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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5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첩(妾)은 중국 봉건사회의 정식 아내 이외에 데리고 사는 여자, 즉 소실(小室)이다. 측실(側室), 편방(偏房)이라 부르기도 한다. 『흘량전․희공9년』에 “첩을 처(妻)로 삼지 말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 봉건사회에서 남권(男權)은 하늘을 찔렀다. 많은 첩을 둘 수 있었다. 여자는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라야’ 했다. 신중국이 들어선 후 헌법으로 일부일처제를 명확히 했고 남녀평등을 주창했다.

 

 

 

 

한(漢) 무제(武帝)가 신뢰했던 신하가 있다. 우리들의 전설에도 등장하는 동방삭(東方朔)이다. 동방삭은 재기와 상상력이 뛰어났고 달변이었다. 무제가 중임해 시중랑(侍中郞)을 시작으로 박사 등의 요직을 맡았고 무제에게 은을 하사받았다. 어느 날 무제는 동방삭에게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고 진수성찬을 준비했다. 동방삭이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다고 한 후 음식은 먹지 않고 품속에 넣은 후 물러가겠다고 했다. 무제가 언짢아해 하자 황제를 모시고 같이 식사하던 대신들은 동방삭이 무례를 지적하며 책망했다. 동방삭은 편안하게 웃으면서 “폐하, 신은 이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가서 몇 명의 첩을 다시 맞이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동방삭이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무제는 “너는 모두 몇 명의 처첩을 거느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동방삭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처는 그저 한 명이옵고, 첩은 셀 수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무제는 싫증난다는 듯이 “설마 네가 황제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물었다. 동방삭은 “신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신은 그저 첩을 한 명 맞이할 때마다 1년만 머물게 하고 다시 새로운 첩을 찾습니다. 저는 이렇게 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무제는 크게 웃으면서 손을 저어 동방삭에게 물러가라 명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첩을 들이는 현상이 중국 고대에는 흔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처를 들이는 것도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당시의 남자들은 능력이 있고 재산이 많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여자를 첩으로 들일 수 있었다. 첩이 맘에 들지 않으면 이혼장을 내밀며 여자를 쫓아내고 새로운 첩을 맞이했다. 당시의 여인들은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고훈을 준수해야 했으며 털끝만큼도 남편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중국 고대의 축첩(蓄妾)제도는 전형적인 일부다처제다. 남자는 처와 첩을 들일 수 있었다. 부부 사이에도 불평등이 있었고 처와 첩 사이에도 불평등이 있었다. 첩은 가정의 최하층으로 살아야 했다. 첩은 ‘차처(次妻)’, ‘방처(旁妻)’, ‘부처(副妻)’, ‘측실(側室)’, ‘외실(外室)’, ‘소처(小妻)’, ‘소부(小婦)’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민간에는 ‘작은 각시’로 불렸다.

 

중국 고대의 축첩제도의 기원은 원시사회의 부권제에 의해 출현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있었다. 중국의 대문구(大汶口) 문화(기원전 4300 - 2500)에 이미 부부와 처첩을 합장하는 현상이 있었다.

 

중국에는 ‘3궁(三宮), 6원(六院), 72비(妃)’라는 말이 전해온다. 이는 중국 황제의 축첩 현상을 가리킨다. 주(周) 문왕(文王)은 후비(后妃)가 24명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다. 진시황은 6국을 멸한 후 6국 궁중에 있었던 여자들과 각지에서 선발된 미녀가 수 천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아방궁(阿房宮)에서 살도록 했다는 말도 전한다. 한나라에 이르러 원제(元帝)는 3000명, 동한(東漢) 환제(桓帝)는 5000명의 여인을 뒀다고 한다. 이 정도가 됐다면 절세미인이라는 왕소군(王昭君)이 궁중에 들어간 지 3년 동안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진(晉) 염제(炎帝) 때에는 후궁이 된 미녀들이 1만이 넘었다고 한다. 수(隋) 양제(煬帝)의 후궁은 5000명이었으나 각지에 행궁에 궁녀의 수가 1만이 넘었다. 가장 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당(唐) 명왕(明王) 이융기(李隆基)로 당시 도성의 황궁과 각지의 행궁의 궁녀 수는 4만에 달했다고 한다. 1년이 365일이니 100세를 산다고 해도 36500날밖에 살 수 없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4만이 넘는 궁녀가 있었다면?

 

 

 

 

송(宋)대 이후 제왕들의 후궁 비첩(妃妾)의 수는 감소하기 시작한다. 다시는 ‘10000명’의 기록에 도전하지 못했다. 이것은 명나라 제왕들이 호색가가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전의 제왕들보다 명나라 제왕들은 실속이 있었다. 기효람(紀曉嵐)의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희종(熹宗)은 천계(天啓) 원년(元年)에 각지에 사람을 파견해 5000명의 미소녀를 선발하고 궁에서 면접했다. 첫 번째 관문, 체형 검사를 한 결과 1000면밖에 통과하지 못했다. 4000명의 미녀들이 탈락했다. 두 번째 관문은 ‘은밀한 부위(사처[私處])’ 검사였는데 300명밖에 통과하지 못했다. 세 번째 관문은 궁에 들어가 ‘실습’하고 1개월 후 50명만 비빈(妃嬪)에 봉해졌다. 이렇게 해서야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민국(民國)에 들어와서도 축첩의 풍속은 여전히 존재했다. 원세개(袁世凱)는 처첩 16명을 거느렸는데 그중에는 자매와 조카가 끼어 있었다.

 

황제가 천하의 미색을 축첩한 것 이외에 중국 고대의 민간에도 축첩 풍속이 존재했다. 『홍루몽』중의 평아(平兒), 향릉(香菱)은 모두 첩이다. 강직하기 이를 데 없던 해서(海瑞)도 화갑 때에 소첩 두 명을 들였는데 처와 첩이 갈등하면서 둘 다 자살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는 “나도 부평초와 같아 파도에 따라 청명을 즐기노니. 내게 두 명의 젊은 첩이 있으니 함께 같이 준마를 타고 노니나니.(余亦如流萍,隨波樂休明.自有兩少妾,雙騎駿馬行.『留別西河劉少府』)”라고 읊을 정도였다.

 

‘두주불사’로 유명한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도 일부다처 제도의 집행자였다. 이백은 호방한 성격에다 풍류를 즐길 줄 알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인물로 ‘주색(酒色)’을 즐겼다. 고증에 따르면 이백은 4명의 처와 살았으며 소첩의 수는 셀 수도 없었다고 한다.

 

명나라 법률에는 남자가 40세가 됐는데도 후사가 없으면 첩을 들일 수 있다는 명문 규정이 있었다. 중국의 이른바 “불효 세 가지 중에 후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크다”는 옛말이 있는 것처럼 몇 명의 첩을 들여 조상에게 향을 피울 후사를 얻게 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 고대 남자들에게 축첩할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가 됐고 그럴듯하게 당연한 것처럼 축첩제도를 포장할 수 있었다.

 

청나라 군대가 양주(揚州) 성 밑에 이르러 전투가 시작되려 할 때 대장군 사가법(史可法)의 부인이 남편에게 싸움에 나가기 전에 첩을 들이라고 적극 권했다. 이유는 슬하에 자식이 없기 때문에 사 씨 집안의 대가 끊겨 조상을 모시기 못하게 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사부인의 큰 뜻(?)이 전국에 미담으로 퍼졌고 남자들에게 축첩하는 합리성을 조장했다.

 

 

 

 

그러나 축첩은 부유한 사람이나 관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빈한한 백성들은 하루 세끼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어찌 ‘삼처사첩(三妻四妾)’이 가당키나 했던가. 봉건통치시대에 한쪽은 ‘붉은 대문 안에는 술과 고기가 썩어 냄새를 피우고 있는[朱門酒肉臭]’ 고관대작들이 수도 없이 많은 첩을 거느렸고 한쪽은 ‘길에는 얼어 죽은 뼈[路有凍死骨]’들만 즐비한 사회에서 백성들은 평생 결혼도 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결국 축첩제도는 군주전제제도의 부용품일 따름이었다.

 

축첩제도란 지극히 불공평한 것이다. 여성에게 잔혹하기가 그지없었고 비인간적인 것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여성들의 피와 눈물로 쓴 역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첩제도가 생긴 이래 쉽게 흔들리지 않고 수천 년을 이어온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축첩제도의 근본은 원시사회 형태가 잔존한 행태다. 아주 오래 전 남자들이 사냥을 나가고 여자들은 집을 지켰다. 사냥해온 것을 먹을 때면 남자가 배불리 먹고 난 후에야 여자가 먹을 수 있었다. 군주전제제도가 생겨나면서 축첩의 현상을 더욱 제도화 보편화시켰다. 부권(夫權)통치는 봉건사회의 산물이며 특징이다.

 

축첩제도는 바로 봉건제왕전제의 필요에 부합되면서 이어져 왔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축첩제도가 폐지됐다. 현대 이전의 중국의 역사는 결국 ‘제왕전제’였고 계급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통곡의 역사였음을 축첩제도가 증명하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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