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옹포 동쪽 방사탑(좌)과 옹포 서쪽 방사탑(우) 제주에는 오래전부터 사악한 기운을 예방하기 위해 돌로 쌓아 만든 방사탑이 도처에 남아 있으며, 지금도 방사용 또는 조형물로 쌓고 있다. 옹포리 바닷가에는 마을의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주민의 안녕을 기원하며 쌓은 방사탑이 비양도를 향하여 바닷가에 서 있다.(조천읍 신흥리에는 근해 바다에 세워져있기도 하다.) 방사탑은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에 불길한 징조가 비친다거나, 비교적 허(虛)하다고 여겨지는 지역에 방위를 막아 마을의 평안을 비는 비보속신(備補俗信)에서 쌓은 탑이다. 좌우•음양•암수•남북 대칭으로 쌓는 것이 보통이며, 탑 위에 새의 형상을 한 돌이나 사람 모양의 석상을 세운다. 방사탑은 육지의 솟대와 거욱대와 유사하여 장승이나 미륵신앙의 역할도 한다. ▲ 거인 형상의 차귀도와 수월봉이 보이는 용수리 바닷가와 방사탑 해상안전과 방사의 기능과 함께 전염병과 화재 예방, 아이를 낳게 하고 보호해 주는 주술까지 그 기능이 다양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제주 도처에서 방사탑을 여러 모양으로 변형하여 조형예술로 탄생시키는 경향도 있다. 탑을 쌓아 올릴 때는 그 속에 밥주걱이나 솥을 묻고, 그
▲ 옹포리 한림청장 명월포•독개•독포라고도 불렸던 역사적인 마을 옹포에는, 감태 공장•통조림공장•한림청장 등 적지 않은 일제의 흔적들이 있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 시절 구축되어 확장된 한림항이 인근에 있어, 이 지역이 일본군들이 주둔했던 지역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2014년 여름 옹포리에 일본신사가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필자는, 이 지역 출신 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옹포별장이라는 곳을 탐사했다. 밀림에 아직도 가려져 있는 그곳은, 해방 직후까지 제주에서 흔하지 않을 정도로 온수로 목욕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한림청장(翰 林靑莊)이라 불리던 별장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경찰의 고위 간부가 살았던 집이다. 1929년 일본식으로 지어진 건물과 정원의 조경수로는 동경•한라산•안덕계곡 등지에서 200여 종을 이식했으며, 30여 평의 연못도 딸려있다. 별장 서쪽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일본식 신단이 있고, 건물 내부에 ‘가미다나’라는 일본신을 모시었다 한다. 한림청장 글씨 속에 다른 글씨가 있었는데 대한민국 특무대에서 그 글자를 없애라고 해서 시멘트로 바르고 다시 썼다 전한다. 삼성혈 곁에
▲ 목호들은 그 수가 1500~2000명에 이르렀으며, 많을때는 3000명 이상이였다고도 해. 삼별초 항쟁이 막을 내린 이후 제주는 약 100년 동안 몽골의 탐라 총관부 설치로 직할 식민지 시대를 맞아야 했다. 목호 수천 명이 제주 여인들과 통혼하여 새로운 가족형태를 낳기도 했던 상황에서, 고려는 제주에 관리를 보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탐라의 목호들은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반기를 들어, 1356년 조정에서 파견 된 도순문사 윤시우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세 차례나 목호가 고려관리들을 살해하자, 공민왕은 1366년 100 척의 군선을 파견하여 목호들을 굴복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원나라가 멸망(1369년)한 이후인 1374년(공민왕 23년) 명나라가 탐라마 2천 필을 요구하자, 이에 공민왕은 다시 목호정벌에 나서야 했다. 목호의 반란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제주가 명에 복속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음을 염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 문영택 전 교육국장 공민왕의 명을 받은 최영 장군은 2만 5605명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명월포로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다.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 명월포 전적지 지금의 한림읍 옹포리 포구는 옛날의 명월포로, 해상의 요충지이자 명월진성으로 가는 통로이고 관문이었다. 탐라가 원나라에 보내는 사신들도 이곳을 통해 오갔고, 삼별초의 이문경 별장과 김방경 장군의 부대도 명월포구로 상륙했다. 안덕면 사계리 용머리 전설과 한경면 고산리 차귀도 전설에 관련된 호종단도 이 포구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특히 1374년(공민왕 23년) 목호들이 난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상륙하여 목호들을 진압하고 돌아간 곳도 이곳이다. 다음은 옹포리 포구에 세워진 표지석 내용이다. ▲ 한수풀역사순례길 출발지인 옹포항에서 바라본 비양도 풍광 명월포 격전지 : 삼별초항쟁과 목호(牧胡)의 난 때 상륙전을 치른 전적지. 1270년(원종 11년) 11월 이문경 장군은 삼별초의 선봉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 고려관군을 무찔러 승리함으로써 처음으로 제주를 점거하게 되었다. 그 뒤 1374년(공민왕 23년) 8월 최영 장군이 314척의 전선에 2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상륙, 몽고의 목호 3천기 (騎)를 무찌른 격전의 땅이다. ① 삼별초와 명월포 즉위 과정에서 원나라의 도움을 받은 고려 원종은, 1270년 천도해 있던 강화도에서
순례길의 상징마크는 제주어로 길 안내자라는 뜻인 「질〜토래비」이다. 학생들과 함께 순례길 가는 도처에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는데, 한림읍에서 재정의 일부를 지원 받아 순례길의 이정표를 제작, 곳곳에 설치하였다. 제주는 예부터 말의 고장이다. 특히 한수풀 지역은 조선시대 제주도에 산재한 국마장 10소장 중 6소장의 목장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말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온 지역이다. 지금의 한림읍 옹포리 포구인 명월포는 제주마를 뭍으로 실어 나르던 포구였다. ▲ 문영택 전 교육국장 옹포 마을 서쪽 편에 지명으로 남아있는 마대기(馬待機)빌레는 바다를 건널 말들을 대기시켰던 곶자왈 지대였다. 그 위쪽 지역에 위치해 있던 월계정사와 우학당은 구우면(舊右面, 지금의 한림 및 한경지역)에 거주하는 학동들이 조랑말 타고 다니던 학교였다. 한수풀 너른 들판과 새별오름 주변은 수많은 장수들이 말 달리며 전투를 벌이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를 반영하여 말을 탄 최영 장군과 장수들, 특히 ‘꿈과 끼’라는 말을 타고 온누리로 내달리는 우리 학생들의 기상을 상징마크에 형상화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명월포를 비롯한 여러 포구에서 제주마를 싣고 떠나는 덕판배 등 여러 형태의 배 밑창에는, 제주 돌인 현무암이 놓여 있었다. 항해 중 말들이 놀라 균형을 잃더라도 배가 평형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모든 배에 실리는 평형수의 역할을 옛날에는 현무암이 담당했다. 제주로 돌아올 적에는 배 밑바닥에 실었던 돌 일부를 바닷가에 내다버리고, 그 자리엔 제주엔 없는 생필품을 실었을 게다. 제주 돌이 버려진 전라도 해안지방 사람들은 단단한 현무암을 이용하여 집을 지었고. 그 증거로 전남 강진(탐진) 근처의 마량포구와 마진포구 주변에서는 집 벽채나 울타리에 박힌 제주 돌이 흔치 않게 발견된다. 마량, 마진 등의 포구이름도 제주마를 내리고 물건을 실었던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2014년은 국가 개조의 원년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그래야 세월호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그동안 국가적 안전 불감증에 의해 삶을 마감해야 했던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해상사고 중 가장 많은 희생자(326명)가 발생했던 1970년의 남양호 사건, 292명의 희생자를 낸 1997년의 서해 페리호 참사, 그리고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의 비극 등에서 보듯, 우리는 같은 잘못을 두 번 세
▲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식의 모습. '한수풀 역사순례길'이란 말을 들으면 가슴이 설렌다. 2014년 한림공고 재직시절 개척한 이 길을, 지금도 나는 틈틈이 사람들에게 안내하고 있다. 2014년 4월의 세월호 비극은, 1970년 12월에 일어난 남영호 비극을 빼어 닮았다. 세월호는 인천에서 제주로, 남영호는 제주에서 부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진정 우리는 세월호의 대참사를 예방할 수 없었을까? 우리가 역사의 교훈을 생활화 한다면 비극은 반복되지 않을 텐데 하는 바람으로,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함께 개척하여 이름 지은 길이 한수풀역사순레길(이하 순례길로 표기)이다. 적지 않은 언론과 방송이 순례길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여러 언론기관에서 제주에서 걸어야 할 길 중 하나로 순례길을 소개한 바, 지역의 일간지와 중앙의 홍보지에 ‘옹포리에서 만벵디까지 굵직한 역사현장’과 ‘슬프고도 위대한 역사를 거닐다.’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아래에 싣는다. 언론에 비친 한수풀역사순례길 천혜의 자연경관과 관광요소가 넘쳐나는 가운데 제주의 역사를 품은 길이 있다. 바로 한수풀역사순례길. 이름 그대로 울창한 숲을
제주에는 방성, 성주, 수성초당 등 하늘의 별과 관계한 어휘가 적지 않다. 특히 제주목관아지와 관덕정 그리고 향사당 등지를 거닐 적마다 도처 구석진 곳에 숨겨진 역사문화 안내판에서 별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읽으며, 새삼 제주는 별의 나라였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 안내판에 적힌 내용들을 모아 소개한다. 칠성대: 주성 안에 있다. 삼성이 처음 나왔을 때 삼도를 나누어서 차지하였는데 북두칠성을 모방하여 대를 쌓고 나누어 거처하였기 때문에 칠성대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조) 칠성대는 탐라 시대부터 전해내려 온 최고의 유적으로 탐라사회의 결속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문화상징이었으며 탐라왕의 호칭인 성주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칠성대는 북두칠성을 항로지표로 삼아 동아시아해를 누비며 주변국과의 교역을 통해 삶을 영위했던 해상왕국 탐라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탐라는 ‘별의 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제삼도인 천기성은 증보탐라지와 파한록에 따르면 외전동(로베로호텔과 재활의원 앞)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칠성단 월대 터: 탐라 도읍의 기점이 된 월대. 전설에 따르면 삼성이 탐라의 도읍
▲ 고수목마로 알려진, 한라산 자락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제주마들. 젊어서는 정식 군인인 정병(正兵) 출신에서 결혼 후 처가에서 얻은 한 필의 말에서 만여 필의 말떼들이 뛰노는 산마장과 갑마장을 일군 헌마공신 김만일은, 말의 고장 제주가 낳은 방성(房星)이었다. 방성이 상징하는 동물인 말은, 고대로부터 제왕 출현의 상징으로도 여겨 신성시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을 보유하고 다루는 능력이 곧 국력이라 여길 정도였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말과 관련 있는 별자리인 방성(房星)을 말의 수호신, 즉 마조(馬祖)라고 하여 제사를 지냈다. 태조 이성계는 서울 동대문 밖에 마조단을 설치해 제사를 지냈고, 제주에서도 마조단을 설치해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 지낸 터가 지금의 칼 호텔 자리이다. 오래전부터 동양인들은 하늘의 별들을 28개 구역으로 구분하고, 각 구역의 대표적인 별자리를 수(宿)라고 불렀다. 28개수를 7개씩 묶어 넷으로 나누고는, 각각을 동서남북으로 상징했다. 이 중 맨처음 등장하는 별들인 ‘동방 7수’는, 춘분날 초저녁 동쪽의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7개의 별자리인 ‘각·항·저·방&midd
▲ 제주성지 동쪽 남수각에 세워진 을묘왜란 표지석.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데에서 비롯된 을묘왜변 초기의 상황을 들여다보자. 1555년(명종 10년) 6월 60여 척의 배에 1,000여 명의 왜구가 제주시 화북포구로 들어와 제주읍성을 공략 하였다. 조선 초기의 제주읍성은, 병문천과 산지천을 자연해자로 삼아 그 안쪽에 성을 쌓았었다. 을묘왜변시 왜군은 지금의 동문로 터리와 사라봉 사이에 있는 높은 언덕에 진을 치고, 제주성안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했다. 이런 지형지물을 이용한 왜군의 기습 공격으로 초기에는 관군이 상당한 열세에 처했다. 당시의 제주목사 김수문은 이러한 상황을 역이용하는 책략을 발휘하는데, 읍성을 방어하면서 별동대 70명을 조직하여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이 작전이 적중하여 왜선 9척을 빼앗고, 수백 명의 적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내용이다.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이 왕에게 보고하기를, ‘6월 27일 무려 1,000여 명의 왜적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날랜 군사 70명을 뽑아 적진 앞으로 돌격하여 30보의 거리까지 들어갔습니다. 정로위(定虜衛) 김직손, 갑사(甲士) 김성조&bul
헌마공신으로 유명한 김만일의 부인도 남평 문씨다. 위의 경주 김씨 입도조인 김검룡의 7세손인 김만일은 남원읍 의귀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정식 군인인 정병(正兵) 출신의 김만일은 혼례를 치를 때까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됨됨이를 알아본 당시 명문가 출신인 문시봉이 그를 사위로 맞아들이면서 그의 운명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장인 문시봉은 1555년(명종 10년)에 일어난 을묘왜변을 앞장서 막아낸 주역 중 한 분으로, 자랑스러운 제주선인이다. 헌마공신 김만일(1550-1632)은 청년시절 처가에서 얻은 말 한 필을 시작으로, 1만여 필의 양마를 소유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위기에서, 김만일은 나라가 필요한 말들을 바침으로써 헌마공신의 칭호를 얻었다. ▲ 이원조 목사가 편찬한 탐라지초본(상하) 게다가 광해군으로부터 정2품 벼슬인 중추부 지중추부사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제수되고, 품계가 종1품의 승정대부에 이르렀으니, 조선시대 제주선인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오른 셈이다. 김만일이 쌓아올린 업적으로 후손들도 230년간 산마감목관을 세습하였다. 다음은 1841년 부터
오래전부터 문씨 가문에서는 아들보다 딸들이 더 똑똑하다고들 말한다. 그래서인지 문씨 부인들이 내조를 잘 하여 크게 이름을 떨친 역사적인 인물들이 적지 않다. 그중 경주 김씨와 관련하여 2명의 제주선인을 소개한다. ▲ 김검룡 초상 경주 김씨 제주입도조인 김검룡(金儉龍)의 부인은 문씨이다. 김검룡은 조선개국 일등공신인 김인찬의 아들이다. 태조 이성계와 여진족 출신 이지란과 더불어 세 사람이 형제의 의를 맺은 ‘도원회맹문(桃園會盟文)’이 후손들에게 전해질 정도이다. 이러한 명문가 출신인 김검룡은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의 영향으로 제주에서의 벼슬을 마친 후,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제주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초기인 1401년(태종 원년) 그는 말을 관리하는 감목사(監牧使)로, 다른 기록에는 훈련원도감으로 제주에 왔다고도 한다. 이후 성산읍 오조리에 정착한 그는 서당을 지어 인재양성에 힘쓰는 한편, 좌도지관 고봉례와 우도지관 문충세 등과 진상 마를 헌납하는데 협력하기도 했다. 진상된 제주 말들은 그의 고향인 지금의 경기도 양평에 있는 마유봉(馬遊峰)에서 길러졌다고도 전해진다. 당시 제주에서는 고씨와 문씨 가문에서 세습되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