 모금과 기부 총량 측면에서 불리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매년 사랑의 온도탑 목표를 초과 달성할 뿐 아니라 아너 소사이어티 모집, 나눔 리더 모집 등에서 단연 전국 톱이다. 이러한 기부문화의 확산과 생활화는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역대 회장, 처장, 사무처 직원들이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닌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제주도민의 DNA 속에서 계승되고 있는 나눔문화의 실천적 발로라고 생각된다. 많이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없거나 부족해서, 물질적으로 항상 어려운 생활을 경험해 봤기에 나누고 같이 하는 나눔 문화와 정서가 자연 발생한 것으로 보아진다. 일제 강점기만을 놓고 본다면, 초창기에는 주로 기반 조성, 즉 학교나 공설운동장, 마을회관, 공동우물 등이나 대참사에 대해 큰 부자는 아니나(?) 자산을 선뜻 기부하는 미거(美擧)를 자주 볼 수 있다. 전영준(田永晙)씨의 미거(美擧) 제주도에는 오륙년 전부터 각종의 운동이 무던히 발달되엿스나 공설운동장(公設運動場)이
▲ 김만덕 국가 표준영정 제82호(2010년 7월21일 지정)/윤여환교수 제작 ‘만덕(萬德)’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얼까? ‘만덕할망’, ‘기녀(妓女)’, ‘거상(巨商)’, ‘구휼(救恤)’, ‘금강산 유람’, ‘의녀반수(醫女班首)’, ‘은광연세(恩光衍世)’, ‘채재공 만덕전(菜濟恭 萬德傳)’ 등과 더불어 ‘고두심’, ‘이미연’, ‘김만덕상’, ‘김만덕기념사업회’, ‘김만덕기념관’, ‘나눔쌀 만섬 쌓기’, ‘객주터’ 등. 개인적으로는 고(故) 김영란과 신사임당이 떠오른다. 2010년 작고한 김영란은 제주자치도 여성특보 시절, 2009년 발행될 오만원권 도안에 김만덕 초상을 올리고자 그 당시 한국은행 제주본부 고은호 본부장과 제주지역 여성단체 등과 같이 나름 엄청나게 노력했다. 현재 오만권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