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박정희(1961-1979)

 

 

 

1979년 10월 26일. 18년 무한권력이 급서했다.
5·16 군화정치의 시작. 민주주의를 뒤로 물려놓는 대신 이 땅의 서러운 가난을 몰아내겠다는 그의 야심은 산업화의 기틀을 닦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유신으로 연장한 독재는, 측근의 내분으로 급박한 종말을 맞았다.
그에게 총을 겨눈 김재규는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지만, 상처를 움켜쥔 그는 말했다. “난, 괜찮다.”
그의 말은 군인다운 담담함이지만 , 죽음에 이른 이가 오히려 남아있는 무엇인가를 걱정하는 뉘앙스가 담겼다. 그날 국장으로 치러진 마지막 길에 몰려든 저 국민들은 무엇을 슬퍼하며 오열했을까.

 

 

박정희의 유산은 박근혜에게 짐이기도 하지만 힘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돌연한 종말은, 박정희 향수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가 개인적인 치부나 권력 향유를 위해 독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애국적 충정이 집착으로 이어졌을 정황을 읽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박정희는 한국 경제를 이만큼 오게한 비전과 신념의 지도자였다는 평가, 청빈과 소탈이라는 지도자의 기본적인 도덕성을 갖췄다는 평가가 그것을 보강한다.
물론 이런 평가는 박정희 재임시절에 있었던 민주인사의 탄압과 고문, 부패 양상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 또한 일리가 있다. 만약, 그가 비명에 가지 않고 끝까지 권력을 누린 뒤 단상에서 내려왔다면 지금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법정에 서는 일은 없었을까?
박정희리더십과 박근혜리더십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시대도 바뀌었고, 또한 남성과여성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사진 속의 아버지의 굳은 표정과 허리를 굽힌 딸의 웃는 표정이 그런 것을 암시하는 듯 하다.

 

1979년 4월 3일. 죽음을 반년 앞둔 때,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전두환(1980-1988)

 

 

民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서거한지 11일 뒤에(1979년 11월6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보안사령관이 마이크 앞에 나타나, 대통령 시해사건의 내용을 발표했다.
그는 혼란한 시국을 바로잡기 위해 등장한 정의의 사도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달여 뒤인 12월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다.
이에 대한 국민 저항이 커지자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이튿날 광주의 시민들을 무차별 공격한 유혈진압의 피얼룩을 찍는다.
그리고 넉달 뒤인 9월에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공중에 뜬 권력구(權力球)를 박정희와 같은 방식으로 잡아낸 기민한 순발력의 새치기 권력이었다. 민의(民意)를 가차없이 짓밟으며 공포정치로 이 나라를 자신의 방식으로 리모델링하려 했다. 반체제 인사 탄압, 삼청교육대, 각종 사회혁신 조치들.
그 시작은 피였고 공포였고 군기(軍氣)였다.
갑자기 나타난 장군 앞에서 대한민국이 차렷했다. 그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군인 박정희도 했는데, 나는 왜 못하겠는가.” 국민을 부하처럼 충성스럽게 만들 수 있으며 국력을 전투력처럼 갖출 수 있다고 믿었던 신념이, 이 땅의 가치들을 옥죄고 뒤흔들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스스로가 스포츠광이기도 했고, 1982년 3월 프로야구를 출범시켰으며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서울올림픽 유치 치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올림픽은 정치성을 철저히 배격, 평화와 화합의 광장이 되도록 합시다.”
그가 스포츠에 힘을 기울인 것은 스스로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골치아픈 정치에 대한 염증도 있지 않았을까.
민심이나 여론은 카드섹션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 그에겐 힘겨웠을 것이다.
1984년 10월 전국체전 개막식에서 대통령 부부를 새긴 카드섹션이 펼쳐졌다.
그때 전두환은 민심이란 권력이 ‘카드섹션하듯’ 기획하고 조정하면 되는 것이라고 믿었을까. 카드 밑에 숨은 진짜 민심의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생각해봤을까.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민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듯하다.카드섹션 위쪽만 통치하려고 했던 권력의 비극. 3년뒤 1987년 10월1일 39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가 열린 여의도에는 수천 명의 학생을 동원한 카드섹션이 펼쳐졌다. 자라나는 새싹들만은 처음부터 자신을 위해 충성해주기를 바랐을까.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가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야권의 직선제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은 4월13일 호헌 조치로 모든 개헌논의를 중단시켰다. 6월9일 연세대 교내시위 중에 이한열학생이 최루탄을 맞고 부상을 입었는데 7월5일 새벽에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나흘 뒤인 7월9일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장례 행진이 벌어졌고 100만명의 애도 인파가 몰렸다(사진 20-21쪽).
시민의 대대적인 결집에 불안을 느낀 전두환은, 쿠데타 동지이자 친구인 노태우 당시 여당 후보가 특단의 결심을 내리는 형식으로 민의를 파격적으로 수용한다. 6·29선언은 철권으로 통치해오던 전두환 권력의 ‘일단 항복선언’이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의 권력이 피로 이룬 절대권력을 무너뜨린 경험이었다. 

 

 

역사는 가끔 걸음은 더디지만, 와야할 것이 오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1995년 12월2일 검찰은 12·12와 5·18내란사건에 대한 전면 재수사에 들어가, 이튿날 전두환을 긴급 구속 수감한다. 16년만에 이뤄진 단죄였다. 이날 전두환은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이 수사를 “정치적 보복”이라고 주장하고,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이듬해 4월17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전두환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12월22일 김영삼 전대통령이 국민대화합의 명분으로 특별사면한다.
쿠데타로 잡았던 권력은 시위 속에 퇴장하여 결국 법정에 섰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살육과 공포로 틀어쥔 그 권력의 뒷맛은 어떠했던가.

 

노태우(1988-1993)

 

 

12·12 쿠데타에 가담했던 전두환의 최측근 동지였던 노태우는 1980년 신군부 세력의 핵심으로 보안사령관이 된다. 그해 그가 전군지휘관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이다.
군인다운 엄격함보다는 부드러운 미소와 눈길이 인상적이다. 전두환은 자신 이후에 생겨날 수 있는 뒤탈을 막아줄 수 있는 방패막이가 필요했고, 노태우는 장기집권한 유신권력처럼 쿠데타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군인정권을 민심이 당연한 것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차기 권력은 두 사람 모두에게 긴요한 것이었다.
노태우는 쿠데타권력의 소프트랜딩을 미션으로 부여받은 권력이라 할 수 있다.
노태우는 1981년에 대장으로 예편하여 정무제2장관으로 정치수업을 받는다.
이후 1982년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한다. 1985년에는 전국구 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정당 대표위원이 된다. 1987년 6월에 여당 대통령후보가 되고, 6·29선언을 한 뒤 그해 12월에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의 ‘승계’는 부드럽게 준비되었다. 군인으로서의 물을 빼는 과정을 거쳤고, 관료로서 행정부를 익히고 스포츠외교를 통해 글로벌한 감각에 키운 뒤 여의도 쪽으로 선회하여 핵심스타로 부상한다. 파격적인 양보 이벤트를 통해 민심을 끌어들여 나름의 노풍(盧風)을 기획했고, 정권 창출 코스까지 무난히 진입한 것이다.

 

1972년 10월유신 이후 대통령 직선은 처음이었다. 1987년 대선은 그래서 국민들에게도 낯선 잔치였을지 모른다. 노태우후보는 6·29로 만들어낸 ‘관용’과 ‘소통’이미지를 확장하여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는 선거구호를 들고나와 전국 득표율 36%를 이끌어내, 라이벌인 김영삼을 제치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당선된 뒤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스스로 나와 “나는 물대통령 맞습니다.
참는데 도사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군인대통령 이미지를 씻고 북방외교와 같은 외치에 공을 들였다.

 

아래 사진은 1991년 취임 3년을 맞아 청와대 사진전에 참석해서 포즈를 취한 것이다.

 

 

 

전두환이 칼의 무사라면 노태우는 활의 무사라 할 만하다.
칼은 접전으로 승부를 걸지만 활은 멀리 있는 적을 잡는다.
칼은 직정(直情)적이지만 활은 계산적이다.
대권을 잡은 노대통령이 퇴임 이후의 안전을 위한 보험으로 생각한 것은 3김이었다. 3김의 경쟁관계를 잘 활용하면 쿠데타 원죄를 불문에 붙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1990년 1월22일 단군이래 최대 정치적 지각변동이라는 3당합당이 이뤄졌다. 민정당 노태우대통령, 통일민주당 김영삼총재,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총재가 보수대연합을 표방하며 신당창당을 선언한 것이다. 김대중 당시 평민당총재에게도 제안이 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1년 바이츠제커 독일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환영 만찬장에는 3김이 모두 모였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서먹한 표정이 착잡했던 당시의 관계도를 웅변해준다.

 

 

1992년 12월엔 5·16 혁명 이후 처음으로 군 출신이 아닌 민간 출신의 대통령이 탄생했다.
노태우는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김영삼에게 앉도록 권하고 있다.

 

 

대통령은 무사히 넘겼지만 그래도 꿈자리는 시끄러웠다.
갑작스럽게 보통사람이 되고 물대통령으로 변신하고 활을 쏘듯 멀리 보며 3김 낚시로 상황을 건너가려 했지만, 그래도 원죄를 피할 순 없었다. 그가 걸려든 것은 쿠데타 죄목이 아니라, 비자금 혐의였다. 1994년 서석재 의원이 4,000억 비자금설을 제기했고 이후 박계동의원이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하자 검찰이 수사에 나섰고 결국 노태우는 혐의를 시인했고 결국 구속되고 말았다.
이후에 12·12 정승화 체포사건과 5·17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면서 징역 15년에 추징금 2,688억 원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96년 대통령 사면 때 특별사면되었다.
나쁜 권력을 움직이는 것은 나쁜 돈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대통령. 그 또한 대통령 재임 때 국가나 국민을 위해 나름으로 충정을 기울인 점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처음과 끝이 모두 떳떳하지 않았기에 그런 노력들마저 허망하게 묻히고 만 셈이다.
물대통령이라 불리며, 쿠데타의 얼룩을 지우고 물타기를 하려다가 결국 물(돈) 때문에 대가를 치렀던, 최고권력자. 그 인생은 보람있고 행복했던가.

 

김영삼(1993-1998)

 

 

1979년 야당총재였던 그는 경찰의 닭장차에 실려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그가 말한 새벽은 14년 뒤에야 왔다.
김영삼은 1993년 첫 문민정부의 대통령이 된다. 1954년 26세로 제3대 국회의원 민의원에 당선되어 최연소 국회의원을 기록하며 9선 의원을 지냈던 그는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1990년 재야인사들의 비판을 감수하고 그는 3당 합당에 참여했고 결국 그렇게도 꿈꾸던 권력을 쥐게 되었다.
평생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깨끗한 투쟁경력, 광범위한 대중 지지도. 그 권력의 출발에 일정한 ‘야합’이 있었다 하더라도 목표에 이르기 위한 전략적인 측면으로 보아준다면, 그는 실로 오랜만에 원죄의 허물이 비교적 없는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그 시작에는 많은 이들의 진심어린 환호가 있었다.

 

 

1993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김영삼은 부친 김홍조 옹의 손을 잡고 청와대로 걸어 들어왔다. 거제에서 막 올라온 대통령의 아버지는 아들을 잘 키운 자부심이 눈빛에 흘렀다. 반듯한 가정교육이 저 말없는 사진 한장으로 읽혀졌다. 그해 여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칼국수 점심을 먹었다. 배고프던 야당 시절 즐겨먹던 그 음식이었다.
국수를 떠넣는 장면은 말이 필요없을 만큼 소박하고 인간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그는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내는 결단을 보였으며 무모할 만큼 과감한 방식으로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
숨은 돈을 끌어내는 혁신적 조치였던 이 제도는 그간 몇 차례 거론되었으나 부자들의 반대로 흐지부지 되었던 제도였다. 이 조치를 시행한 날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여러분들, 깜짝 놀랐재?”

 

 

 

김영삼은 모태신앙의 기독교인으로 타 종교인들로부터 편파적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1993년 5월에 있었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원법회'에 참석한 대통령은 불교예식인 합장 대신 눈을 감고 묵념을 올리고 있다.
김영삼은 집권 초기 파격적인 조치들을 잇따라 내놓는다. 자신의 재산을 공개했고 공직자 재산공개를 제도화한다. 그리고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없애 쿠데타의 싹을 잘랐다.
또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물질 보상은 일본에 요구하지 않기로 하고 정부예산으로 보상하기로 했다. 다만 진실을 밝히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자는 주장이었다.
또 그는 지방자치제도를 확대하여 단체장을 직선하는 폭을 크게 늘렸다.

 

 

1993년 6월11일 헌법재판소 청사 준공식에 참여해 '헌법수호'라는 휘호를 남기고 있다.
김영삼은 정통성을 찾는 일에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임시정부에 있다고 주장했고 현충원에 임정요인 묘소를 신설하도록 했다. 또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에도 공을 들였는데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북핵위기에는 그 대응이 오락가락했다는 평가가 있다. 특히 정권 말에 금융위기 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심각한 국가부도 사태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YS시절은 유난히 대형참사가 많았다. 1993년 1월 청주의 우암상가 아파트가 붕괴되어 70여명의 사상자가 났고. 3월엔 부산 구포역 탈선 전복참사로 27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사진은 그때 유가족들을 위로하러간 대통령의 모습이다.) 7월엔 아시아나 항공기가 목포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다 추락해 66명이 숨졌고, 그해 10월엔 서해 훼리호 침몰로 292명이 사망했다. 이듬해인 1994년 10월엔 서울 성수대교가 무너져 49명이 죽거나 다쳤다. 1995년 4월엔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로 24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6월엔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501명이 숨지고, 937명이 부상했다.
1996년 4월엔 경기도 양평서 시내버스가 벼랑으로 추락해 59명의 사상자를 냈다.
매년 큰 참사가 잇따르자 지도자의 부덕(不德) 탓이라는 조선시대같은 한탄이 나오기도 했다. 불운이 겹쳤다고도 볼 수 있으나 지난 시대에 축적되어온 부실(不實)과 안전불감증이 한꺼번에 재앙으로 터져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영삼은 무사히 대통령을 마쳤으나, 임기말에 터진 외환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또 퇴임 직후 불거져 나온 아들 김현철의 비리, 측근이자 인척인 홍인길의
뇌물수수 사건으로 스타일을 크게 구기고 말았다. 그의 퇴임사의 한 마디가 귓전에 남는다.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정주영(1992)

 

 

1992년 김영삼 외에도 대통령의 꿈을 크게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통일국민당 후보로 나온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
11월 30일 그는 유세를 펼치고 있었다.
“반값 아파트를 전국민에게 공급하겠습니다.”
옆에는 최불암, 이주일, 강부자 등 연예인 정치인들이 함께 서 있었다.

 

 

군인들이 나라 어지럽힐 동안 우린 열심히 일했다. 기업보국을 해왔다.
정치는 꼭 정치인이 해야 하는가. 기업인이 더 민생을 잘 알고 부자나라 되는 방법을 더 잘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의욕이, 군인정치를 청산하는 1992년에는 피어올랐음직하다. 기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정주영후보의 저 환한 웃음은, 생의 또다른 의욕을 웅변해주는 듯 하다.
1992년 3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할 무렵의 정주영.

 

 

 

“나를 세계 수준의 대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한국인이라고 남들은 평가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나 자신을 자본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아직도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을 해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
최고 경영자란 여러 능력을 가져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어떤 과제가 있을 때 그것을 집중적으로 실행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같이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효율적으로 인식을 시키고, 그 인식시킨 내용이 효율적으로 행동에 옮겨지도록 하는 실행력이 있는 사람만이 최고 경영자요, 훌륭한 간부라고 생각한다.”

 

 

1987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정주영은 1992년초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고 제14대 총선에서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된다.
12월 제 14대 대선에 출마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야망을 표출했다. 그러나 꿈은 곧 깨졌다.
그는 1998년 6월 16일 1,001마리의 소를 이끌고 방북함으로써 민족적인 정치 행보를 보여줬다. 그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내가 17세 소년이었을 때 가난이 싫어 소 판 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한 적이 있다. 그 후 나는 묵묵히 일 잘하고 참을성 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왔다. 이제 그 한 마리가 천 마리의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김대중(1998-2003)

 

 

우리에게 김대중이란 이름은 무엇인가. 오랜 동안 한국 현대정치의 가장 뜨거운 자리에 늘 있었던 인물. 독재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저항적인 운동가. 한국 민주화의 한 상징.
호남을 중심으로 한 이 땅의 야권을 결집시킨 정신적 거목, 뛰어난 정치적 전략과 집요하고 투철한 목표를 지닌 야당의 당수. 납치, 가택연금, 투옥, 망명으로 점철한 탄압받는 민주인사. 아니 남북정상회담을 실현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지도자. 외환위기를 극복해낸 대통령.
목포상업학교를 나와 목포상선, 흥국해운 창업, 전남선박목포조합장을 거치면서 사업가가 되었다. 전쟁 직후인 1954년 목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다.
1961년 5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지만 5.16 쿠데타로 당선 3일만에 의원직을 잃었다. 박정희와의 얽힌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6대 총선에서 목포 국회의원이 된 김대중은 1971년 대선에 출마한다. 신민당 내부 경선에서 김영삼 후보를 꺾고,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박정희에 도전한다. 그 결과는 95만표 차이의 석패였다. 이후 8대 총선과정에서 김대중 후보가 탄 차량으로 14t 대형트럭이 돌진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 사고로 김대중은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71년 이후 대선에 도전한지 네번째인 1997년에 마침내 그는 대통령이 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김대중의 역할과 성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격렬한 호불호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에겐 뚜렷한 권력 야망이 있었고 국가를 경영하려는 의지와 철학과 비전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 야망이 어디로 흘러갔는가. 그는 역사 속에 어떻게 남았는가.
우리에게 DJ는 무엇인가.

 

사진은 1979년 긴급조치 해제 때 해금된 김대중

 

 

1987년 10월 11일 성남에서 김대중은 민주화운동 시민대회를 갖는다. 서울로 바람을 몰아가기 위한 사전 전략이었다.

 

 

그 집요한 도전 끝에 이룬 권력은 어떠했던가. 집권 초기의 외환위기를 무사히 넘긴 뒤, 그는 햇볕정책을 대북기조로 삼았다.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북한에 5억달러의 비밀자금을 만들어 송금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이 특검 와중에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하는 사태까지 빚어진다. 대북송금 사건 특검은 측근 박지원이 3년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종결된다. 그렇게 북한에 돈을 건넸지만 햇볕정책의 취지처럼 북한이 바뀌어주지는 않았다.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등의 북한 도발이 일어났고 2003년엔 핵심험 위협까지 했다.
국정원 불법 도청사건도 파문이 컸다. 안기부를 대혁신하겠다는 DJ의 의욕이 무색해졌다.
야권 인사의 휴대전화 상시도청이 여전히 이뤄지고 있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어 국정원장이었던 임동원, 신건이 징역형을 받았다.
DJ로서는 치욕적이었을, 측근 비리도 적지 않았다. 김홍업은 업자의 청탁요구를 받고 3억원을 받았다가 돌려준 혐의로 징역10개월을 건고 받고 3남 김홍걸은 체육복권 사업자 선정을 싸고(최규선게이트) 돈을 받아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았다. 그는 최규선 게이트로 대국민 사과를 발표한다.
권력으로의 진입장벽은 그토록 높았고, 그곳을 뚫고난 뒤 모든 것을 다 이룬 듯 했으나, 대통령 김대중의 역정 또한 그리 녹록치 않았다. 가장 자부심으로 여겼던 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노벨평화상의 명예에 금이 가면서, 그가 평생 가꿔온 이미지에 중대한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공안정치의 불법 관행들도 여전히 근절하지 못했고, 아들들이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무엇이 잘못 되었던가. 대통령이라는 시스템의 잘못인가. 인간 김대중이 지녔던 인간적 결함이나 한계였을까. 아니면, 권력을 지닌 인간이 지니기 쉬운 함정들을 그 또한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노무현(2003-2008)

 

 

그는 확실히 별이었다. 별처럼 떠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판사로 1년 재직하다 그만두고 인권변호사가 된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다.
이후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은 1990년 10월 13일 보안사 불법 사찰 및 군정청산 국민대회 보라매집회에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질의문을 낭독하는 모습이다. 혈기와 격정이 느껴지는 표정이 인상적이다.
1988년 11월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가 열릴 때 국민들의 그의 입만 쳐다 보았다. 장세동 안기부장, 안현태 청와대 경호실장, 이종원 법무장관, 정주영현대그룹회장 등을 상대로 차분하고 논리적인 말솜씨로 진실을 면밀하게 추궁해내는 그의 능력에 사람들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었지만, 연예인 못지 않은 스타가 됐다.

 

 

 

종로아리랑도 여느 아리랑과 마찬가지였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10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던가. 1996년 3월 제15대 총선. 종로에는 거물 셋이 붙었다.
노무현, 이명박, 이종찬. 당시 이명박은 14대 국회 때 민자당 전국구로 정계에 입문해 15대 총선에서 정치 1번지인 종로에 도전해 당선된다. 그런데 선거법 위반 사실이 드러나 자진 사퇴하고 1998년 보궐선거에서 노무현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된다.
‘종로가 바뀌면 한국 정치가 확 바뀐다’는 그의 말은 예언처럼 맞아떨어졌다.
그 이후 종로에서 당선된 두 사람이 그 뒤 대통령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은 전직이며 벼랑에서 뛰어내려 고인이 되어 있다.
그 뜨겁고 아슬아슬했던 곡절들이야 새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2009년 5월29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제.
5월23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일한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슬퍼하며 따르는 국민들이 거리를 꽉 메웠다. 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은 전국적으로 500만(봉하마을 장례위원회 추산)이 넘는 인파가 각지의 분향소에 조문을 했다. 많은 이들을 불러모은 힘은 무엇일까. 청문회 인기스타 시절이나 대통령 당선 때의 노풍(盧風)과 같은 것일까. 한 국가지도자의 비극적 종말에 대한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비감일까. 아니면 그가
보여주었던 한국 정치와 리더십의 가능성에 대한 그리움과 추인같은 것일까. 사람들은 말없이 오열하며 따랐지만, 그에게 사람을 매료시키는 무엇인가가 있었고, 그것은 지상에서 쉬 떠나보낼 수 없을 만큼 아쉬운 가치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을지 모른다. 그에게 권력은 무엇이었던가.
물론 한 때는 한번 쥐어보고 싶은 것이었겠지만, ‘대통령짓 못해먹겠다’고 곧 투덜거릴 만큼 염증도 빨랐다. 그가 비상하던 시절의 야망과 그것이 실현되고난 다음의 일들은 어떻게 야망의 프로그램과는 달리 흘러나갔는가. 부엉이 바위에서 부는 바람에 가만히 물어볼 뿐이다.

 

이명박(2008-2013)

 

 

2008년 2월25일. 또 한 사람이 권력에 들어서는 날, 이미 그 권력을 맛보고 그것의 치명적인 독까지를 맛본 사람들이 같은 자리를 스친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입을 다물고 이제 시작하는 사람은 꿈을 꾼다. 그때 ‘일하는 작은 정부’, ‘경제 살리기’, ‘도덕적으로 깨끗한 정부’는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시작하는 날에 끝날을 기억하면, 끝날에 시작하는 날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을터인데.
權不五年이라, 영원한 왕좌에 앉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만과 부패와 집착이 끼어들 수밖에 없느니. 대선에 나서는 이여,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의 뒷모습을 기억하라.
그것이 자신의 곧 자신의 모습이 될 것이다.
虛虛대권이여, 대한민국 권력들 그 어리석음의 윤회여.

 

박근혜(2013~)

 

2012년 12월 19일 대선에서 그녀는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한 여인의 파란만장(波瀾萬丈)에 획을 긋는 중대사이면서 한 나라의 역사를 움직인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총탄에 쓰러진 어머니 육영수를 대신하여 퍼스트레이디 직무를 수행해야 했던 딸. 이 특별한 정치 이력은 다시 아버지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던 1979년 10월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후 1998년 대구 달성에서 제15대 국회의원 배지를 달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했던 박근혜는 19대까지 5선 의원을 지냈고 여당의 부총재와 대표 최고위원을 지내며 정치기반을 다져왔다. 2013년 2월25일 대통령에 취임하는 그녀는, 신라 선덕, 진덕, 진성여왕 이래 건국 최초의 명실상부한 여성 권력자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녀는 모성보다는 영국의 대처 같은 강철의 인상이 먼저 떠오른다. 독신이며 인문학보다는 과학과 기술에 더 친숙한 이공계 대통령, 그리고 아버지의 카리스마가 DNA 속에 숨어있는 듯 엄하고 강직한 면모를 지닌 리더. 우린 이제 이 ‘한국판 대처’의 리더십에 대한민국을 맡겼다.

 

대선 유세 현장에서 박근혜는 어린 소녀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박근혜가 약속한 세상은 그 소녀가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문득 새끼손가락이 걸린 어린 민심은, 두려움과 어색함이 눈빛과 입술에 살짝 올라와 있다. 그것이 정점의 권력에 바싹 다가간 여인의, 정치적인 미소와 결부되면서, 기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대선 열기가 뜨겁던 유세장에 한 지지자가 들고 나왔던 사진 속엔 박정희의 얼굴이 들어있다. 이 사진은 놀랍게도 1979년 대통령이었던 그가 서거한 뒤 거리의 장례행렬 위에 걸려있었던 바로 그것과 같은 것이다. 이 지지자가 그것을 의미했던 안했던 간에, 이 사진은 박정희의 못 이룬 꿈과 그것을 다시 이을 딸의 꿈을 비원(悲願)처럼 드러내는 암시라 할 만하다. 어떤 이들은 박정희의 독재가 딸의 정치 속에서 부활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섞기도 한다. 세상이 바뀌었고 나라가 바뀌었고 국민 수준이 바뀌었는데, 1970년대의 통치로 돌아가는 회귀가 과연 가능할까. 오히려 박정희의 장점들만 잘 계승되고 진화되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에너지로 거듭나기를 바랄 뿐이다.

 

박근혜의 근혜 槿(무궁화나무 근), 惠(은혜 혜)는 ‘무궁화처럼 사랑하라’는 박정희, 육영수 부부의 희원(希願)이 담긴 이름이다. 대중가수 심수봉의 노래 ‘무궁화’는 그래서, 지금 시점에서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이 몸이 죽어 한줌의 흙이 되어도
하늘이여 보살펴주소서 내 아이를 지켜주소서
세월은 흐르고 아이가 자라서 조국을 물어오거든
강인한 꽃 밝고 맑은 무궁화를 보여주렴
무궁화 꽃이 피는 건 이 말을 전하려 핀단다
참으면 이긴다 목숨을 버리면 얻는다
내일은 등불이 된다 무궁화가 핀단다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니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머물지 말고 날아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하늘에 산화한 저 넋이여
몸은 비록 묻혔으나 나랄 위해 눈을 못감고
무궁화 꽃으로 피었네 이 말을 전하려 피었네
포기하면 안된다 눈물 없인 피지 않는다
의지다 하면 된다 나의 뒤를 부탁한다

 

‘무궁화가 핀단다’와 ‘나의 뒤를 부탁한다’가 강렬하게 남는다. 노랫말 속에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머물지 말고 날아라’는 권력을 잡은 이후까지도 통찰하고 있는 가사가 아닌가. 권불오년(權不五年)이니 전임자들의 추문과 추락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으라. 현실과 개인에 머물면 평생을 바쳐 일궈놓은 명예의 정점이 한 순간에 더러워지지 않던가. 너는 그것을 떨쳐내고 날아올라라. 이 노래가 지닌 삼엄한 주문들이야 말로, 모든 권력자가 베갯머리에 써놓아야 할, 처연한 경험자의 조언 같다. 2018년, 박근혜대통령의 뒷모습을 미리 기억하라.

 

 

두 남자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두 남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야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후보가 되었고, 한 사람은 강력한 여론에 힘입어 후보로 나선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합(合)과 분(分)의 딜레마에 부딪쳤다. 각각 출마하면 박근혜 후보에 확실히 밀리고, 합쳐서 출마하면 승산이 있는 게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협상을 시작했고, 야당이라는 눈에 보이는 세력기반을 지니고 있는 문재인 후보가 유리했다. 야권 단일화라는 전략적 선택은, 양쪽 누구로 단일화해도 모두 확실한 승리가 점쳐질 때, 협상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민심은 문심(文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게 야권의 패착이었다. 단일화 프레임은, 유력한 당선 후보였던 안철수를 흔들고 멍들게 하고 결국 전선(戰線)에서 튕겨나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선거 과정을 통해 두 남자는 대체로 신사적이면서도 열정적인 캠프활동을 보여주면서, 이 땅의 정치 품격을 업그레이드 하였다. 서로 많은 것이 달랐던 두 사람, 그들은 패배하였지만 대한민국 정치를 발전시킬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최재영 포토대기자는? =대구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 사진학과를 나와 동아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78년 중앙일보로 삶터를 옮긴 후 청와대, 국회, 판문점 등을 출입했다.

한국사진기자협회가 주최하는 한국보도사진전에서 금상 등 다수의 상을 수차례 수상했다. 2002년 12월 이탈리아 토리노시 테조리아레 전시관에서 열린 <KOREA> 사진 초대전과 2011년 1월 비디오아트 예술가 백남준의 무속적 행위예술을 기록한 <백남준 굿> 개인전을 열었다.

 

모교인 중앙대 사진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하였고, 중앙일보 편집국 사진부 부장을 거쳐 2011년 8월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사진담당 국장직을 마지막으로 퇴임했다. 현재 동강국제사진제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며 다수의 사진전을 기획·감독했고, 독립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