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처음으로 이곳에 들렸을 때 나는 속울음을 삼켜야 했다. 4·3 광풍으로 할아버지와 중부를 잃은 나는 가족의 비극이 제주의 비극으로 옮아가는 전율을 맛보았다. 한 서린 마음으로 살아온 지난날이 있었기에, 한수풀역사순례길을 만벵디 4·3묘역까지 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교직원들은 만벵디가 어디에 있으며, 4·3묘역은 어떤 사람들이 묻혀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상황에서 순례길을 개장하였으니, 내겐 그 감회가 남다르다 할 것이다. 보슬비가 내리는 추모제 행사장에는 당시의 제주시장께서도 직접 참석하여 조사를 하였다. 제주시가 해야 할 일을 학교가 대신하고 있다며, 관계당국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 학교측에 감사함을 전하기도 했다. 벵디는 넓은 들을, 만(滿)은 가득하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북망산천 가는 곳으로 비유되곤 하는 만벵디는, 비가 내리면 물이 많이 고인다는 의미를 지닌 지역이다. 이곳 주변의 많은 무덤 중에서도 4·3사건과 관련한 특별한 무덤군이 바로 1950년에 발생한 예비검속 희생자 집단묘역이다. 다음은 만벵디 4·3묘역 표지석에 쓰여진 내용이다.
청풍명월의 고장인 이곳 역시 4·3의 광풍을 피할 수 없었다. 고림동이라 불리는 명월 상동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피해가 상대적으로 컸다 한다. 1948년 11월 소개령이 내려져 상동과 중동 주민들은 명월 하동·옹포리·강구리 등지로 피난을 떠나야 했고, 명월 상동과 중동에서 토벌대의 방화로 명월리에 있었던 향토 유산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다. 1949년 봄부터 상동 주민들은 마을에 성을 쌓았고, 성안에는 이웃 마을인 금악리와 상명리 주민들도 집단거주 했다. 현재 상동에 남아있는 안성은, 도로를 내기 위해 중간 성담이 없어져서 두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내성인 안성 근처에는 성담 쌓는 일을 지휘한 군경 사무실 터도 남아있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조천읍 선흘리 낙선동의 4·3성처럼 경찰이 높은 위치에 망루를 지어 마을 사람들을 감시하면서 성을 쌓도록 했다. 좁디좁은 함바집에서 수백 명이 몸을 비벼대며 살아야 했고, 통시인 화장실이 비좁아 생리작용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고 의문이 들 정도였다. 성안에는 보초막과 총 겨누는 총안, 파출소도 있었다고 전한다. 주민이 가장 많이 살았던 중동은 1950
▲ 명월대 옛터에서 과거의 온기를 느끼다. 1990년대 이 곳을 처음 방문한 나는 기분이 황홀할 정도였다. 계곡 따라 우거진 수백 년의 나이를 자랑하는 팽나무들이 나를 반겨 주었기 때문이다. 신록이 우거진 팽나무 군락지를 걷는다면 누구라도 힐링의 시간을 맛보게 될 것이다. 최근 나는 순례길 안내자로 10여 회 이곳을 찾고 있다. 이곳 사람들과 친숙할 정도로 걷고 또 걷고 있다. 방문한 사람들마다 아름답고 신비감마저 감도는 이곳이 제주에 있음에 뿌듯하다는 느낌을 스스럼없이 나타내 주었다. 1970년대 이곳 사람들은 제주민속촌 건설 제의를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표선면 성읍민속촌이 탄생된 배경이기도 하다. 이곳은 숲과 바위들이 계곡을 따라 수백 미터 우거진 팽나무와 더불어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만나는 또 다른 명물인 명월대와 명월교를 소개한다. 명월대(明月臺): 조선 말기의 석대(石帶)인 명월대는 선비와 한량들이 시회(詩會)와 주연을 베풀던 경승지로 알려져 있다. 1931년 축대와 비석을 정비한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돌로 쌓은 홍예교와 함께 3단으로 이뤄진 명월대는 기단에서부터 사각형, 육각형, 원형으로 현무암을 다듬어 축조한
▲ 옛 명월분교 입구에 설치된 백난아 기념비 한수풀의 발상지인 명월리는 금악•옹포•상명•동명까지를 포함한 넓은 마을이었다. 명월마을은 산세가 좋아 문인학자가 많이 배출된다는 청풍명월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진흥왕 때 탐라에 5도 15현, 고려 숙종 때인 1105년 탐라가 군으로, 1153년에 군이 현으로 격하되었으며, 1300년에 현촌이 설치되었다. 명월현의 출현은 1153년경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조인 1416년(태종 16년) 제주 3읍을 개편할 당시에는 본읍에 속한 귀덕현과 함께 명월현이 되고, 1437년(세종 19년)경에 명월방호소가 설치되었다. 1608년에는 현촌 제를 폐하고 방리가 설치되자 명월은 우면 소재지가 되고, 1877년에는 신우면, 구우면으로 분할되면서 구우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사무소는 풍헌시대에는 풍헌자택을, 면장제 시행으로 명월성내의 사환곡창 일부를 사용하였으며, 1928년 옹포리에 설치되었던 면사무소는 1936년 한림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명월리 주요유적들을 아래에 소개한다. 한림읍의 대표적 행사로 뜨고 있는 백난아 가요제에 갔었다. 근무하는 학교 학생도 참여하여 열창하는 장면
▲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를 기념하여 1961년에 세운 비석이다. 1997년 대정성 앞 현재의 위치에 새로운 삼의사비가 세워졌다. 1901년에 발생한 신축교난(이재수의 난) 시 대정현의 유지와 유림으로 구성된 상무사는 각종 세폐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회(民會)를 개최하고, 그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제주읍성을 시위 방문하고자 했다. 이에 오대현과 강우백이 중심이 된 민회는 대정을 출발하여 제주읍성을 향하다가 명월진성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이때 까지만 해도 민회세력은 비무장이었으며 평화적으로 세폐(歲幣) 시정을 하소연하고자 했다. 그런데 1901년 5월 프랑스 선교사의 지휘 아래 이곳에 온 천주교도 800여 명은, 민회소의 주민들에게 발포하고 장두 오대현 등 6명을 납치해갔다. 천주교도들에 의한 명월진성 습격으로 민회편에 더 많은 민중들이 결집하게 되고, 평화적 등소운동은 무력항쟁으로 변해 갔다. 이재수가 항쟁의 장두로 나서게 된 것도 이곳 명월성의 기습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항쟁의 주도권이 토호에서 민중으로 이동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장두가 된 이재수의 비타협적 투쟁노선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신축민란인 이재수의 난은, 명월
▲ 명월진성 절해고도 제주섬에는 조선시대 286명의 목사가 부임했다. 제주는 군사상 요충지이기에 주로 무신이 파견되었으나 더러 문신이 파견되기도 했다. 이약동, 기건 목사 등 몇 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령들이 제주를 자신들의 출세도구로 삼았었다. 자신의 품계를 높이거나 치부를 위해 뇌물을 써가며 제주의 목사직을 탐하기도 했을 것이다. 반면 이경록(1543-1599) 목사는 성웅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두 사람 모두 서른 살을 넘긴 나이인 1576년(선조 9년)에 나란히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또한 그들은 함경도 국경지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이경록은 40대 중반인 1687년(선조 20년)에 종3품인 경흥부사가 되었다. 경흥은 함경도 두만강하류 지역으로 여진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종이 김종서를 시켜 설치한 6진 중 한곳이다. 그의 이전 직책이 종6품 현감인 것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경록은 이순신보다 1년가량 앞서 만호로 부임했다. 만호란 요충지의 방비를 전담하는 무장으로 종4품 무관직이었다. 이순신은 부친상을 당해 3년간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이경록보다 진급이 다소 늦었던 것으로 보인다
▲ 명월진성 명월진성에는 성곽길이 없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역할분담을 맡은 교직원들이 한 말이다. 그럴리가. 내가 걸었던 그 길이 성곽길인데. 성곽길을 찾기 위해 그들과 동행하였다. 농로로 변한 성곽길은 마치 온갖 쓰레기가 널브러진 하치장 같았다. 그러니 찾지 못할 수 밖에. 농로로 변한 성곽길을 성곽길답게 가꾸는 일이 우리들의 몫이었다. 아니 학교의 몫이라기보다 문화재 관리를 맡은 기관의 당연한 몫이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발 벗고 나서지 않다보니 지금도 농로길로 방치되고 있다. 거만한 부자 3대 못 간다는 선인들의 음성이 들리듯 하다. 한림읍 동명리에 위치한 명월진성(제주도기념물 제29호)이 지어진 것은 비양도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왜선이 비양도 주변에 자주 정박하여 민가에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해 1510년(중종 5년) 목사 장림이 이곳에 목성을 쌓아 진을 구축하였다.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동문•서문•남문이 있고, 동•서•남쪽으로 1칸의 초루(譙樓)가 있으며, 성안에는 샘이 있어 사시사철 물 걱정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한림지역에서는 월계라는 말이 흔하게 쓰인다. 월계정사와 월계천 그리고 도로명 월계로, 특히 월계 진 좌수의 전설도 그중 하나다. 한림읍 명월리에 의술이 뛰어난 진 좌수(座首)란 사람이 살았다. 그의 이름은 국태(國泰)고, 호는 월계(月溪)다. 국태가 서당에서 글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 길가에 있던 숲이 사라진 자리에 큰 기와집들이 생겨나는 게 아닌가.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사랑방 문이 열려있는 집을 소년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향긋한 냄새가 풍겨오더니 예쁜 처녀가 소년에게 손짓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처녀는 다정히 소년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가며 ‘나하고 구슬놀이를 하자.’ 하고는, 예쁜 오색구슬을 입에 물어 굴리고 있었다. 소년은 구슬을 굴리는 처녀의 입술이 너무 예뻐서 정신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입안에서 굴리던 구술을 소년의 입에 넣어주었다. 소년은 예쁜 처녀와 노는 것이 즐거웠다. 혼자 어두운 길을 가는 데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옆에서 같이 가는 것 같았다. 그 후에도 소년은 서당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기와집 사랑방에서 처녀와 구술놀이를 하곤 했다. 소년은 글공부도
▲ 신증동국여지승람 월계정사는 문헌상에 나타난 제주 사학의 효시이다. 서원•서당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학의 하나인 정사는, 명망이 높은 선비나 관직에서 퇴임한 사람들이 향리나 풍광이 좋은 곳에 만든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고을 사람 중에서 학문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사장(師長)으로 삼고, 주변에 거주하는 자제들을 모아 교육시켰다. 1530년(중종 25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 학교조’에는 ‘월계정사가 예전의 명월현에 있고, 김녕정사는 예전의 김녕현에 있었다. 제주에서는 월계정사로 서재(西齋)를 삼고, 김녕정사로 동재(東齋)를 삼아 (제주)향교의 유생을 나누어 각각 사는 곳에서 가까운 정사에 나아가 글을 읽게 하였으며, 지방인사 중에 학식과 인망이 있는 자를 선택하여 학장(學長)으로 삼았다.’라고 쓰여있다. 1653년(효종 4년)에 편찬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면서, 월계정사가 명월성 서쪽, 김녕정사는 김녕포구 위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월계정사를 최초로 기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간행시기가 1530년이기 때문에, 월계정사는 조선 초기에 향교에 이어 설립된 교육기관으로 여겨진
▲ 명월진성 한림공고 재직 시 주민들로부터 ‘마대기빌레’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지명에 무언가 아련한 추억의 역사가 배어있을 것 같다고 여긴 필자는, 마대기빌레에 관하여 적지 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지역민들의 말과 필자의 역사적 추리력에 더하여 밝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주선인들은 수풀에서 말들이 노니는 목가적인 풍경인 고수목마를, 가장 아름다운 제주적인 풍경의 하나로 꼽았다. 1703년에 편찬한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41 화폭 중 ‘봉마공진, 산장구마, 우도점마’ 등에 9천여 필의 말이 등장할 정도다. ▲ 명월시사(明月試射) 또한, 이형상 목사는 한수풀과 관련하여 명월시사, 명월조점 등을 그리게 했다. 명월시사(明月試射)는 명월진성에서 활쏘기 시합장면을, 명월조점(明月操點)은 명월진성에서의 훈련모습과 말을 점검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 명월조점(明月操點)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 패한 직후인 1277년 원나라는 말 160필과 말 다루는 목호들을 탐라국에 들여와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 목마장을 세웠다. 태조 이성계의 팔준마(八駿馬) 중 하나인 응상백은 제주에서 실려 갔던 말이다. 국영목장인 10소장
오래전부터 제주에서는 ‘동비양(東飛陽), 서비양(西飛揚)’이란 말이 전해온다. 동비양은 동쪽 우도에 있는 비양도를, 서비양은 서쪽 한림읍의 비양도를 지칭한다. 하지만 한자로는 달리 쓴다. 우도의 동비양(東飛陽)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마치 날아갈 듯 서기가 어려 있다는 의미로, 한림읍의 서비양(西飛揚)은 날아와 오른 섬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필 제주선인들은 한림읍의 작은 섬 이름으로 날 비(飛)자와 오를 양(揚)자를 붙였을까? 이런 의심에서 출발한 필자는, 여태 전해지는 전설에 더하여 새로운 전설을 지어 지역사람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지역의 향수와 호기심을 자극하였던지 그들은 필자의 전설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었다. 섬들이 말하던 아주 오랜 옛날, 늘 신비로움이 묻어나고 오색구름이 뿜어져 나오는 한라산은 섬들이 가까이 있고픈 선망의 대상이었다. 중국의 추운 지방에 있던 섬 하나가 영주산이 있고 불로초가 있다는 이곳으로 날아오듯 바다를 미끄러지게 달려왔다. 그리고는 어느 곳에서 한라산을 올려보아야 좋은지를 알기 위해 해안을 휘둘러 보았다. 다른 섬이 먼저 차지하지나 않을까 염려한 섬은 지금의 비양도를 향해 다시 날아오르듯 달렸다.
▲ 최영 장군의 제주상륙을 적은 표지석 뒤로 비양도가 보인다. 천년의 섬 비양도가 외롭고도 아름답게 한림읍 옹포리 포구 앞바다에 떠 있다. 이곳 주변의 경치에 반하여 날아와 섬이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비양도(飛揚島)는, 1002년에 화산이 분출하여 형성된 섬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초 무인도이던 비양도에 상륙한 왜구들이 해안마을의 재산을 약탈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러한 왜구의 노략질이 명월진성을 설치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이기도 하다. 탐라순력도 화폭 중 하나인 비양방록(飛揚放鹿)은 사슴을 생포해 비양도로 옮겨 방사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2중 분화구인 비양도는 특이한 생태계를 간직한 제주의 보배 중 하나이다. 하지만 사슴은 없다. 그 과정을 추적하는 것도 후손들의 몫이자 과제일 것이다. 고려조인 1002년과 1007년 제주섬에서는 용암이 분출하였으니, 천년 전 제주선인들은 화산을 실제 목격하였다. 탐라순력도를 그린 화공이 비양도에 붉은 칠을 했음을 유념하고자 한다. 화공은 우도의 비양도가 아닌, 수류촌(水流村)인 명월 근방에서 화산이 분출한 곳 임을 표시하려 붉게 칠했을 것이다. 다음은 고려사에 있는 한 대목이다. 목종 5년 6월, 탐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