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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장개석이 대만으로 철수하는 결정은 창졸간에 내린 것이 아니다. 하야하기 전에 이미 결정돼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만은 장개석이 하야한 후 퇴로로 선택된 경로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고 유일한 선택이란 말은 아니다.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

 

수도 및 중심이라는 관점에서 보자. 남경(南京)은 국민 정부가 수립된 수도다. 항일전쟁시기 잠시 수도를 중경(重慶)으로 옮겼었다. 항일전쟁이 끝난 후 다시 남경으로 이전했다. 국공내전이 긴급하게 전개될 때 몇몇이 천도에 대해 말했지만 장개석은 응대하지 않았다. 전쟁이 급박하게 전개된다고 해도 반드시 천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대만은 장개석이 가장 중시하는 지역 중 하나였다. 대략 1947년 말, 이미 각종 사무의 안배가 끝나 있었다. 장개석 개인이 대만으로 옮기려는 결정은 아마도 국공 북경담판이 실패한 후일 가능성이 많다. 이종인(李宗仁)이 거듭 하야를 종용했고 중공이 장강을 건너오면서 상해가 직접적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자 대만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시간은 1949년 4월 말이 분명하다.

 

모든 정부가 대만으로 천거하는 결정은 5월 정해군사회의(定海軍事會議) 때이며, 5월 16일 국민당 중앙회의에서 다시 확정했다. 5월 17일 장경국(蔣經國)의 일기에 기술돼 있다. “이때 중심을 잡는 사람이 없었다. 강남 반쪽이 이미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도 추격병으로 의심하는 것처럼 두려움에 떨었다. 초목개병이었다. 부친은 대만으로 철수해 재차 혁명대업을 가다듬기로 결정했다.”

 

5월 18일, 대만성은 입경 수속을 간소화했다. 국민당 군정 기관 및 인원들이 계속해 대만으로 들어갔다. 대만은 장개석이 계획했던 곳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최후에 정부가 대만으로 이전하는 것과 장개석이 대만으로 옮긴 것은 시국의 변화에 따른 결과다.

 

장개석이 최후에 대만으로 결정한 원인은 다음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장개석은 대만에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1946년 10월 21일, 장개석은 부인을 대동하고 대만을 여행하면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 “대만은 아직까지 공산분자들이 침투하지 못했다. 실로 정토나 다름없다. 이후 적극적으로 건설해 모범되는 성을 만들어야 한다. 소련 공산당이 교활한 계략을 세워 우리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희망하고 있는데 장차 나와 같은 자가 없으면 어찌될 것인가?” 그러면서 제시했다. “대만을 순시하면서 얻은 수확이 동북지방을 순시하며 얻은 수확보다도 많다. 전국 민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게 됐다.” 장기윤(張其昀)의 회고에 따르면 대만으로 철수한 후 장개석이 기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대만만 있으면 공산당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경호항(京滬杭, 북경, 상해, 항주) 경비 부사령관 겸 전장 정무위원회 비서장 축소주(祝紹周)가 장발규(張發奎)로 하여금 해남도(海南島) 군사를 담당하도록 건의했다. 대만(臺灣), 복건(福建), 절강(浙江), 광동(廣東) 및 해남도 사이는 대만이 중심이었다. 군사상 강한 조직이 필요했다.

 

만일 동남(東南) 방면의 군사가 좌절당한다면 대만을 근거지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국민당의 기업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공산당은 대만에서의 세력이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았다. 대만의 정치 환경도 중경이나 광주 지역보다도 단순했다.

 

군사적인 방면에 있어서도 해협(海峽)이 방패막이가 돼 주었다. 해군과 공군이 부족한 중공이었다. 대만은 비교적 안전했다. 이런 상황이 어쩌면 장개석이 대만을 근거지로 선택한 중요한 원인이 됐을 것이다.

 

둘째, 동희성(陶希聖), 장기윤, 장경국, 진성(陳誠) 등이 건의했다.

 

국면이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좌우에서 사천 방어가 중요하다고 하자 도희성은 대만의 위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대만 부흥은 장래의 희망이다. 영국과 미국은 해양세력 국가다. 대만으로 간 후 해양을 근거지로 삼으면 태평양과 접한 미국과 접촉할 수 있다. 그 사이 발전 가능성이 매우 많다.”

 

대만의 위치에 대해 웨드마이어(Wedemeyer)와 호적(胡適)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웨드마이어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대만을 반공의 기지로 삼으려면 그 정책은 반드시 지방 인민의 복지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높은 행정 효율을 표본으로 삼아야 한다. 대만은 풍부한 자원과 동력이 있어 그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마땅히 대대적으로 개발해 인민 복지 증진에 써야 한다.”

 

호적은 웨드마이어와 생각이 달랐다. “대만은 700만 인구밖에 없다. 대만의 공업도 독립 자치의 경제 기초를 이루지 못한다. 우리는 반드시 대륙에서 자유중국의 규모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가 승인하는 정식 정부를 유지할 수 있다.”

 

장기윤은 지리적 각도에서 장개석에게 건의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만해협은 넓고 파도가 세다. 해군과 공군이 없는 공산군의 추격을 잠시나마 뿌리칠 수 있다.

 

둘째, 대만을 반공 부흥의 기지로 삼으면 다른 지역보다도 장점이 많다. 토지 이용률이 높고 농산품도 군민의 수요를 충족시킨다. 대만은 교통이 편리하고 공업 기초를 갖추고 있다. 경제 발전에 유리하며 군사상 방어도 용이하다. 태평양 서쪽 항해의 길을 틀어쥐면 미국의 원동(遠東) 전략 방어선과 맞대게 된다.

 

대만은 50년 동안 일본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중앙정부로 회귀한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공산당 조직과 활동이 비교적 적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분석이 장개석이 대만으로 철수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장개석이 하야한 후 장경국이 항상 대동했다. 장경국은 여러 차례 장개석을 대표해 여러 문제들을 처리했다. 대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장개석에게 출국해 캐나다로 갈 것을 건의했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정세에 대해 장개석에게 보고하면서 정세가 위급할 때 대만으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가족끼리 주고받은 편지에서 장경국의 건의도 장개석이 대만을 선택하게 된 원인의 하나일 가능성이 많다.

 

1948년 6월 26일, 장경국은 장개석에게 전보를 친다. “우리 정부가 공전의 위기에 처했음이 분명합니다. 붕괴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위기 국면을 만회할 방법을 찾는 것 이외에 후퇴할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소극적이거나 비관적으로 얘기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보후퇴 십보전진의 뜻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광동에서 북벌이 성공했던 까닭에 사천에서 항일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후에 만일 실패하게 되면 대만에서조차 발붙일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비밀리에 남천(南遷)할 계획과 준비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과거 성격으로 볼 때 장개석은 상당히 주관적인 인물이다. 어떤 막료의 건의가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성은 분명 영향을 줬을 것이다. 진성이 대만성 주석을 맡은 후 명령을 받고 북경으로 갔다.

 

1949년 1월 21일, 진성이 탄 비행기가 정해 상공에 다다랐을 때 임시 항주(杭州)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장개석은 하야한 후 봉화(奉化)로 돌아가는 도중에 진성과 진의(陳儀) 등을 접견했다.

 

잠시 지시를 받은 후, 남경으로 건너가 대(代)총통 이종인과 손과(孫科) 원장을 만나 업무 상황을 보고했다. 25일 대만으로 돌아간 후 팽호(澎湖) 2곳, 대북(臺北), 양명산(陽明山), 대계(大溪), 일월담(日月潭), 고웅(高雄), 사중계(四重溪) 등 8곳에 장개석의 임시 거처를 준비했다. 그곳이 진성이 마련한 장개석이 대만으로 간 후의 노선이며 잠시 거처할 장소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장개석에게 대만으로 갈 것을 재촉했다. 5월 11일, 진성은 장개석에게 전보를 보냈다. “직무상 바라옵건대 귀하께서 빠른 시일 내에 대만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귀하께서 움직이실 때 비밀로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유스럽다는 것을 알리십시오.”

 

5월 15일 다시 전보를 쳤다. “이종인의 담화를 읽으니 영수께서 모욕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간부의 치욕입니다. 저들 무리는 이해도 모르고 힘만 알뿐 결코 도리로써 설명하고 정으로 호소할 줄 모릅니다. 저는 귀하께서 빨리 대북으로 오시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것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5월 17일, 장개석이 탄 비행기가 마공(馬公)에 도착한다.

 

진성이 대만성 주석으로 부임한 후 대만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가운데 뿔뿔이 흩어져 지휘권에서 벗어난 군대나 몰래 침투한 중공분자들이 있을까 염려됐다. 대만의 안정을 파괴할 가능성이 있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했다. 대만으로 철군할 때 불리한 요소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대만성 경비 총사령부에서 ‘대만성 입경 군공 인원 및 여행객 임시 행동 방법’(3월 1일 시행)을 공포했다. 동시에 「대만 입경 군공 인원 및 여행객 주의」 사항을 공포했다. 각 항의 출입경 관리 조치들이 표면화 됐다.

 

예를 들어 『계엄 시기 항운 여행객 입경 및 검사 방법 관제 강화』와 같은 것이 그렇다. 이 방법은 대륙에 본적을 둔 민의대표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물론 장개석과 진성 사이에 어느 정도 갈등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설화원(薛化元)교수가 진성이 대만 정치를 주관할 때의 상황을 설명한 내용과 다름없다. “진성이 대만성 주석을 역임한 기간이 1년이 채 안 된다. 그러나 당시에 대만 내부의 정치, 사회,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대만 내부에서 국민정부의 통치력에 도전(위협)하는 가능성을 없애는 데에는 상상 이상의 효과를 거뒀다. 정부가 대만으로 이전한 후 통치체제를 공고히 하고 이후 대만 발전에 기초를 닦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진성은 그때 장개석에게 대만으로 갈 것을 건의한 것을 보면 모종의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셋째, 이종인이 거듭 출국할 것을 종용했다.

 

이종인은 장개석이 중국내에 있으면서 정국을 조종하는 것을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밖에 있는 호사가들이 그 틈을 이용해 헛소문을 퍼뜨렸다.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

 

상해 평화대표단이 북경으로 가기 전, 황계한(黃啓漢)이 의견을 제시했다. “장개석이 국내에 머물면 평화회담에 장애가 됩니다. 출국을 종용하세요.” 1949年 3月 8日, 남경 『구국보救國報』[공덕필(龔德柏) 주필]가 “장개석이 출국하지 않으면 구국은 희망이 없다” 등의 표제로 장개석을 비방했다.

 

뇌진(雷震) 등이 적극적으로 장개석과 이종인의 분쟁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고 심지어 장개석이 처한 처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장개석에 대한 남경정부의 비판이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견강부회를 넘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신랄할 정도가 이성을 벗어났다. 반면 왕세걸(王世杰)은 장개석을 종용해 출국시키는 것은 정세에 무익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동남, 서남의 장교들이 명령을 듣지 않게 된다고 봤다.

 

 

그래도 장개석이 출국을 종요하는 목소리가 잦아들기는커녕 더 점점 높아졌다. 4월 1일, 평화회담 대표 장치중(張治中), 류비(劉斐), 황소횡(黄紹竑), 장사쇠(章士釗), 이증(李蒸) 등이 북경으로 가면서 장치중이 장개석에게 출국할 것을 건의했다.

 

장단점을 분석한 후 출국이 이롭다고 했다. 첫째, 비방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둘째, 전쟁 패배의 책임을 없앨 수 있다. 셋째, 일반 장교들의 의존 심리를 감소시킬 수 있다. 넷째, 견문을 넓힐 수 있다. 다섯째, 인민의 소감을 전이시켜 인민들로 하여금 그리워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출국에 따른 해로움은? 안전 문제, 일시적 군사상 중심 상실, 당의 이완을 피할 수 없는 점 등이었다.

 

북경 회담이 좌초하자 장잉(張仍)은 장개석에게 전보를 쳤다. “제때에 큰마음 잡으십시오. 의연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시 출국하십시오.” 이런 사태에 대면한 장개석의 태도는 하야와는 다르게 대응했다. “그들이 나를 하야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나를 망명하라고 하는 것은 안 된다”고 재차 표명했다. 이종인은 다시 입장을 밝히라고 핍박했다. 장경국이 당시를 회고한 적이 있다 :

 

부친은 상해에서 위기 국면을 견디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종인이 편지를 보내 부친에게 상해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부친이 상해를 떠날 때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다. 군함에 올라 주산(朱山)에 이르렀으나 상륙하지 않았다. 그저 부근의 섬들을 시찰했다. 해상에서 10일 동안 머물렀다. 실로 건곤만리요 망망대해였다.

 

그런 역경에 처하고 궁지에 몰리면 그 누구도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처했으나 부친은 태연자약했다. 일기에서 “앞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방향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길이 없다손 치더라도 새로이 길을 만들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고 썼다.

 

부친이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위기 국면을 만회하려 준비할 때 이종인이 갑자기 편지를 한 통 보냈다. 자신은 계림에 체류하겠다고 했다. 공무를 처리하러 광주에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부친에게 조건을 달았다. 이종인은 대만으로 옮긴 창고에 보관된 황금을 요구했다. 그리고 부친에게 다시는 국사에 관여하지 말고 빠른 시일 내에 출국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안팎으로 협공을 받는 상황에서 부친이 얼마나 비통해 했는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면서도 결연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이종인에게 회신했다. 대체적인 뜻은 이랬다. “당신이 내게 출국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있을 수 없소. 나는 군벌이 아니기 때문이오. 내게 정사에 관여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있소. 내일부터 관여하지 않을 것이오.”

 

이런 장경국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면 이종인이 출국 종용이 장개석으로 하여금 대만으로 떠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장개석이 이종인에게 회신한 이튿날 곧바로 상해를 떠나 정해(定海)와 부근의 여러 섬들을 관찰한 후 얼마 없어 마공을 경유해 대만으로 갔기 때문이다. 결국 환경의 변화, 시국 판단, 안전에 대한 고려, 막료의 건의, 그리고 북경회담 실패 후 이종인의 강요 편지 등 모두 장개석이 대만으로 떠난 원인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해방군은 어찌해서 대만을 공략하지 않았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해방군의 해군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국군’의 수준과 함께 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기에서 공산당이 해남도(海南島)를 복속시켰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해남도는 공략하기가 쉬웠다. 경주(瓊州)반도가 해남도와 비교적 가까웠기 때문이다. 1949년 12월 해남도를 손에 넣은 해방군은 여러 차례 걸친 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만 침공을 계획했다. 그러나 대만의 상황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정성공(鄭成功)이 대만을 공략할 때를 회고해봐야 할 것이다. 당초 정성공은 조수를 이용할 줄 알았고 전함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수비군들이 너무 방심했다. 암초를 돌아 불의에 공격해서야 겨우 대만으로 상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해방군의 해군은 모두 어선이었다.

 

1949년 10월 24일 저녁, 바다를 건너 금문(金門)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해방군 상륙부대는 금문도에서 삼일 밤낮을 고전했다. 지원군도 끊겼다. 결과적으로 금문을 공격한 해방군 군대는 전멸 당한다.

 

그 실패로 ‘국군’은 사기진작 됐다. 대륙에서 승승장구하던 해방군이 좌절을 맛보고 사기가 떨어진 것은 당연했다. 해방군이 다시 대만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러자 미국 제7함대가 대만 해협으로 진입했다. 그렇게 해방군이 대만을 공략할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가 해방군이 대만을 공략하지 못한 둘째 이유다.

 

시간이 흐르고 냉전이 끝나고 전쟁의 방식도 국제환경과 부합하지 않게 변했다. 대륙은 자신들만의 경제, 문화 방식으로 대만 당국과 교섭했고 지금까지도 전쟁 없는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도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공약은 하지 않고 있다.

 

만약에 또 다른 원인을 찾는다면, 신중국 탄생 후 대륙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티베트 침공, 상서 일대와 귀주지역 전쟁, 한국전쟁 개입. 그리고 사상개조와 경제문제 미해결(아니 실패). 소련과의 알력. 어찌 한둘이겠는가. 당시 재차 대만을 공략하지 못한 것은 중공 내의 모순이 여러 방면에서 표출됐기 때문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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