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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43)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진시황릉(秦始皇陵)은 현재 섬서(陝西)성 임동(臨潼) 동쪽 5킬로미터에 있는 여산(驪山) 북쪽에 있다. 땅을 다져 능을 만든 것으로 높이는 76미터, 깊이 485미터, 둘레 2525.4미터다. 이제까지 그 부근에서 문물이 대량으로 발굴됐다. 병마용(兵馬俑)이 가장 많다. 진시황릉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다. 내부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한다.

 

 

중국 역대 제왕들은 능묘를 건축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봉건예교의 규정에 따라 제위에 오른 날부터 자신을 위해 능묘를 세우는 공정을 시작했다.

 

거의 모든 제왕들은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사람은 죽지만 영혼은 불멸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살아생전에 먹고 마시고 즐기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죽은 후에도 영혼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 능묘는 제왕들의 영혼의 마지막 귀착점이다. 그래서 많은 능묘들은 지하 궁전이요 사후의 천당으로 관곽을 사치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진귀한 보배들을 부장했다. 그런 능묘의 지상 부분도 웅대하다. 진시황은 6국을 병합시키고 중원을 통일하여 스스로 ‘시황제’라고 불렀다. 37년을 재위하면서 천하의 수많은 보물을 모았다. 그래서 그의 능묘는 중국 역대 제왕 능묘 중에서도 가장 크다. 규모면에서나 부장품 수량에서나 공예의 정교함이나 기관의 기이한 것 등 모두 전무후무하다.

 

37년 동안 진시황릉을 건설하면서 백태를 연출한다. 여산 북쪽에는 토산이 높이 솟아있다. 토산 주위는 휘황찬란한 궁전을 세웠고 사면을 웅장한 성벽으로 둘렀으며 성벽 4면의 성문에는 위엄서린 궐문을 세웠고 성벽의 네 모퉁이에는 아름다운 각루를 세웠다. 토산 아래에는 진시황과 셀 수 없이 많은 보물들을 묻었다.

 

진시황릉은 56.25평방미터다. 외성, 내성, 침전, 길상 동물의 갱, 마구간 갱, 용갱(俑坑) 등이 있다. 시설과 용구는 현실 사회와 똑 같이 없는 것이 없고 치밀하다. 방대한 능묘를 건설하면서 동원된 인력은 계산하기 힘들 정도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능묘를 만들면서 한 번은 73만 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왕의 능묘를 만들면서 그렇게 많은 인력이 동원된 예는 없다.

 

능묘에 사용된 석재의 양도 놀랍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위하(渭河) 북쪽의 산에서 석재를 날라 왔다. 석재를 운반하는 사람과 말들로 위하의 물 흐름이 끊길 정도였다고 한다. 치석장의 면적은 75만 평방미터나 됐고. 수만의 사람들이 망치와 끌로 석재를 다듬는 소리가 쩌렁쩌렁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하였다.

 

능묘의 토목공사는 더욱 놀랍다. 진시황릉 남쪽에 ‘오령(五嶺)’이라 부르는 능묘를 보호하는 둑은 길이가 3500미터고 넓이는 40미터, 높이는 2-8미터다. ‘어지(魚池)’라 불리는 흙을 파낸 구덩이가 있는데 주위가 4리이고 천여 년 동안 물이 고여 못이 됐는데 아직까지 마르지 않고 있다. 한 번 생각해보시라. 찌는 햇살아래 황사가 얼굴을 덮쳐온다. 백리가 넘는 광활한 평원에서 수십만 명이 거의 벌거숭이인 채로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얼굴에 땟물이 줄줄 흐르며 족쇄를 차고 있다. 가장 허술한 공구를 가지고 흙을 파고 돌을 다듬고 운반하고 지고이고……해마다 날마다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쫓아다녀야 했으니. 얼마나 참혹했을까!

 

 

가장 놀라운 것은 진시황릉 내에 “수은으로 수많은 강, 하천, 내, 심지어 바다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현대 과학으로 실험하고 추산한 결과 능묘에 보관된 수은은 100톤가량이 된다. 그렇게 많은 수은을 만들려면 116톤의 단사(丹砂)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렇게 많은 수은은 어디에서 왔을까? 조사해본 결과 순양(洵陽), 산양(山陽), 약양(略陽) 일대의 수은 광산에서 채굴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파촉(巴蜀)의 과부 청(淸)은 수대에 걸쳐 수은 광산을 운영했다. 길이가 백 여 리가 되는 거대한 수은 광상으로 그 매장량은 전국 3위였다. 그 광상에서 몇 십 년 동안 채취한 수은은 진시황릉에 소모된 양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 100톤의 수은은 정교하게 설계된 지계에 의해 끊임없이 흐르도록 만들어져 능묘 안을 고농도의 수은 증기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고 한다. 시체와 부장품을 오래도록 부패하지 않게 보존할 수 있으면서 지하궁전으로 들어서는 도굴꾼들을 독살시키기 위한 것이다.

 

진시황의 관곽은 지극히 사치스럽다. 이미 출토된 증후을(曾侯乙) 묘와 비교해 보자. 증후을 묘의 관곽이 놓여 있는 방은 380입방미터의 목재를 쌓아 만들었다. 주관은 2층 관으로 ‘외관’은 22근 3.2톤의 동으로 골격을 만들었고 두꺼운 목판으로 관과 바닥, 뚜껑을 만들었다. 관곽을 안치한 방의 내부는 4개로 돼 있다. 동실은 ‘정장곽(正藏槨)’으로 능묘의 주인의 관인 주관을 안장하고 다른 각 실은 ‘외장관’으로 예악기를 놓아두거나 순장한 자를 놓아두기도 하고 거마기와 병기를 배치하기도 하였다. 추측해 보건데 진시황릉의 관곽은 분명 증후을 묘의 관곽보다도 크고 화려하며 근사할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진시황의 지하궁전에는 ‘인어고(人魚膏)’로 등을 켰다고 한다. ‘인어고’란 고래의 지방을 말한다. 과학자들은 고래 기름으로 초를 만들면 1입방미터의 고래 기름으로 5000일 동안 빛을 낼 수 있다고 추론한다. 기름 소비가 적고 발화점이 낮으며 쉽게 꺼지지 않은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불을 밝힐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과학으로 보면 공기가 차단됐기 때문에 그런 ‘장명등(長明燈)’을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능침에 부장한 많은 보물을 보호하기 위해 진시황의 지하궁전은 중요한 기관을 설치했다. 『녹이기』 기록에 도굴꾼들이 능묘를 도굴하는 이야기가 보인다. “석문이 열리자 비처럼 화살이 쏟아졌다.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다. 가운데로 돌을 던졌더니 던질 때마다 화살이 쏟아져 나왔다. 십여 번 돌을 던지니 그제야 화살이 나오지 않게 되니 횃불을 들고 들어갔다. 두 번째 문을 열자 목인(木人) 수십이 눈을 크게 뜨고 칼을 휘두르니 또 수 명이 죽었다. 다시 들어가자 남쪽 벽에 커다란 관이 쇠밧줄에 매달려 있었다. 그 아래에 금과 옥, 진주와 같은 보물들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두려워 차마 줍지를 못하고 있는데 관 양쪽에서 갑자기 솨솨 바람이 불어오며 모래가 사람들을 덮쳤다. 잠깐 사이 바람이 거세지고 모래가 쏟아졌다. 무릎까지 쌓이자 사람들은 놀라 도망쳤다. 가까스로 빠져나올 때 쯤 문이 닫혔고 뒤따라오던 사람들은 모래 속에 파묻혔다.” 기사회생한 도굴꾼들은 두려움에 다시는 능묘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진시황릉의 기관은 상술한 것보다도 복잡하고 정교하며 무시무시하다고 한다. 고증한 결과 설치된 노궁(弩弓)의 사거리는 831.6미터라 한다. 장력은 738킬로를 넘고. 그러한 노궁이 하나하나 연쇄적으로 발사되면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어느 누가 피할 수 있으랴!

 

역사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진시황릉은 5차례에 걸쳐 파괴됐다. 그중 대규모로 도굴하고 파괴한 것은 서초 패왕 항우(項羽), 오호십육국 시대의 후조 군왕 석호(石虎), 그리고 당나라 말기 농민봉기군 우두머리 황소(黃巢)다. 그러나 고증에 따르면 지하궁전 안에 있는 보물은 무사하다고 한다. 그저 지상에 있는 능침과 같은 건축물이 항우에 의해 불태워졌을 뿐이다.

 

 

진시황릉은 이천 년 동안 웅위를 자랑한다. 지금도 땅속 깊이 묻힌 지하궁전의 토산은 광야에 우뚝 솟아있다.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진시황릉, 언제 우리에게 진면목을 드러낼 것인가?

 

흐릿하면서도 신비로운 황릉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영생을 갈구했던 전제군주, 자신만의 사후세계를 위한 잔혹의 결정체,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을 안겨줄 것인가.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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